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오절(五絶)
환우십강(寰宇十强).
무림의 최강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마교가 침공해 왔을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자들이라는 점었는데, 무림맹주 우금과 사마련주 유상휘도 환우십강의 일인이었다.
마교와의 싸움은 무림에 큰 변화를 주었다. 정사파가 유례가 없는 연합을 하면서 무림엔 평화가 찾아왔고, 그 변화에 많은 이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마교는 정사파의 합공에 패퇴하여 큰 피해를 보았고 그들은 십만대산으로 다시 숨어들었다.
승기를 잡은 정사파의 연합이 십만대산까지 그들을 쫓았으나, 마교의 앞마당이나 다름이 없는 그곳에선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교와의 싸움을 끝낸 무림은 무림맹주와 사마련주의 평화 동맹에 평화로운 날을 보냈다.
“하지만 소저가 속한 사마련이 모반이 일어나면서 무림의 평화가 흔들리게 된 거군요?”
“그렇죠. 할아버지는 사파인들의 최고 정점에 있던 인물이었고 그 힘으로 사파인들을 단합하게 했던 것인데 사마련이 사실상 무너진 셈이니, 무림의 평화는 끝이라고 봐야 하죠.”
이윤후와 유인경은 하산하면서 무림에 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마련을 장악한 인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나요?”
“사마련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수라마검에 흑룡창제가 가담한 모반인데…… 문제는 그들이 중심은 아닌 거 같아요.”
“수라마검과 흑룡창제면 아까 이야기해 주신 환우십강의 인물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중심이 아니라고요?”
이윤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산에서 내려오며 유인경이 가장 먼저 이야기해 줬던 게 환우십강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다.
“수라마검은 할아버지를 따르기 전에도 세력이 없었고 사람과 섞이기 어려운 성격이라 무언가를 도모할 성격은 아니고, 흑룡창제 역시 야망은 있는 인물이지만 상대적으로 무공에서 밀리기에 중심이 되진 못했을 거예요.”
“그럼, 누구의 짓이라는 거죠?”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수라마검과 흑룡창제마저 포섭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유인경은 말을 하다 갑자기 짚이는 인물이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설마 그 사람이…….’
스스로 생각을 털어 버리려 머리를 흔든 그녀를 이윤후는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음, 다른 건 궁금한 게 없나요? 이 소협.”
유인경은 말을 돌렸고, 이윤후도 딱히 더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캐묻지는 않았다.
“사파의 이야기는 들었으니 정파 쪽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정파는 아까 이야기에서 잠깐 나왔지만, 무림맹의 비천신검(飛天神劍) 우금이 현재 정파 무림의 최강자로 꼽히고 있어요. 원래 그 전대의 정파는 오절(五絶)이라 불렸던 실력자들이 있어서 사파가 넘볼 수 없었지만, 이제 그분들은 전부 무림을 떠난 상태이지요.”
이윤후는 오절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럼, 오절은 뭔가요?”
“오절이란…….”
사실 이윤후가 오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한 명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인 검성(劍聖) 나진하.
“오절은 정파 무림의 다섯 명의 절대자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검성(劍聖) 약선(藥仙), 권왕(拳王), 도후(刀后), 신투(神偸)를 오절이라 했어요. 모두 각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들이었는데 이 다섯 명의 존재로 인해 사파는 정파에게 기를 피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사파에는 강자가 없었나요?”
“사파에도 강자들은 있었지만 단합이 되지 않았어요. 오절을 중심으로 정파는 단합이 잘되었지만, 사파는 문파와 개인으로 움직이니 사파가 힘을 쓰지 못했어요. 그것 때문에 할아버지가 사마련을 만들어 사파를 통합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오절은 왜 사라진 거죠?”
자신의 스승인 검성이 사라진 이유는 불치병을 얻어 스스로 무림에서 물러나 동굴에서 영면을 맞이한 것이지만, 다른 네 명의 이유가 궁금했다.
