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최후의 결전(2)
2018.08.12.
담무흔은 완전히 분위기가 바뀐 진무량을 경계했다.
진무량을 중심으로 찬란히 빛나던 황금빛 기운은 점차 선명한 용의 형상으로 변했다. 실로 경이로운 그 광경은 담무흔조차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멈춰 있던 진무량의 신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염옥창을 어깨 높이까지 치켜들고는 천천히 몸의 중심을 뒤로 이동시켰다. 거대한 태산을 연상시킬 정도로 묵직한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진무량은 충분한 내력이 염옥창의 창끝으로 모였음을 느꼈다.
그 순간, 굼떴던 움직임은 완벽히 사라지고, 염옥창은 바람처럼 날렵하게 담무흔을 향해 뻗어갔다.
담무흔은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무량의 일거수일투족을 신중하게 살폈다.
담무흔의 예상대로 염옥창의 궤적에서 무시무시한 강기가 쏘아졌다.
진무량이 쏘아낸 강기는 거대한 황룡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입을 쫙 벌린 황룡은 그대로 담무흔을 덮쳐왔다.
담무흔의 결단은 일편단심 정면 승부였다.
담무흔은 용 형상을 띤 진무량의 강기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응축된 내력을 담은 흑오신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파지지지직!
진무량과 담무흔의 고강한 기운이 부딪치면서 기묘한 파쇄음이 울렸다.
번쩍이는 황금빛과 깊은 어둠의 기운은 마치 서로 잡아먹으려는 듯 격렬하게 맞섰다.
일순간 검은 기운이 황금빛을 완전히 뒤덮었다. 허나 곧 검은 기운은 흩어지면서 그 사이로 찬란한 황룡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담무흔은 진무량이 쏘아낸 강기를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콰드드드득!
진무량이 출수한 강기는 단숨에 담무흔을 쓸고 지나갔다. 그 결과 담무흔의 가슴에는 사나운 짐승에게 물어뜯긴 듯한 심각한 상처가 새겨졌다.
담무흔은 정면 승부에서 진무량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감히 네놈 따위가……!”
담무흔에게 묵직한 일격을 적중시켰으나, 진무량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방금 경합에서의 차이는 실로 종이 한 장 정도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단숨에 승패가 바뀌었을 터.
진무량은 염옥창을 고쳐 잡고서 단숨에 담무흔을 향해 돌진했다.
“다음에는 빗나가지 않는다.”
진무량은 연달아 용형십삼식의 정수를 펼쳐냈다.
천공포와 오성마참은 담무흔을 물러나게 했고, 담무흔이 반격을 가할 때는 등마회륜참과 마신갑으로 맞섰다.
점차 담무흔은 염옥창을 받아내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설마 내가 밀리고 있단 말인가.’
순간 담무흔의 머릿속에 ‘패배’ 라는 두 글자가 스쳐갔다.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패한 적이 없었다.
방해되는 적들은 늘 손쉽게 해치웠고, 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광만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빼앗고, 착취하고, 복종시키는 건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 정반대로 자신이 패한 쪽에 서야 한단 말인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승자의 눈으로 비굴한 패배자들을 숱하게 봐왔다. 하여 누구보다 잘 안다.
최악의 수치가 바로 패배라는 사실을.
담무흔은 스스로 이성의 끈을 끊고, 무아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천하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신체와 천고의 재능을 온전히 이끌어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담무흔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막대한 기백을 보였다.
패배는 결코 용납지 않겠다는 담무흔의 기백은 진무량에게까지 똑똑히 전해졌다.
처절하리만큼 지독한 기백에 눌릴 법도 했으나, 진무량은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
담무흔의 모습은 심마에 빠졌을 때 본인의 상태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본능에만 의존하는 건 결코 옳은 판단이 아니다.
내재된 잠재력이 깨어나면서 스스로 더 빠르고 강해졌다 여기지만, 냉철한 이성이 받침 되지 않는 움직임에는 반드시 허점이 동반되기 마련.
담무흔은 승부의 마지막에서 크게 발을 헛디뎠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담무흔에게 위기에 빠졌을 때를 대비한 대책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진무량은 모든 내력을 끌어 올려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쿠구구구구구!
그에 따라 땅이 갈라지면서 진무량의 발아래로 승천하는 아홉의 황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형십삼식 만파구룡창(萬破九龍槍)!’
