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성, 돌아오다-8화 (8/251)

8화― 탈출(脫出)

식사를 마친 둘은 객잔의 방으로 올라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지만, 막힌 공간에 둘만 있게 되자 서로를 의식한 채 어색하게 있었다.

“여기 옷이 있네요. 유 소저 먼저 갈아입으시죠.”

이윤후는 탁자 위에 두 개의 옷을 발견하고 말했다. 그들은 식사하면서 점소이를 시켜 옷을 사 달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점소이가 두 사람이 식사하는 사이에 사 온 것이었다.

“전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네? 무슨…….”

유인경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가 있으려던 이윤후는 유인경의 말에 놀랐다.

“그냥 뒤돌아서만 있으세요. 어차피 나가도 따로 가 있을 곳도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헛.”

말을 하던 이윤후는 놀라 뒤돌아섰다. 유인경이 이미 옷을 벗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여인들은 이렇게 개방적인 건가……?’

이윤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미 가슴도 본 사이였지만 그 생각은 이미 이윤후의 머릿속엔 없었다.

스륵― 스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왠지 이윤후는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릴 적부터 동굴에서 수련했었고 여자에 관한 관심이 있을 나이에 무공만 배웠지만 그 역시 남자였다.

“다 되었어요. 돌아보셔도 돼요.”

그녀의 말에 이윤후는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아.”

“이상한가요?”

점소이가 사 온 옷은 붉은 홍의(紅衣). 안 그래도 약간은 성숙해 보이는 유인경의 외모가 더욱 도발적으로 보였다. 보통 여인들보다 가슴도 커 옷이 작은지 가슴이 도드라져 보이기까지 했다.

“옷이 작은 거 아닌가요?”

“음…… 원래 제가 가슴이 조금 커서 옷을 맞춰 입어야 하는 편인데, 만들어진 옷을 사 오니 이쪽이 맞지 않네요.”

그녀도 신경 쓰이는지 가슴 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이윤후가 지적하자 더욱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런데 여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 실례가 아닌가요?”

“아…… 그런가요?”

안 그래도 말해 놓고 유인경이 가슴 쪽을 만지자 괜히 민망했던 그였는데 유인경의 말에 괜히 쑥스러워졌다.

“이 소협도 갈아입으세요. 전 창밖을 보고 있을게요.”

유인경은 닫혀 있던 창을 열고 밖을 보았고 그 모습에 이윤후는 탁자에 놓인 옷을 챙긴 채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점소이가 사 온 옷으로 금세 갈아입어 보니 생각보다 몸에 딱 맞아 기분이 좋아진 그였다.

“다 갈아입었어요.”

유인경은 뒤돌아 이윤후를 찬찬히 위아래로 살폈다. 키는 훤칠하니 컸으나 몸은 조금 마른 편이었고, 피부가 유독 하얘서 조금 유약해 보이는 편이었다. 외모는 그리 잘생기진 않았지만, 어쩐지 성숙한 남성의 매력이 있었다.

“이 소협.”

“네.”

유인경은 탁자의 의자에 앉으며 이윤후를 앞자리에 권했다. 이윤후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소협이 장가철장에 가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도 사실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이유를 모르다니요?”

이윤후의 말에 유인경은 살짝 인상을 썼다. 괜히 이유를 말하기 싫어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보여 준 이윤후가 그럴 사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이 장가철장에서 물건을 찾으라고 했지만, 그 물건이 정확인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검이 아닐까 생각하고만 있습니다.”

“검이라고요? 장가철장이 명검을 많이 만들긴 했지만…….”

유인경은 대화에서 일단 이윤후가 검을 주로 쓰고 사부인 사람도 검객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으나, 이윤후가 언급했던 ‘오행’이라는 것을 쓰는 검객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머릿속엔 없었다.

‘은거기인(隱居奇人)이 사부인 건가?’

계속 이윤후의 내력이 궁금했던 유인경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남창이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쉬었다가 아침에 바로 출발하죠.”

“아, 네.”

유인경은 대화를 더 하고 싶었으나, 그가 말을 자르고는 일어나 버리자 대화를 이어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때.

빼애액―

고요한 시골 마을에 백아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 * *

“이거 백아의 소리 아닌가요?”

백아의 울음소리에 이윤후가 창밖을 살폈고 그 모습에 갑자기 불안해진 유인경이 물었다.

누가 듣더라도 경고하는 듯한 백아의 울음소리에 분명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누군가 객잔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하네요. 여기서 빠져나가죠.”

이윤후는 다급하게 이야기했고 상황을 인지한 유인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파밧―

이윤후는 창으로 몸을 날렸고 이 층에서 단숨에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이대로 떠나는 게 조금은 걱정되었는지 유인경은 잠깐 뒤를 보았다가 이내 이윤후의 뒤를 따라갔다.

