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만상오행공(萬象五行功) 차력(借力)
검성(劍聖).
내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무림에서 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마교제일검 혈천검마(血天劍魔)를 제압한 이후 검으로 나를 이길 자는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병에 의해 내 몸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시작하게 된 이 동굴에 또 다른 인연이 이곳을 찾아 주기를 바라며 스스로 영면(永眠)에 들었다.
하지만 난 죽었음에도 사념체로서 존재했다. 아마도 죽기 직전에 창안한 무공의 영향이리라.
죽었지만 내 후인을 직접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건만…… 일 년, 이 년, 십 년, 무려 오십 년이 지나도 이 동굴을 발견해 주는 이가 없었다.
본래라면 찾아온 이에게 엣헴거리며 구배지례부터 받을 것이었으나, 아무도 찾아주지 않으면 안배해 둔 무공서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기저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차는 자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제자로 받을 순 없는 법이지 않은가. 그렇게, 점차 실망감이 깊어질 무렵, 오행(五行)의 도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그 소년이 바로 자신의 앞에서 가부좌를 튼 채 앉아서 운공을 하고 있는 이윤후였다.
어려서부터 무공을 수련한 몸이 아니기에 비록 근골은 연약했으나, 오성(悟性)만큼은 자신이 본 어떤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비록 스스로 뛰어남을 감추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이 소년이 무공을 한 번 견식하면 그 안에 담긴 무리를 깨우칠 것이고, 구절을 한 번 들으면 그 자리에서 돈오(頓悟)를 얻을 터였다.
제갈세가의 가주조차도 이 소년의 오성을 뛰어넘지 못할 만큼, 이 소년에게는 무공의 이해에 대한 공전절후의 재능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 소년이 스스로의 뛰어남을 감추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이윤후에게는 나이 차이가 열 살 넘게 나는 형이 있었는데 이윤후와 달리 둔재(鈍才)였다. 하지만 심성이 착하고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형 쪽이 그렇다 보니 그들의 아버지인 대학자 이화운은 이윤후에 희망이 컸고, 어릴 적부터 그 기대를 알았던 이윤후는 자신의 뛰어남을 감춘 채 살았다.
형인 이강후는 어렵사리 노력하여, 말단이지만 관직 길에 오를 수가 있었으나, 사실 그 뒤에는 이윤후가 있었다.
이윤후는 고서와 모든 서책을 보고 익혀 자신의 형에게 이해하기 쉽게 몰래 알려 주었고, 그 덕에 둔재인 이강후도 더욱 노력하여 학문에 힘썼다.
그리하여 이강후는 관직에 올라 집을 떠나게 되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은 왕의 스승이었던 이화운이 자신의 모자란 아들을 위해 손을 썼을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화운 자신 스스로 떳떳했고 이강후 역시 자신의 힘으로 관직에 오른 것을 의심치 않았다.
장남이 집을 떠난 후 이화운은 차남에 집중했으나, 이윤후는 관직에 오르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 자신의 뛰어남을 감추고 지냈다.
검성은 모든 것을 알곤 꿈에서 그것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현 황제는 자기 조카의 자리를 찬탈한 자입니다. 저는 그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관(官)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뜻을 세울 것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꼬마의 입에서 부조리를 지탄하고, 의와 협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마치, 정파의 협객이 할 법한 말이 아닌가.
이윤후의 이런 점이 검성은 더욱 마음에 들었고, 이 아이야말로 자신이 믿고 뒤를 맡길 만한 후인이라 여겼다.
그 바람대로 이윤후는 벌써 일 년째 동굴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검성의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일 년이지만 벌써 이 녀석은 비뢰검결을 모두 외워 버렸고, 내가 창안한 무공 또한 벌써 머릿속에 넣어 버렸구나.”
검성은 운공을 하는 이윤후의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 그 재능이 두렵기도 했다.
“살아 있을 때 이 녀석을 만났다면 더 좋았을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살아 있을 때 만났다면 직접 차근차근 무공을 알려 주고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써는 급하게 무공을 전수해야 했고, 이후를 지켜봐 줄 수도 없었다.