눈부신 아홉의 황룡은 일제히 나아가 담무흔을 덮쳤다.
담무흔과 격돌 후에 선명했던 황룡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황룡이 있던 곳에는 진무량이 자리하고 있었다.
담무흔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이성을 찾았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건 피를 뒤집어쓴 진무량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느껴지는, 타는 듯한 복부의 통증.
담무흔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니, 자신의 복부를 깊숙이 관통한 염옥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몸은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곧 숨이 끊어진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담무흔은 억지로 복부에 꽂힌 염옥창을 굳게 쥐고서는 진무량을 노려보았다.
“나는 진심으로 널 경멸한다.”
“유감이군. 나도 같은 생각을 하던 참인데.”
담무흔은 나지막이 비웃음을 지었다.
“후후. 네놈은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 결코 씻을 수 없는 혈향이 배어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
“범은 토끼들과 어울려 살 수 없는 법이다. 언젠가 반드시 나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너는 반드시 이 순간을 후회할 것이다.”
“멋대로 단정 짓는군.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야.”
진무량은 담무흔의 몸속에 깊이 박힌 염옥창을 단번에 뽑았다.
“나는 앞으로도 쭉 나답게 살 거거든. 당당하고 거침없이, 그리고 멋지게 말이야.”
“끝까지 재수 없는 놈이군. 지옥에서도 지켜보겠다. 네놈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상상 속의 패배는 수치스러움의 끝이었다.
헌데 직접 경험한 패배는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 이 홀가분한 심정은 나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늘 당연했던 승리를 놓치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늘 타인과 달랐기에 느꼈던 고독에서도 이제 벗어날 터.
조금 더 빨리 이 기분을 느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긴, 이미 그런 상상은 아무 의미도 없겠지.
다행인 점은 마지막 적수가 진무량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강함을 인정할 만한 상대였으니까.
담무흔은 몸에 힘이 빠지면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구중련주 담무흔의 마지막이었다.
* * *
담무흔이 쓰러지면서 비로소 길었던 무림과 구중련의 전쟁이 끝났다.
승전보는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강호 무사들은 그리 기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승리에 도취되기보다 먼저 혼전 중에 잃었던 동료의 넋을 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림맹주를 비롯한 정, 사, 마의 수뇌들은 미연에 전쟁을 막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했다.
각자 씁쓸함을 안고서 무림과 구중련의 전쟁은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강호 무사들은 각각 몸담았던 문파로 돌아갔다.
진무량은 부상을 입은 멸천대원들을 치료하기 위해 우선 마교로 향했다.
여도강은 구중련과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진무량을 아낌없이 대접했다. 일례로 마교에서 정평이 난 의원들을 진무량의 본가로 보내 멸천대원들이 진료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허나 진무량의 상처를 돌보는 건 소문이 자자한 명의들이 아니었다.
유서하는 팔뚝에 난 진무량의 상처에 조심스레 금창약을 발랐다.
“상처는 어때요? 많이 아프죠?”
유서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진무량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전혀.”
유서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살점이 베어 나간 자리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인데 통증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이런 상처는 의원들이 돌보는 편이 더 좋을 텐데요. 잘못하다가 흉이라도 남을까 봐 걱정이네요.”
“이렇게 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것보단 흉터 좀 남는 편이 더 낫지.”
“그렇지만…….”
“뭐야, 나만 같이 있고 싶은 거였어?”
은근히 섭섭함을 내비치는 진무량의 질문에 유서하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흉터는 제가 책임지고 안 남게 해드릴게요.”
“그럼, 다 잘된 거네.”
진무량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뒤 유서하에게 용건을 전했다.
“근데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이제 상처는 별문제 없지만…… 무슨 일인데요?”
“나도 이대로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중요한 일이라서 어쩔 수 없어.”
몸을 일으킨 진무량은 앉아 있는 유서하의 앞머리를 살짝 만지며 말을 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래도 보고 싶을 테지만 참도록 해.”
* * *
본가를 떠나 진무량이 향한 곳은 마교 교주의 집무실이었다.
일전에는 천군위가 사용하던 곳이었지만, 현재 집무실의 주인은 여도강이었다.
여도강은 홀로 집무실에서 문서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진무량이 속마음을 꺼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군.”
진무량의 모습을 확인한 여도강이 대답했다.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오.”
진무량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기본적인 안부를 물었다.
“별문제는 없지?”
“걱정거리는 모두 해결됐소.”