“저쪽이다―!”

순간 들리는 음성에 그들은 뒤를 보았다. 빠져나온 방의 창에서 검은 복면인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삐익―

복면인이 무언가 세차게 불자 날카로운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고, 이윤후와 유인경은 속도를 붙여 그곳을 벗어났다.

“사마련의 사람들이에요! 절 추적해 온 거 같아요.”

“일단 다시 산으로 가요. 괜히 말려드는 사람들이 생겨서는 안 되니까. 수도 많으니 넓은 곳에서 싸우는 건 좋지 않아요.”

이윤후는 앞서가며 따라오는 자들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의 수가 이십 명은 넘었으니 상처를 입은 유인경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거 괜한 일에 말려든 거 같은데…….’

이윤후는 괜히 유인경과 얽힌 게 조금은 후회스럽다가도 그래도 처음 무림에서 만난 사람을 버려두기에는 마음이 쓰였다.

“혹시 괜히 나랑 가기로 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죠?”

“설마요?”

유인경은 자신을 돌아보는 이윤후의 눈초리에 그런 느낌을 받아 물었는데, 이윤후는 놀라 얼버무렸다.

촤자자작―

파밧―

갑자기 날아든 화살들이 그들의 앞에 쏟아졌고, 둘 다 놀라 멈춘 채 옆으로 피하려 했으나 어느새 쫓아온 자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거 곤란해졌는데요.”

이윤후는 뒤를 돌아보며 빠르게 자신을 포위한 사람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열다섯이군요.”

그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실전 경험이 없는 데다가 동행은 상처를 입어 있는 상황. 거기다 가장 중요한 검도 없었다.

“사마련(邪魔聯)의 잠룡대(潛龍隊)예요. 이렇게 먼 곳까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왔나 했더니…….”

유인경은 자신을 쫓아온 자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복면으로 얼굴은 가렸지만 드러난 손등에 용문(龍紋)이 새겨져 있었다. 잠룡대의 표식이었다.

잠룡대는 련주 직속의 정보와 잠행 추적을 맡은 부대로, 그들이 수집한 정보는 잠룡대장이 직접 사마련주에게 보고하며 련주 외에 누구에게도 명령을 받지 않는 사마련 내의 독립 단체였다.

“최악의 상황이군요…….”

유인경은 상상해 왔던 최악의 순간이 점점 자신 앞에 펼쳐지는 거 같았다. 수라마검과 흑룡창제에다가 할아버지의 명령만 듣던 경혼까지 그 모반에 참여했다는 건 이미 자신의 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련주만의 명령을 받는 잠룡대가 자신을 추적해 왔다는 것은 사마련 전체가 모반한 자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것이었다.

“잠룡대가 왜 날 쫓는 거죠!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요!”

“…….”

유인경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잠룡대원들이 움찔했고 누군가 그들의 앞에 나섰다.

“오랜만이군요. 아가씨.”

복면을 벗으며 앞으로 나선 자는 유인경이 잘 아는 자였다.

“장명(張明) 아저씨…….”

복면을 벗은 사내는 오른눈 아래 길게 상흔(傷痕)이 그어진 중년인이었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경혼과 마찬가지로 사마련주였던 할아버지를 늘 따르던 인물이었다.

“장명 아저씨가 잠룡대주(潛龍隊主)였군요…….”

잠룡대는 워낙 비밀스러운 집단이라 유인경조차 복면을 쓴 채 몇 번 봤을 뿐이었고, 잠룡대주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한데, 그저 자신의 할아버지 시중을 드는 인물인지 알았던 장명이 잠룡대주였다.

“……아가씨의 목숨을 거두러 왔습니다.”

장명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지막이 고했다. 자신이 모시던 주인의 손녀를 처리하러 온 자신의 위치가 원망스러웠으나 명령을 받은 이상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명은 차마 유인경의 눈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며 쫓아다니던 그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누가 시킨 일이죠, 아저씨…….”

“그건 모르는 편이 좋을 겁니다.”

스르릉―

마음을 굳힌 듯 허리춤에 검을 뽑는 장명. 그가 고갯짓을 하자 멈춰 있던 잠룡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

끝이다. 잠시간 환상에 차 있었으나, 이젠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유인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도망가세요, 이 소협.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유인경은 이윤후의 앞을 막아섰다. 누군가는 사파인들이 의(義)와 협(俠)을 모른다 하였으나, 적어도 그들은 은원(恩怨)에 있어서만큼은 정파보다도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죽더라도 은인인 이윤후가 살길 바랐다.

하지만 이윤후는 조용히 몇 걸음을 옮겨 그녀 옆에 섰다.

