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장가철장(張家鐵場)(1)
“미홍아.”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던 우금은 미홍을 보았다.
“네. 맹주님.”
미홍의 태도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거의 알몸과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은 적나라하기 그지없었다.
“도망갔다던 유상휘의 손녀를 찾아보아라.”
“찾기만 해요? 아니면…….”
미홍은 우금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그리 물었으나, 우금은 생각에 빠진 듯 잠깐 답이 없었다. 유인경은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친우의 손녀인데 내가 보살펴 줘야지. 남들 보기에도 그게 보기 좋지 않겠느냐?”
그리 말하며 웃는 우금의 모습에 미홍은 섬뜩함을 느꼈다. 우금의 본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기에 우금이 원하는 바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유상휘의 손녀라면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아(女兒)였지. 좋은 의도로 그녀를 보살피겠다는 뜻은 아닐 거야, 저 인간은…….’
미홍은 차마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 채 생각만 했다.
우금은 처세가 좋은 인물이었다. 자신의 세력도 없이 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것만 봐도 그랬다. 무림맹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성장한 우금은 그만큼 뒷배를 만들 수 있었고, 권력자들의 약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금은 무림 선배들의 약점을 잡아 협박해 자신을 지지하도록 했고 맹주직에 오른 뒤 그들을 다 척살했다. 바로 미홍과 그녀의 세력을 이용해서.
그렇기에 미홍은 우금의 모든 것을 가장 잘 아는 조력자이자, 그에게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나의 이용 가치가 있는 한 그는 날 제거하지 못하지. 우리 역시 그의 권력이 필요하고…….’
미홍과 그녀의 세력은 우금과 서로 공생(共生) 관계에 있었고, 서로를 적당하게 이용하며 눈을 감아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 우금이 자신의 목을 졸랐을 때도 결국 죽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하악…….”
생각에 빠져 있던 미홍은 갑자기 쑥 들어온 우금의 손에 놀라 신음성을 내뱉었다. 우금이 어느새 자신을 안아 커다란 손으로 온몸을 더듬고 있었다.
“일단 여흥은 즐겨야지.”
우금은 그녀를 안고 맹주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고, 사람들을 물려 놓은 터라 주위엔 이곳을 지키는 무사들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움직였다.
* * *
타닥― 탁―
나무가 타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에 유인경은 눈을 뜨고 백아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닥불에 올려진 토끼로 보이는 고기였다.
꾸륵―
유인경이 자신의 품을 떠나자 백아도 날개를 쭉 피고는 몸을 푸는 듯했다.
“네가 고생이 많았지, 고마워.”
유인경이 자신을 품에 안고 있어 준 백아에게 고마움을 표하자, 백아도 그 말을 알아듣는지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일어났군요.”
이윤후가 모닥불 옆에 나뭇가지를 한가득 쌓아 놓곤, 불을 키우며 앉아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벌써 사냥까지 해 오고…… 저를 깨우지 그랬어요.”
유인경은 안 그래도 신세를 계속 지고 있는 이윤후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미안했다.
“아침부터 고기라 조금 속이 불편하겠지만 일단 요기만 하고 산에서 내려가죠.”
“네…….”
그녀는 이윤후의 옆에 앉은 채 모닥불에 몸을 녹였다. 겨울은 지났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한기가 느껴졌다. 백아의 따뜻한 품을 떠나자 더욱 그랬다.
빼액―
백아는 한 차례 울고는 큰 날개를 편 채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백아도 사냥하면서 배를 채우고 올 테니 우리도 이거 먹고 움직일 준비를 하죠.”
이윤후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토끼 고기를 찢어 그녀에게 건넸다.
상상만 해 본 노숙과 야외 식사에 유인경은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윤후가 건네준 고기를 받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나중에…… 꼭 신세를 갚을게요.”
거듭 감사를 표시하는 유인경의 모습에 이윤후는 살짝 미소를 보였다. 사파의 여인이라는 말에 조금은 선입관이 있었는데,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에 흥미롭기도 했다.
검성이 이야기했던 정사파의 구분을 짓지 말고 많은 사람을 만나 보라 한 의미를 알 거 같았다.
무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엔 정파만이 의협(義俠)들의 집단이고, 사파는 그 반대이리라 여겼었는데, 자신의 오해임을 유인경을 통해서 깨닫고 있었다.
이윤후는 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이거 먹고 바로 장가철장(張家鐵場)으로 가죠. 먼저 깨서 돌아 봤더니 이 산이 장가철장이 위치한 산이더라고요.”
“그래요?”
“그렇더라고요. 백아가 알고 그랬는지…… 흠, 장가철장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이윤후의 예상대로 백아는 장가철장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동굴을 떠나기 전 검성이 이윤후에게 장가철장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유인경은 밖에서 먹는 식사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며 허기를 채웠다.
* * *
식사를 마친 그들은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고 이윤후는 모닥불을 흙을 덮어서 처리했다.
유인경은 서성거리자 이윤후는 살짝 미소를 보였다.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작은 계곡이 있어요. 거기 가면 씻을 수 있을 거예요.”
“아, 정말요? 고마워요. 얼른 다녀올게요.”
이윤후는 그녀가 씻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신경 쓰여 서성거리고 있음을 눈치채곤 계곡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다시 한번 미소를 보였다.
“백아는 어디까지 간 거지? 왜 안 오는 건지.”
