13화― 상월(霜月)
깊지 않아 보였던 지하로 이어지던 계단은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장윤호를 따라 내려가는 둘은 통로가 어두운 탓에 서로의 옷가지를 잡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자 계단이 끝이 났고, 넓은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단하군요.”
이윤후는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계단이 끝이 나자 넓은 광장 같은 곳이 나왔고, 둥근 광장 벽 쪽에는 여러 개의 방이 철문에 잠겨 있는 게 보였다.
“지하에 이런 규모의 시설이 있다는 게 놀랍군요.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대단하네요.”
이윤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구조였다.
“꽤 오래전에 장가철장이 처음 이곳에 세워질 때 만들어진 곳이죠. 천무고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여기는 장주인 저조차도 잘 들어오지 않는 곳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장윤호는 잠긴 방들을 돌아보며 확인하더니 이윤후와 유인경을 불렀다. 장윤호가 서 있는 방엔 삼(三)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었고, 방마다 숫자가 매겨져 여덟 개의 방이 지하에 존재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상월(霜月)은 이 방에 있는 거 같습니다.”
장윤호는 삼 번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굳건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고,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철컹―
끼익―
장윤호는 자물쇠를 열어 바닥에 놓았다. 철문을 밀자 오랫동안 열리지 않는 문이었는지 굉장한 소음을 내며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제가 도와드리죠.”
장윤호가 조금 힘들어하며 철문을 밀자 이윤후가 그를 거들어 주었고, 그 덕분에 드디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기(寒氣)가…….”
이질적이었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한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차가운 공기에 유인경이 놀라 외쳤으나, 이윤후는 열린 철문 사이로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저게 상월. 이 소협의 사부님이 저희에게 맡긴 검입니다.”
장윤호가 방 안을 보며 이야기하자, 유인경도 얼른 달려와 그것을 보았다.
텅 빈 방 안 정가운데 놓인 둥글고 검은 석대(石臺) 위로 백검(白劍)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부터 시린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북해(北海)의 그것처럼, 방은 얼음으로 뒤덮여 차가운 서릿발이 휘날리는 듯했다.
그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 방 안의 냉기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차가운 기운이…… 저 검에서 나오는 건가요?”
유인경의 물음에 장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월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지요. 저 검은 신장(神匠)으로 불리셨고, 장가철장을 지금에 있게 해 주신 장진 선조님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신장이라면 백 년도 더 이전의 인물이 아닌가요? 그가 장가철장의 선조셨군요.”
신장이라면 유인경도 아는 인물이었다.
한때, 무림에 한 장인에 대한 소문이 크게 퍼진 적 있었다.
그가 만든 무기를 들면 하수가 중수 되고, 중수가 고수로 변한다. 그리고 고수가 그의 무기를 가진다면 무림을 평정할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소문을 증명하듯이, 실제로 장인의 무기를 든 평범했던 검수가 절정의 고수로 변모하자, 무림의 모든 무인이 그 장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무림에 세 개의 무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그 무기를 지닌 자들은 모두 무림에서 위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 후에 사람들은 그를 신장이라 부르고, 그 무기를 신기(神器)라 칭했으나, 이내 세 신기 모두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무림에 알려진 신장의 무기는 세 가지였어요. 검(劍)과 도(刀)와 궁(弓). 그중에 신장의 검은 칠흑과도 같은 흑검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저 검은 아예 다른 검이잖아요.”
“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네요.”
유인경이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토해 내듯 말하자 장윤호가 조금은 놀라운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장의 무기가 알려진 것은 이미 이백 년 전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선 이미 잊힌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실을 유인경이 꽤 자세히 알고 있자 장윤호는 놀란 것이었다.
“제가 과거 무림 일에 관심이 많아서요. 그리고 신장의 무기 중 하나였던 홍라염도(紅羅炎刀)에 관해 관심이 좀 있어서 신장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홍라염도의 주인이었던 그 당시 도후(刀后)에 대해 관심이 많았었나 보군요.”
“네. 제 우상과 같은 인물이어서 많이 알아보고 이야기를 듣고 자랐었어요.”
유인경의 말에 장윤호는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는 유인경이 즐거워했기에 도후에 대한 존경이 어느 정도 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후의 명칭은 꽤 오래전부터 물려 내려왔는데, 도를 기본으로 하는 한 비밀스러운 문파의 지존들이 도후란 별호를 이어 왔다.
오절의 한 명인 도후 역시 그 이름을 물려받은 인물로, 유인경이 존경한다는 그녀 역시 그 문파의 수장이었다.
장윤호와 유인경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윤후는 어느새 상월이 놓인 석대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스스스―!
이윤후가 검에 다가서자 검은 위협을 느낀 생물과도 같이 더욱 강한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소협, 위험하지 않나요……?”
“그분의 제자라면 상월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유인경의 물음에 장윤호가 답했다. 사실 그도 상월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천무고의 방에는 방마다 기물(奇物)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주인이 찾아오기 전에는 절대 그 방을 열지 않는 것이 장가철장의 장주들에게 내려온 불문율이었다.
‘특이하군…… 벌써 천무고의 방이 열리는 게 몇 번째인지…….’
장윤호는 상월에 다가가는 이윤후를 등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네가 상월이구나. 사부님께서 너를 나에게 맡기신 이유가 있겠지.”
이윤후가 상월에 손을 뻗자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더욱 강해졌다. 지켜보던 장윤호나 유인경의 눈에는 마치 검이 무공을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윤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월을 잡았다. 검이 이윤후의 손에 잡히는 순간, 방 안에 가득 찬 냉기가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화를 내던 여인이 사내의 품에서 화가 풀리는 모습과도 같다고, 유인경은 잠깐 생각을 했다.
