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배신(背信)
과거, 천마가 마교를 이끌고 무림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때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정파의 무림맹(武林盟)과 사파의 사마련(邪魔聯)은 서로 힘을 모아 마교의 진격을 막아 내었고, 그때의 화합으로 인해 정사파 간의 신뢰가 생겨 현재 때아닌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정파와 사파가 힘을 합친다는 것은 본래 서로 간의 기나긴 대립으로 인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친분을 쌓은 무림맹주 우금(于禁)과 사마련주 유상휘(劉翔輝)가 나서서 정사파 합작(合作)을 이뤄 내었고, 마교를 다시 십만대산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 신뢰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사마련주 유상휘가 병에 걸려 몇 년째 거동이 불편했던 데다 최근에는 공식 석상에 보이지도 않아 사파의 연합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마련이 이런 모양새를 보이자 정파에서도 사마련의 동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사마련이 무너지게 되면 사파의 연합 자체가 깨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유상휘에 의해 통제를 받던 사파가 예전처럼 날뛰게 될 게 분명했다.
사마련(邪魔聯).
흑월도존(黑月刀尊) 유상휘가 사파를 규합하며 만든 사파 연합체로서, 사파일통을 이루어 낸 그는 본래 무림일통을 꿈꾸었다. 그러나 마교의 침공으로 인해 그 기회를 잃었고, 무림맹주인 우금과 우정을 나누면서 그 뜻을 버리고 하나 된 사파를 꿈꾸며 사마련을 유지해 왔었다.
무림맹과 손잡은 유상휘에게 사파의 강경파들은 늘 불만을 표해 왔고, 그 탓에 몇 번이나 사파 세력 내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있어 왔다.
그때마다 유상휘는 도를 휘둘러 억제해 왔으나. 최근 사마련의 핵심이자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자취를 감추자, 사파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 * *
“아가씨,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중년의 무사는 방 안 침상에 누워 있던 노인의 손을 잡고 있던 어린 소녀에게 말했다.
침상에는 얼굴에 검버섯이 핀 백발의 노인이 이미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런 노인 옆에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있던 소녀가 중년 무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경혼(璟魂) 아저씨.”
소녀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이 방에 경혼이라는 무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물었다.
“수라마검(修羅魔劍)이 쳐들어왔습니다.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말도 안 돼요. 마검이 왜?”
그녀는 경혼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라마검은 사마련의 이인자로서, 자신의 할아버지인 유상휘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가장 의지하며 자신을 귀여워해 줬던 마검의 배신이 믿기지 않았다.
“마검만이 아닙니다. 흑룡창제(黑龍槍帝) 또한 련주를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현재 사마련은 이미 그들에게 모두 넘어간 상태입니다. 아가씨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경혼은 그녀에게 다가가 잡아끌 듯 손을 잡았다. 상황을 이제야 인식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다!”
“유인경(劉璘璟)이 여기 있다. 그녀를 확보해라!”
경혼을 쫓아 방에 들이닥친 자들이 경혼과 그녀를 발견하고는 검을 뽑아 포위해 왔다.
“뒤에 계십시오.”
경혼은 놀란 유인경을 뒤로한 채 품 안의 소도를 뽑아 들었다.
“저자는 경혼이다. 조심…… 컥.”
“커헉―!”
경혼은 소도를 뽑아 순식간에 자신을 감싸 오던 다섯 명의 목을 그었고, 적들은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저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올지 모릅니다.”
유인경의 손을 잡아끄는 경혼. 그녀도 더는 지체하지 못한 채 그의 손에 이끌려갔다.
누워 계신 할아버지인 유상휘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수라마검과 흑룡창제라도 이미 힘을 잃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해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아저씨.”
경혼의 손을 놓고 앞장선 뒤를 따르던 그녀가 물었다.
“련주의 상태를 결국 그들이 알고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흑룡창제는 그렇다 쳐도, 정말…… 수라마검까지 이 일에 참여한 것인가요?”
어느새 침착해진 그녀의 모습에 경혼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수라마검은 련주의 강함에 이끌려 사마련에 참여하긴 했지만, 련주께서 무림일통의 꿈을 접으시면서 불만이 생겼던 거 같습니다. 호전적이고 정파를 극도로 싫어했던지라, 정파와 평화를 유지하셨던 련주의 정책에 전부터 불만을 표하긴 했습니다.”