자신이 창안한 무공으로 인해 이렇게 죽고 난 후 사념체로서 존재는 했지만, 이 힘도 점점 약해져 가는 게 느껴지니, 머지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좋은 거 아닙니까.”
“운공은 끝이 났느냐?”
검성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운공을 마친 이윤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그럼, 이제 무공을 익힐 단계가 임박했구나.”
이윤후는 내공 심법을 익히는 데 거의 일 년을 소비했다. 혹자는 느리다 할 수 있겠지만, 검성이 창안한 독문 심법이었기에 범인이라면 익히는 데에만 십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원래 내공 심법이라는 게 원래 보통 이렇습니까? 제가 들어온 것들과는 조금 달라서요.”
“다르단 말로는 부족하느니. 만상오행심법(萬象五行心法)은 본좌가 말년에 창안한 최강의 독문 심법이니라.”
검성은 온후한 성격이었으나, 자신이 창안한 무공에 대해선 자부심이 강했다.
“제자가 이리 성취를 보이니, 이제 네 부모님 꿈에 들어가 네 안부와 소식을 전해 주도록 하마.”
“되었습니다, 사부님. 부모님께서 악몽 꾸실 일 있습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였으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이윤후의 모습이 검성은 안쓰러웠다. 자신이 말년에서야 창안한 무공을 단 일 년 만에 배운 녀석이니 기재 중에 기재라 할 것이었으나, 아직 열넷밖에 되지 않은 꼬마 녀석이었다.
분명 가족이 그리울 터였다.
“하면, 서찰이라도 남겨 두는 게 어떻겠느냐. 괜히 너 때문에 걱정하게 둘 수는 없지 않으냐?”
“흠. 하긴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터이니, 어머니께는 서찰로 소식을 전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버지야 자신을 걱정하고 있지 않으리라 여겼으나, 어머니만은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많으셨다. 자신이 조금만 기침해도 어디 몸이 아프진 않은지 염려하여 붕어를 끓여 주셨고,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빨리 자라며 이불을 깔아 주셨다. 그러니 필시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터다.
“그런데…… 서신은 어떻게 전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검성은 육신을 잃고 사념만 남았기에 서찰을 전달해 줄 수 없었고, 자신도 아직은 절벽을 오를 만큼 무공 수준을 갖추진 못했다.
하나 검성은 미소를 지으며 음성을 전했다.
“다 방법이 있지.”
쐐애액―!
검성의 말이 마치기 무섭게 무언가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빼액―
퍼드득―
동굴 안으로 들어온 것은 거대한 새였다. 온몸이 흰색에 날개를 펴니 동굴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컸다.
“이 녀석은 설응(雪鷹)이라고 하느니. 내가 무림에 있을 때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궁주가 영물인 설응의 새끼를 하나 선물로 주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나를 따랐단다. 원래 받았던 설응은 이미 죽고 이 녀석은 그 설응의 새끼이니 네가 이름을 붙여 주고 데리고 다니도록 해라.”
빼액―
검성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설응이 매섭게 울었고, 자신의 주인이 이제 이윤후라는 것을 아는 듯 뒤뚱뒤뚱 그에게 다가갔다.
“물거나 공격하는 건 아니지요?”
다가오는 설응에 살짝 뒷걸음질 치던 이윤후는 금세 설응에게 잡혔고, 설응은 이윤후를 관찰하듯 이리저리 살피고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설응은 주인을 스스로 선택하는데, 다행이구나. 너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듯하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무작정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설응의 모습에 당황한 이윤후는 검성에게 물었다. 이걸 쓰다듬어 줘야 할지 안아 줘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손을 설응의 머리에 대고 네가 이제껏 익혔던 만상오행공을 사용해 보아라. 그리고 설응은 오행 중 어떤 성질에 해당하는지 느껴 보아라.”
이윤후는 검성의 말에 선뜻 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설응의 머리에 작은 손을 올리곤 검성의 말대로 만상오행공을 운공하여 기를 설응에게 흘려 보내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윤후의 기운이 손을 타고 설응의 온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고 둘의 기운이 동조되어 교감하기 시작했다.
“물의 기운인 거 같은데요. 하지만 조금은 다른 거 같습니다. 물이라고만 하기엔 조금 더 차가운…….”