“신비로운 검이구나…….”
이윤후는 상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투명할 정도로 검의 모든 부분이 흰색이었다.
“역시, 선택받으셨군요.”
“선택이요?”
어느새 다가온 장윤호의 말에 이윤후는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상월의 기록을 보니 신장의 무기 중에 가장 까다로운 무기라고 하더군요. 주인을 선택하는 검이지요.”
“검이 주인을 선택한다라…….”
장윤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윤후는 말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상월이 뿜어내는 냉기(冷氣)를요.”
“아…….”
“상월은 북해빙궁의 빙정(氷晶)을 이용해 신장이 만든 검으로, 그의 최고 역작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신장도 의도치 않았던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해 처음엔 실패작이라고 여겼다 합니다.”
장윤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신장이 세 가지 신기를 만들어 낸 후, 사패(四覇)의 한 곳인 북해빙궁(北海氷宮)에서 그의 실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초청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북해빙궁주는 귀하다는 빙정을 내놓으며 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신장 역시 빙정을 이용한 무기는 처음이었기에 수락하여 북해빙궁에 머물며 검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가 한참 신장의 소문이 무림에 나면서 그를 찾기 시작할 때였는데, 그가 북해빙궁에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빙정은 그 자체로 냉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신장은 무기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무려 삼 년의 시간이 걸려서야 검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검을 완성한 신장은 북해빙궁주에게 이를 주려 했으나, 마치 검이 그를 거부하듯이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북해빙궁의 누구도 검을 잡을 수가 없었기에 북해빙궁은 검을 신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나마 신장에게만은 냉기를 뿜어내지 않았기에 검을 받은 그는 무림으로 다시 돌아왔고, 무림에서도 검의 주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상월은 신장에게 이름만 받은 채 장가철장의 천무고에서 봉인된 채 있었다.
“빙정으로 만든 검이라 이렇게 투명한가 보네요.”
어느새 다가온 유인경이 이윤후가 들고 있는 상월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손을 대 보려 했으나 상월에서 냉기를 다시 뿜어내자 그녀는 손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 소협, 검을 든 손은 괜찮아요?”
“네. 검이 냉기를 뿜어내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영향을 주는 거 같지는 않네요.”
조금 전 유인경이 검을 만지려 하자 상월에서 냉기를 뿜어내기에 자신도 움찔했지만, 냉기가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후의 말에 설명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장윤호를 보았다.
“신장께서는 북해빙궁에서 돌아오신 후 상월의 처분을 고민하셨죠. 무림에서도 주인을 찾지 못한 검을 자신의 실패작으로 여겼습니다.”
장윤호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신장이 무림에 돌아오자 무림인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억만금을 낸다는 이도 있었고 절세미녀를 붙여 주기도 했다. 협박을 하는 자도 있었다.
위협을 느끼고 피신한 신장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신장에게 투자를 할 테니 한 가지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안전한 장소와 재료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는 그를 믿고 제안을 수락한 신장은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무기가 만들어지자 그는 신장에게 현재 장가철장을 제공해 주었다.
신장은 지하의 천무고를 만들어 상월을 봉인했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 죽을 때까지 전념했다. 신장이 죽고 그의 자손들이 장가철장을 발전시켜 왔고, 상월은 영원히 봉인되는 듯했었다.
하지만 장가철장에 오절이 찾아와 각각 한 가지 무기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하여 오절에게 무기들을 만들어 주었으나, 검성은 만들어진 검에 만족하지 못했다.
검성이 검에 만족하지 못하자 자존심이 상했던 장가철장의 장주는 봉인되어 있던 천무고로 검성을 안내했고, 그에게 상월을 보여 주었다.
상월을 보자 눈빛이 변한 검성은 그 앞으로 이끌려 다가섰고, 서릿발 같은 냉기를 견뎌 냈다.
장가철장의 장주는 검성이라 해도 상월의 냉기에 포기할 거라 생각하고 망신을 주려 했지만, 놀랍게도 상월은 굴복이라도 한 듯이 냉기를 거두어들이곤 검성의 손에 보통 검이 되었다.
그렇게 상월은 검성의 소유가 되었다. 장가철장의 장주는 상월을 무상으로 검성에게 내주려 하였으나, 검성은 나중에 다른 주인이 찾아올 거란 말만 남긴 채 보관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상월은 다시 오십 년 넘게 천무고에서 잠들어 있었다.
오늘 이윤후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이 소협은 북해빙궁과 인연이 있나 보네요.”
장윤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유인경은 이윤후와 상월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러게요.”
둘의 이야기에 장윤호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죠? 북해빙궁과 인연이 있다니요?”
“아, 사부께서 북해빙궁에서 받으셨다고 한 북해설응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사부님이 주신 것들이 다 북해빙궁과 관련이 있네요. 이제 보니…….”
검성과 인연이 있는 장가철장의 장주인 데다 상월도 무사히 받았으니, 이윤후도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중에 북해빙궁에 간다면 이 소협께서는 환영받으실 수 있겠군요. 북해설응은 여간해서 북해빙궁에서 밖으로 내주지 않는 영물인데, 거기에 빙정으로 만든 이 상월은 그들이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이니까요.”
“언제 한번 가 보고 싶긴 하네요.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북해빙궁이 낯설지 않으니까요.”
“일단 올라가시죠. 두 분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군요.”
“네.”
덜컹―
장윤호는 상월이 있던 철문을 다시 닫은 후 두 사람을 계단에 먼저 오르게 한 후 천무고를 한번 살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