“호위 세력들은 다 어떻게 되고 이렇게 사마련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 것인가요?”
“…….”
유인경은 계속 그게 의문이었다. 이인자인 수라마검과 흑룡창제가 손을 잡았다 해도, 그들이 이렇게 간단히 접수할 정도로 사마련은 약하지 않다.
누군가 더 있다. 분명…… 가까운 누군가가.
영민한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은밀히 손끝에 내공을 끌어모았다. 혹시, 사파지존의 손녀인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유인경이 맹렬하게 답을 찾아가던 그 순간.
퍼벅―!
“컥! 당신……!”
유인경은 갑작스럽게 돌아선 경혼이 내지른 소도(小刀)에 의해 오른쪽 가슴 아랫부분이 깊게 꿰뚫렸다.
“……웬만해서는 살려서 도망치게 하고 싶었지만, 안 되겠구나.”
경혼의 눈빛이 바뀌자 유인경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가슴 아래에 박힌 소도에 의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네 말대로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사마련의 전반을 장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래서 내가 사마련의 호위 세력이 잠잠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크흑…… 어떻게 경혼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배반할 수가…… 있죠?”
유인경은 가슴의 통증보다 경혼이 자신과 할아버지를 배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사마련에서 드러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의 가장 큰 신임을 받으며 암중에서 많은 임무를 수행한 인물이었고, 그녀가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다.
“네 할아버지가 나쁜 거란다. 그는 사파를 규합할 때 정파에게 당했던 설움을 갚아 주겠다는 허울뿐인 말로 사파를 규합해 놓고는, 자신의 친분 때문에 정파와 합세하여 마교를 몰아내었고 그 후에도 정파와의 다툼을 규제하고 통제하며 정파 편을 들어 왔다.”
“그건…… 모두를 위해…….”
“갈(喝)!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자신을 위해 정파와 담합을 했던 거다. 사파인을 위했더라면 그는 절대 무림일통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마련에는 그럴 힘이 있었고, 그럴 수 있던 시기도 분명 존재했다.”
경혼의 말에 유인경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녀로서도 사파인이 할아버지의 방식에 불만을 많이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해 왔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인 유상휘가 쓰러지면서 불만들이 표면에 올라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의심이 많았던 자들은 혹시나 유상휘가 두문불출하는 이유가 반대 세력을 한꺼번에 쳐 내기 위한 함정일까 봐 행동에 나서지 않았고, 그 점을 이용해 유인경도 믿을 만한 사람들을 통해 불만을 해결하려 노력해 왔었다.
‘이렇게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도망가야 해……!’
이미 피가 많이 흘러 어지러운 와중이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지금 자신이 죽는다면 후일을 알 수 없게 된다. 분명 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위험에 빠질 터.
촤락―
그녀는 머리 장식을 떼어 순식간에 경혼을 향해 날렸다.
“호접표(胡蝶慓)?”
촤라라락―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머리 장식이 내는 소음을 눈치챈 경혼이 뒤로 물러나며 피하려 했지만, 날아든 호접표는 금세 방향을 바꾸며 경혼에게 따라붙었다.
“흥, 암기 따위.”
호접표가 자신을 따라붙자 경혼은 품에서 다른 소도를 꺼내었다.
쐐액―
파삭―!
경혼의 소도를 휘두르자 날아든 호접표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
촤악―
“뭣, 이런……!”
호접표가 박살이 난 순간 호접표에서 뿌연 연무가 흩뿌려졌고, 경혼은 그대로 그 연무를 뒤집어썼다.
“호접표에 독(毒)을…….”
콰당―
경혼은 부서진 호접표 안의 독연을 뒤집어쓰고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무공이 강한 자이기에 죽일 수는 없을 터이나 분명 하루 정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유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그녀는 가슴 아래 박힌 소도를 빼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그곳을 벗어나려 움직였다. 하지만 피를 너무 흘려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는지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했다.
“벌써 따라붙는 사람이…….”
유인경은 벌써 주위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절망감을 느꼈다. 이미 경공을 펼치기에도 무리인 몸이었다. 이대로 잡히는 것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길이 없을 거 같았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길 위에 쓰러졌다.
“이대로 끝…… 인가?”
멈추지 않는 출혈 탓에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생애 끝에서 찾아오는 허탈감과 서서히 감겨 오는 눈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그녀의 눈에 부리가 보였다.