이윤후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상대의 성질을 파악해 낼 수 있는 만상오행공이었지만, 남의 성질 파악 자체가 처음인지라 확신할 순 없었다.
“잘 보았구나. 설응의 성질은 물의 기운을 내기는 하지만, 그냥 물의 성질은 아니다.”
“그럼, 무엇인지요?”
“얼음의 성질이지. 오행으로 굳이 따지자면 물에 해당하긴 하지만, 정확하게는 얼음의 성질을 지닌 것이다. 너도 무림에 나가 보면 오행의 성질에 벗어난 인물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다. 하지만 그건 결국은 오행에 해당하면서 조금 벗어난 것이니 오행 간의 강함과 약함을 잘 알아야 한다.”
검성의 설명에 이윤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이란 것은 학문을 공부하면서 이미 알았던 개념이었지만, 무공과 접목되니 더욱 심오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오행은 서로 맞물리면서 강하고 약한 기운들이 있었고 그 강함과 약점 속에 서로를 맞물리고 있었다.
“너와 설응은 기를 동조함으로써 서로의 기운을 느낄 수 있고, 경지가 심화되면 서로를 한 몸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게다. 차후에 네가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되면 남의 기운을 빌려 쓸 수도 있게 되느니, 이것을 차력(借力)이라 한다.”
“차력이라는 것은 제가 원하면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 만상오행공의 기본이자 핵심이 차력이다. 차력이라는 게 그냥 좋게 말해서 차력이지 어떻게 보면 마공의 흡성대법(吸成大法)과 비슷할 수도 있다.”
사실 검성이 말년에 이 만상오행공을 창안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은 마교의 흡성대법이었다.
흡성대법이 상대에게 강제로 내공을 빨아들여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공이라면, 만상오행공의 차력은 빌리는 상대와 공조하여 서로의 영향력을 높여 보다 높은 수준의 힘을 낼 수 있는 무공이었다.
차력은 자신이 창안해 내었지만 정말 무서운 무공이 될 수도 있었다. 상대와 동조를 하지 않고 차력을 사용할 수도 있었고, 상대의 내공에 따라 폐인의 수준까지 이를 수 있게 내공을 흡수할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마교의 흡성대공과 다르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미리 신의를 쌓아 동조한 상태에서 시전하면 합일(合一)을 이루어 보다 높은 수준의 내공을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차력의 힘이 워낙 월등하다 보니 이 무공에 빠지게 되면 쉽게 차력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 테고, 그렇게 된다면 안 그래도 흡성대공과 비슷한 성질의 무공이다 보니 무림에서 마인 취급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점을 염려한 검성은 자신의 후인 될 사람을 오래도록 살폈으나, 이윤후라면 믿을 수 있었다. 이 소년이라면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차력을 협과 의를 위해 사용하리라 믿었다.
스스스―
이윤후와 설응이 서로 동조하면서 푸른빛이 동굴 안을 밝혔고, 둘의 동조가 끝이 나자 빛이 잦아들었다.
“동조가 잘된 모양이구나.”
빼액―
검성의 말에 이윤후가 아닌 설응이 울어 답했고, 이윤후는 한쪽에 있던 지필묵을 꺼내어 서신을 적기 시작했다.
“다 쓰고는 설응의 입에 물려 주거라. 설응이 백학서원을 알고 있으니 바로 가져다줄 것이다.”
이윤후는 반신반의하며 설응의 입에 서신을 주었고 설응은 서신을 가볍게 물었다.
“백학서원에 서신을 가져다주거라. 너를 보면 놀랄 테니 적당히 사람들의 눈에 보일 곳에 몰래 가져다 놓고 오너라.”
설응은 알았다는 듯 날개를 작게 파닥거렸고 입에 서신이 물려 있어 울지는 못하고 그렇게 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이내 돌아서서 동굴 밖으로 나갔고 금세 사라졌다.
“영물이긴 영물이네요. 사람 말을 저렇게 잘 알아듣다니…….”
이윤후는 신기한 듯 설응이 나간 곳을 보았다.
“나중에 네가 이름도 지어 주거라. 너의 무림행에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검성의 말에 이윤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