과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슬픔에 잠겼던 스승의 목소리가 걸렸다. 혹 그들과 관련이 있을지 몰랐다.
“정확한 사유를 아는 사람은 없어요. 검성이 가장 먼저 무림에서 사라졌는데, 그가 사라지고 차례로 한 명씩 오절의 전원이 자취를 감추었어요. 원래 신비 문파였던 도후는 그렇다 치지만, 다른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무림인들도 이상하다고 여겼죠.”
당시 오절이 한 명씩 사라진 일은 정파 무림에 커다란 사건이었다. 오절의 오인은 검성과 신투를 제외하면 문파를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그 문파에서조차 그들의 행방을 몰랐다.
오절이 사라지자 사파 무림은 억눌려 있던 힘을 분출하기 시작했고, 정파와 사파간의 다툼은 심화되었다.
각지에서 정파와 사파의 문파들이 부딪쳤지만, 흩어져 있는 사파가 무림맹을 중심으로 뭉쳐진 정파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 흑월도존(黑月刀尊) 유상휘가 나타났고, 놀랍게도 그는 순식간에 사파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유상휘는 사파의 크고 작은 문파들을 설득하러 다니기 시작했고, 힘으로 또는 설득으로 조금씩 세를 불려 나갔다.
정파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감지하고 무림맹 내에서 그를 제거하는 일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대다수 의견이 절대로 사파는 하나가 되지 못하니 자멸하게 되리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판(誤判)이었다.
유상휘는 사파를 하나로 규합했고 사마련을 만들었다. 거기까지도 정파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사마련의 수라마검(修羅魔劍)과 흑룡창제(黑龍槍帝)와 같은 사파의 최고수들이 유상휘 밑으로 들어가면서 자신들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유상휘로 하나가 된 사파는 무림일통(武林一統)을 부르짖으며 세를 불리기 시작했고, 오절을 등에 업은 정파의 압박에 힘들었던 사파는 금세 자신들의 위세를 되찾기 위해 놀라운 단합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마교에서 먼저 움직이면서 사마련은 무림일통의 대의를 펼쳐 보기도 전에 접고 말았다.
마교는 정파와 사파의 대립을 틈타 기회를 노려 곤륜과 점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북진해 왔고, 정파 무림은 일대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오절이 사라진 정파 무림에도 인물은 있었다. 무림맹주였던 비천신검 우금은 사마련주 유상휘와의 독대를 통해 정사 연합을 이루어 내며 마교를 몰아내는 데 뜻을 같이했다.
“유 소저의 할아버지는 사파인답지 않군요.”
이야기를 듣던 이윤후는 한마디를 툭 뱉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제가 유 소저의 할아버지였다면 마교가 북진해 오는 것을 이용해 무림일통을 더 쉽게 해냈을 거 같거든요.”
이윤후의 말에 유인경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왜 정파와 힘을 합쳤냐고, 그냥 마교와 정파가 부딪치고 둘 다 힘이 빠졌을 때 모든 걸 정리할 수도 있지 않았냐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무림일통을 이루어 봐야 누가 인정을 해 주고 어떻게 모두 앞에 떳떳할 수가 있냐고.”
“의인(義人)이시군요.”
“……미련하셨던 거죠.”
이윤후의 말에 유인경이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자기가 봐도 사파인이라기보다는 정파의 협객에 가까웠다.
최소한 그 상황을 이용하지는 않을지언정 정파와 연합할 필요는 없었는데, 정파를 돕기 위해 연합을 결성해 마교를 몰아내었다.
그 바람에 사파의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건재했던 때엔 불만을 이야기했을 뿐 행동에 나서지 않았는데, 그게 결국 지금에서야 터진 것이었다.
말을 하던 유인경의 뺨에 눈물이 타고 흘렀고 이윤후는 그것을 보고는 모른 척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유인경이 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인지 알 거 같았다.
“마을이 보이네요. 조금 빨리 걷죠.”