이윤후는 사라진 백아가 오지 않자 의문이 드는지 계속 하늘을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근처에 북해설응인 백아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좀 씻으러 가야겠군.”
주변 정리를 모두 끝낸 이윤후는 자신도 모습이 볼품없자 유인경을 보냈던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
계곡이 보이자 걸음을 재촉하던 이윤후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유인경이 계곡에 알몸인 채 몸을 담그고 있었기에, 그 모습에 놀라 이윤후는 뒷걸음질 치며 등을 돌렸던 것이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요? 제 몸이 그렇게 흉측했어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던 이윤후의 모습이 재미있던 그녀는 어차피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어 얼굴과 어깨 쪽 외에는 보여 주지 않았기에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아니요…….”
“조금만 그렇게 있어 줘요. 금방 나갈게요.”
첨벙― 첨벙―
유인경이 물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윤후는 그 자리 그대로 돌아선 채 서 있었다.
스륵―
옷가지를 입는 소리가 들리자 이윤후의 머릿속에서 상상 나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공을 익힌지라 여자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그렇기에 성숙한 유인경의 몸은 이윤후에게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이제 돌아봐도 괜찮아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윤후는 뒤돌았고 그녀는 머리에 물기를 털어 내고 있었다.
“이 소협도 물에 몸을 담글 건가요? 제가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까요?”
“아니요. 전 정리하다가 손이 너무 더러워져서 씻으려고 온 거였어요.”
이윤후는 계곡물에 손을 담그고 주변 정리를 하며 더러워진 손을 씻어 내었다. 유인경이 없었다면 자신도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백아는 아직 오지 않았군요.”
“멀리 간 건지 아직 안 오네요. 어차피 데려갈 수 없으니, 일단 저희끼리 장가철장으로 찾아가 보지요.”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장가철장이 어디인지 알 거 같아요. 예전에 이 계곡도 왔었던 기억이 있네요.”
처음 노숙한 위치는 잘 모르는 위치였으나, 물을 찾아 계곡에 와 보니, 그녀는 예전에 한 번 와 봤던 곳임을 기억했다.
“가깝나요?”
“네. 여기서 일각(一刻) 정도만 걸어가면 보일 거예요.”
유인경이 앞장서며 움직였고 이윤후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궁금하네요.”
“네? 뭐가요?”
유인경이 앞서가다가 갑자기 뒤돌아보며 말했고, 그녀의 말의 의미를 몰랐던 이윤후는 되물었다.
“이 소협의 사부께서 남겨 주신 물건이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아,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검일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이윤후도 검성이 장가철장에서 찾으라는 ‘상월’이 무엇일지 궁금하긴 했다. 당연히 검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다른 물건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얼른 찾아보고 싶었다.
“저기 보이네요.”
유인경의 말에 이윤후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산중에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저기가 장가철장인가요?”
이윤후는 자신이 상상했던 곳과 너무 달라서 유인경에게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이상하죠? 저도 처음 봤을 때는 저곳이 철장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한데 저택 안에 공방(工房)이 따로 있어요. 잡다한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주문 제작을 하는 곳이라 일반인은 들여보내 주지도 않아요.”
“그런가요? 사부님이 이런 곳에 물건을…….”
“이 소협의 사부님은 명성이 있으신 분인가 봐요?”
“네?”
“사실 처음 장가철장에 물건을 맡겨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장가철장은 무림인들도 아무나 고객으로 받아 주는 곳이 아니거든요.”
유인경의 말은 ‘너의 사부가 누구기에 장가철장에 물건을 맡겼느냐’는 물음이나 다름없었으나 이윤후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저 사부님에게 전해 듣기만 한 내용이라 일단 들어가 보면 알겠죠.”
이윤후는 담담히 장가철장으로 향했다. 입구는 열려 있었기에 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같이 가요.”
유인경은 그가 대답해 주길 바랐지만 이번에도 말하지 않고 가 버리자 더욱 이윤후의 사부 존재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사부가 누구기에 이렇게 말을 안 해 주는 거지? 말할 수 없는 악인(惡人)인 건가?’
그녀는 혼자 생각하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윤후의 성품을 봐서는 악인에게 배웠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 * *
그들이 장가철장으로 들어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약간 뚱뚱한 체형의 중년인이 뒤뚱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헉, 허억…… 어떻게 오셨소이까? 오늘 오전에는 방문 예정인 손님이 없었는데…….”
이윤후와 유인경을 발견하고 놀라서 달려온 중년인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둘을 아래위로 살폈다.
“음…… 아가씨는 안면이 좀 익숙한데…… 아, 사마련의 유……?”
중년인은 둘을 살피다 유인경을 알아본 건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고 있었다.
“유인경이요.”
“아, 맞소, 기억이 납니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중년인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자신이 아는 이상 사마련과 거래 잡힌 게 없었다.
“오늘은 제가 용건이 있어 온 게 아니라, 이쪽이 장가철장에 찾아갈 물건이 있다고 해서 왔어요.”
“찾아갈 물건이라고요?”
유인경이 이윤후를 가리키자 중년인은 더듬어 보았으나 이윤후를 알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이곳 장가철장에 들러 물건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렇소? 그쪽이 말하는 사부라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언제 어떤 물건을 맡겼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소.”
중년인은 이윤후를 보며 예의를 갖추며 이야기했다. 그는 장가철장의 손님 접대를 맡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장칠(張七)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유인경은 그들의 대화를 듣자 이제야 이윤후 사부 이름을 들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