이 순간 뒤돌아 스스로의 목숨만을 구하고자 했다면, 절벽에서 떨어져 검성에게 가르침을 청하지도 않았으리라.

‘그저 살기 위한 삶에 의미는 있는가.’

아니. 자신은 스스로의 정의를 세우고 넓은 세상을 볼 것이다. 검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기에 윤후는 수많은 검객들을 마주하고도 몸을 뒤로 돌리지 않았다.

“저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

담담한 이윤후의 기백에, 순간 유인경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 * *

유인경의 눈빛이 바뀌었고 그 모습에 이윤후는 미소 지었다.

“일단 무기부터 있어야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저들에게 뺏는 거 말고는 지금 방법이…….”

탁―

파방―

유인경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윤후는 발밑의 돌을 차올려 주위를 돌고 있던 잠룡대원에게 날렸다.

파삭―

날아간 돌이 잠룡대원의 검에 산산조각이 난 순간, 이윤후의 신형이 크게 기울었다.

만상오행공(萬象五行功) 진천각(震天脚).

콰광―

쩌저저적―

“이, 무슨…….”

이윤후는 지면을 발로 내리쳤고 그와 함께 굉음이 일며 땅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파바바박―!

“컥……!”

“커헉…….”

모두 움직임을 멈춘 사이 이윤후가 순식간에 날아들며 장법(掌法)으로 둘을 제압해 쓰러뜨렸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떨어뜨린 검을 회수한 채 다시 유인경의 곁으로 돌아갔다.

모두 너무 놀라 그의 움직임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고, 그것은 유인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무공이에요?”

“일단 받아요.”

이윤후는 검을 그녀에게 건넸고 담담하게 남은 잠룡대원들을 살폈다.

“이제 열셋.”

남은 수를 확인하고는 이윤후는 검을 세워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실전은 처음이에요.”

“……다행이네요.”

유인경도 받아 든 검을 들고는 대답했다.

“뭐가 다행이에요?”

“저도 처음이에요, 이 소협. 이렇게 생사를 거는 싸움은…….”

그들의 태평한 대화를 듣고 있던 잠룡대원들은 어이없어했다. 장명이 그들을 통제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달려들었을 상황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입니다.”

장명의 말과 함께 다시 잠룡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의 말투에서는 아까와 같은 망설임은 사라지고 없었다.

“잠룡대원은 모두 무림의 일류고수들이에요. 그리고 저 대장인 장명…… 은 무공을 가늠할 수가 없어요. 조심해야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싸울 생각 없으니.”

“그게 무슨 소리…….”

빼액―

순간 들리는 백아의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백아가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고, 갑자기 날아드는 백아의 모습에 잠룡대는 놀라 움직임을 멈춘 채 물러나려 했으나.

순간, 이윤후가 검을 휘둘러 반원을 그렸다.

촤작―!

“검기(劍氣)!”

장명은 이윤후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은 알았지만, 검기까지 구사하자 놀란 듯 급히 검을 휘둘러 검기와 맞부딪쳤다.

콰광―!

순간 폭음과 함께 검기가 파훼되었고, 장명은 그대로 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게 무슨……!”

이윤후가 날린 검기를 파훼하면서 일어난 흙먼지로 시야가 가려지긴 했지만, 그들이 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잠룡대도 당황한 채 사라진 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수고하십시오, 장명!”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에 다 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은 그곳에, 이윤후와 유인경이 백아의 발을 잡은 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저 새는 무엇이냐?”

“저도 잘…… 저렇게 큰 것은 처음이라…….”

장명의 말에 다들 당황했다. 저렇게 큰 새를 직접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백아의 울음을 듣는 순간 마치 내력이 실린 음공(音功)처럼 그들 모두 귀를 부여잡아야 했고, 그 후 날아든 백아의 기세에 모두 놀라 흩어졌던 것이었다.

“혹시 저 매가 북해설응(北海雪鷹)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말에 장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북해설응이 크면 저렇게 커진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본 것은 처음인데…… 하지만 북해설응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북해빙궁주만이 북해설응을 길들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장명은 북해설응이 맞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든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잠룡대로서 목표한 것을 놓친 것도 대주 직위를 맡고 처음이었고, 보고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걱정스러웠다.

“일단 돌아간다.”

“추적은 그만둡니까?”

“저게 북해설응이라면 추적을 한다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북해설응은 수천 리, 수만 리까지 난다고 하는 영물이다. 우리의 추적 범위를 넘어설 거야. 유인경이 황산에서 사라져 이곳에 나타난 이유도 이제 설명이 되는군.”

장명은 보고하는 게 걱정스럽긴 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모시고 존경하던 유상휘의 손녀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터였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도망가 버리니 도리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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