“네. 마을에 가면 우리 옷부터 사야겠네요. 말도 구하고요.”
“그러죠. 먼 길을 가야 하니 말이 있어야겠네요.”
이윤후는 말을 마치고는 하늘을 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백아가 날고 있었다.
빼액―
백아는 순식간에 낙하하기 시작했고, 땅에 가까워지자 속도를 죽여 지면에 착지했다.
“우린 마을로 들어가야 하니, 너도 배를 채우고 쉬고 있어.”
꾸륵―
백아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답했고, 그 모습에 윤후는 백아를 한 차례 쓰다듬고는 손짓했다.
파앗―
이윤후의 손짓과 함께 백아가 하늘로 날았다. 땅을 박차고 날아가는 그 반동으로 먼지를 그들이 그대로 뒤집어썼고 엉망이 되었다.
“이거…… 객잔에서 씻기도 해야겠네요.”
이윤후가 유인경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보이자 유인경도 자신과 그의 모습에 웃음 지었다. 할아버지의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던 그녀의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마을 안으로 들어온 이윤후와 유인경은 물어물어 작은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여산 아래 작은 마을이라 숙식이 가능한 객잔은 이곳 하나밖에 없었다.
“풍운객잔(風雲客棧). 객잔 이름이 특이하네요.”
“그러게요. 객잔의 주인이 무림인인가 보네요.”
허름한 이 층 건물에 현판은 크게 풍운객잔이라고 걸려 있었다.
둘이 간판을 보며 미소 지으며 객잔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 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점소이가 그들을 보고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묵고 가실 겁니까? 아니면 식사?”
“두 개 다 가능할까요?”
이윤후는 객잔을 둘러보고는 점소이에게 답했고, 그 말에 점소이는 어디로 갔다 다시 그들에게 달려왔다.
“두 분, 혹시 부부이십니까?”
점소이의 질문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아니에요.”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의 기세에 점소이는 움찔했다.
“한데, 지금 방이 남은 게 하나뿐이라…….”
“방이 더 없나요?”
“네. 객잔에 방이 많지 않은데, 오늘따라 숙식객들이 많아서 남은 방이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하실 건지……?”
점소이는 말하며 이윤후와 유인경을 이리저리 살폈고,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난감한 얼굴빛을 보였다.
“어떻게 할까요? 방을 못 구하면 노숙을 해야 할 듯한데.”
“우선 방 하나라도 잡아요. 밖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마을에 숙식할 수 있는 곳도 여기뿐이고…….”
유인경도 난감하긴 했지만 일단 방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노숙을 하느니 방이 하나라도 있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럼, 일단 방은 잡아 주시고 식사를 할게요.”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점소이는 둘을 비어 있는 자리로 안내했고 그들은 자리에 앉은 채 다시 주위를 살폈다. 크지 않는 객잔이었지만, 객잔에 사람이 가득한 거로 봐서는 요리가 맛있을 것 같아 유인경은 기대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저희 주목을 받는데요. 거기에다 객잔 안에 대부분 무림인이에요.”
주위를 살피던 유인경은 객잔 안의 인물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윤후는 이미 들어왔을 때부터 알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저들도 무림인이라면 저희가 누군지 궁금해서 쳐다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유 소저가 아름답기도 하고요.”
“아…… 그래요?”
유인경은 이윤후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사실 유인경은 어릴 때부터 성숙한 외모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고, 열다섯이 넘자 그녀에게 청혼을 해 오는 가문들도 많았다.
할아버지인 유상휘의 힘을 뒤에 업고자 하는 자들도 많긴 했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본의 아닌 색기가 넘쳤던 그녀는 여러 남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왼쪽 눈 아래 점과 도톰한 입술은 그녀의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점에 이윤후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녀로서는 조금 자존심 상해 있었는데, 아름답다는 말에 기분이 풀렸다.
자신의 가슴까지 본 남자였는데, 너무 무덤덤하게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괜히 신경 쓰였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