‘부리……?’
빼액―!
거대한 흰 매가 나타나 그녀를 낚아채 갔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이 녀석은 사냥하러 가서는 왜 오지를 않지?”
산에서 내려갔다가 옷만 새로 사 입고 다시 올라온 이윤후는 폭포 한쪽에 자리 잡은 채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깨끗하게 씻고 새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과연 헌앙했다. 어린 모습은 없어진 지 오래였고, 오랫동안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한 탓에 피부가 흰 편이었다.
빼액―
멀리서 백아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이윤후는 드디어 기다리던 저녁밥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백아에게 사냥을 부탁했는데 오래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던 차였다.
퍼드득―
이윤후가 미리 피워 놓은 모닥불이 꺼질라, 백아는 거리를 두고 찬찬히 폭포 근처에 내려앉으려 했다.
‘멧돼지면 좋겠는데.’
안력에 내공을 집중해 백아가 사냥해 온 게 무엇인가 확인하려던 이윤후는 백아의 발에 잡혀 있는 게 멧돼지 같은 게 아니라 소녀임을 알고는 놀라 달려갔고, 가슴 아래에 단도가 박혀 있는 것을 보고는 더더욱 놀랐다.
‘이게 무슨…….’
백아의 발에 잡혀 있는 소녀는 다름 아닌 조금 전 경혼에 의해 죽을 뻔한 유인경이었다.
“이게 뭐야? 먹을거리 사냥해 오라고 했더니 웬 소녀를…… 그것도 죽어 가는…….”
이윤후는 얼른 백아의 발에 잡혀 있는 여인을 그대로 바닥에 눕히곤 가슴 아래에 박힌 단도를 살폈다.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단도를 뽑아내고 지혈부터 해야겠네.”
그가 가슴 아래에 박힌 단도에 손을 대자 유인경은 괴로운지 움찔거렸다.
“일단 단도를 뽑지 않으면 위험하니 참아요.”
이미 정신을 잃은 유인경이 들을 리는 없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단도에 양손을 갖다 대었다. 최대한 단숨에 뽑아내어야 상처가 커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파밧―
“커헉……!”
파밧―
단도가 뽑히자 피가 솟구쳤고, 유인경이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이윤후는 바로 혈을 집어 흐르는 피를 억제하려 했다. 하지만 미봉책일 뿐이었고 상처엔 약재가 필요했다.
“죄송하지만…… 옷을 좀 벗기겠습니다.”
이윤후는 상처를 보기 위해 유인경의 윗옷을 잡았다. 소녀의 옷을 벗긴다는 게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내민 손을 멈추진 않았다.
스륵―
이윤후는 덤덤히 유인경의 윗옷을 벗겨 나갔고, 이윽고 피로 붉게 물든 가슴 가리개가 두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출혈 상태로 보아 심장을 건드린 것은 아니나 주위를 지나가는 전중혈, 천지혈, 중정혈, 영태혈, 신봉혈 등의 혈도가 위중한 상황이었다. 어릴 적부터 의학에도 관심이 있었기에 이윤후는 소녀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스륵―
피에 절은 가슴 가리개를 풀어내자 소녀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고, 가슴 바로 아래에 정확히 단도가 찔린 자리에서 피가 몽글몽글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혈도를 잡아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을 억제하긴 했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흠…….”
혈도를 잡은 정도로 여인을 살릴 수가 없음을 직감한 이윤후는 알몸인 그녀의 몸을 잡아 일으켜 앉은 자세로 만들었다.
“처음 해 보는 거라 자신은 없지만, 이대로 죽는 꼴 보는 것보다야 낫겠지.”
이윤후는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기를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특이한 무공을 익힌 여인이구나…… 금기(金氣)를 가진 무공이라니…….”
이윤후는 그녀가 몸에 금기가 가득한 것을 확인하고는 토기(土氣)를 흘려 보내어 금기와의 상호 상생 법칙이 작용하도록 했다.
토생금(土生金).
토(土)는 금(金)을 낳으니, 금기생(金氣生)이라.
토기를 불어넣어 그녀의 금기가 살아난다면, 자연스레 상한 혈도가 회복되며 지혈이 될 터.
사부인 검성은 만상오행공을 통해 상대방의 기질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기운을 불어넣는다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이윤후는 그 부분을 기대해 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