교주 자리에 오른 여도강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구중련과 전쟁에 참여했던 마교 무인들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마교 무인들은 대부분 무림맹과 영사문 측에 포로로 붙잡힌 상태였다.
여도강은 마교 무인들을 되찾고자 정식적으로 요구했고, 영사문과 무림맹 측은 그 제안을 수용했다.
구중련과 전쟁에서 여도강 일파가 세운 공이 적지 않았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여도강이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헌데 여기까진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이제 멸천대는 마교를 떠날 거야. 그 전에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진무량의 발언을 예상치 못한 여도강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어째서 마교를 떠나려는 것이오?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둔 일이었어. 의원들을 지원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 우리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아무래도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군.”
여도강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진무량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갑작스런 여도강의 행동에 진무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는 짓이야?”
“떠나기 전에 꼭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소. 마교를 도와줘서 정말 고맙소.”
진무량은 마교를 구중련의 지배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활약은 수백 명의 마교 무인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진무량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지금 마교의 주인이다. 네가 머리를 숙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권위는 뜻을 함께한 이들에게 보이는 것이오. 이 자리에는 그대와 나, 단둘뿐이잖소. 지금의 나는 그저 강호를 살아가는 일개 무인이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예의는 차릴 필요 없지.”
진무량은 성큼성큼 걸어가 숙이고 있던 여도강의 허리를 곧게 펴주었다.
“우리는 함께 전장에서 싸운 전우 아닌가.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으면 다음에 만날 때 좋은 술이나 사면 돼.”
여도강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기억하겠소.”
“그래, 다음에 볼 때는 그 딱딱한 말투도 좀 바꾸고 좀 편하게 보자고.”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여도강이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는 좋은 술을 들고 찾아가겠네.”
* * *
짧았던 여도강과의 만남을 끝내고, 진무량은 다시 멸천대가 있는 본가로 향했다.
진무량이 본가로 들어서려 할 때,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시우가 진무량을 멈춰 세웠다.
진무량은 무심히 연시우를 향해 질문했다.
“무슨 일이냐?”
“대주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수소문 끝에 운남 지역의 한 의원이 연희 소저와 비슷한 병을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대원들도 이제 치료가 거의 끝난 상태이니…….”
연시우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저히 멸천대를 떠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진무량은 이미 연시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추연희를 연모하는 연시우의 마음을 모르는 이가 멸천대에 몇이나 될까.
또한 추연희의 병을 치료하는 건 진무량도 항상 신경 쓰고 있는 문제였다. 헌데 가장 듬직한 수하가 그 일을 직접 도맡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연히 진무량이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허나 평소 숨이 막힐 정도로 철두철미한 연시우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괜히 장난기가 일었다.
“그래서 지금 멸천대를 떠나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절대 불가다. 설마 내가 찬성하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연시우는 절절한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앞으로 남은 제 생은 연희 소저의 병을 낫게 하는 데 쓰고 싶습니다.”
진무량의 살의를 내비치며 연시우를 위협했다.
“나와 맞서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을 생각이냐?”
잠시 망설이던 연시우는 이내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습니다. 제 뜻을 막으시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주십시오.”
확고한 연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무량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흠. 패기가 제법이구나. 처음 널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군.”
“…….”
“멸천대를 떠나는 건 허락할 수 없다. 그러니 속히 연희의 병을 치료하고 다시 멸천대로 복귀하도록 하라.”
어안이 벙벙해진 연시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은……?”
“이제부터 네 임무는 연희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네 자리를 비워둘 것이니, 속히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라.”
연시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대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본가를 거닐던 진무량은 괜스레 생각이 많아졌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마교를 떠나는 것부터 따로 행동하게 될 연시우에 대한 걱정까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고민들을 안고 걸어가던 진무량의 눈에 유서하가 보였다.
진무량은 걸음을 서둘러 유서하에게 다가갔다.
“왜 나와 있어?”
“보고 싶어서요. 참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유서하는 대답 뒤에 멋쩍은지 살짝 시선을 돌렸다.
진무량은 사랑스러운 유서하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큰일이네. 잠깐이라도 떨어질 수가 없으니.”
진무량은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모두 각자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잠시 헤어진다하더라도 언젠가는 필히 다시 만날 터.
그 훗날을 기약하며 지금은 자신 역시 원하는 미래를 한 걸음 나아갈 때였다.
“떠날 준비해. 아직 우리 할 일이 남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