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간파.
2018.08.02.
담무흔을 상대한 패도황씨가는 결국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한 채 전멸했다.
완벽한 승리를 경험한 구중련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모두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으나, 그중에서 담무흔만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패도황씨가는 어디까지나 천라지망의 일부분일 뿐. 진짜 승부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담무흔은 흥분한 구중련 무인들을 진정시키고서 다시 천라지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선두에서 구중련 무리들을 이끄는 담무흔은 무엇보다 은밀함을 가장 중시했다.
신속함을 포기하고서라도 강호 무사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몽원양은 패도황씨가를 상대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는 담무흔을 걱정했다.
“련주님, 조금 더 빨리 이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대로 있다간 무림맹 놈들의 증원이 늘어나 포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몽원양의 걱정 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담무흔의 태도는 확고했다.
“지금은 최대한 싸움을 피해야 할 때다. 척후를 더욱 늘려 최대한 무림맹 놈들과 접촉을 피한다.”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몽원양과 달리, 담무흔은 여유로웠다.
천라지망을 벗어나기 위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무력을 앞세워 강행 돌파를 시도한다면 아군이 입는 피해만 커질 터. 하여 담무흔은 우선 강호 무사들을 혼란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현재 담무흔이 노리는 것은 강호 무사들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천라지망 일진이 뚫렸으니, 강호 무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수색에 나설 터.
그렇다면 패도황씨가가 전멸한 곳으로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에 더해 구중련 무인들의 모습까지 찾지 못한다면 수색 인원은 더욱 늘어날 것이었다.
즉, 강호 무사들은 자연스레 한곳으로 모이게 되는 셈이다.
한 점으로 집중된 상대를 따돌리는 데 성공한다면 구중련 측은 많은 이점을 얻게 된다.
우선 순차적으로 대적해야 할 적들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으니 체력과 내력을 보존할 수 있다. 어쩌면 적절한 인원 배치를 통한 포진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일.
하여 담무흔은 은밀히 이동하며 기회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음을 몽원양이 알렸다.
“척후로 나간 이들이 전하길, 근방의 무림맹 무인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충돌 없이 벗어나긴 어렵다고 합니다.”
“더없이 기쁜 희소식이구나.”
몽원양은 담무흔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 태도에 담무흔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전속력으로 이곳을 벗어날 터이니, 모두 준비하라.”
갑작스런 담무흔의 지시였으나, 구중련 무인들을 즉각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련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검집에 꽂힌 검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며 담무흔이 명령을 남겼다.
“이제부터 내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마라.”
천라지망의 이진을 담당하던 밀종문(密宗門)과 서옥루(犀玉樓), 부영방(浮影幇)은 패도황씨가의 소식을 듣고서, 담무흔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각각 조를 나눠 구중련이 남긴 흔적을 찾아 나섰다.
한참 수색에 전념하던 때, 돌연 기이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귀를 찢는 듯한 그 소리는 수풀이나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였다.
무림맹 무사들이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발걸음 소리의 장본인인 담무흔과 구중련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서 경공을 펼치던 담무흔은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이며 섬뜩한 목소리를 냈다.
“거치적거리는 놈만 벤다.”
무림맹 무사들은 단지 담무흔과 마주했을 뿐인데도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느껴야 했다.
마치 온몸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는 감각일까. 능히 살기만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무림맹 무사들은 용맹하게 담무흔과 맞섰다.
서옥루주는 직접 자신의 도끼를 빼어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당황하지 말고 적과 맞서라! 겁도 없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놈들이다. 철저히 응징하라!”
루주를 비롯한 소옥루 일원들은 서로 단단히 응집하여 담무흔의 앞을 막아섰다.
허나 그들의 힘만으로 담무흔을 붙잡기는 턱없이 모자랐다.
서걱!
담무흔은 일격에 거대 도끼와 함께 서옥루주를 베었다. 분개한 서옥루 일원들이 덤벼들었으나, 모조리 담무흔이 휘두른 흑오신도의 제물이 되었다.
흑오신도는 열댓 명이 동시에 날린 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면서 정확히 상대의 급소를 꿰뚫은 것이다.
심지어 담무흔은 그 모든 것들을 경공을 펼치며 이뤄냈으니, 그 자리에 있던 강호 무사들은 담무흔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밀종문주는 순간적으로 위축된 마음을 뿌리치고, 우렁찬 목소리로 문도들에게 명령했다.
“정면이 안 되면 동시에 덤벼들어라! 반드시 여기서 담무흔을 붙잡아야 한다!”
밀종문주의 호통을 통해 인근 무림맹 무사들은 다시금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담무흔을 향해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담무흔의 시야 밖에서 암기를 던졌고, 또 누군가는 직접 담무흔의 앞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도 수십 명이 검을 겨눈 채 담무흔의 배후와 측면으로 쇄도했다.
허나 담무흔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었다.
흑오신도가 닿는 범위 내로 접근한 자들은 담무흔이 내리치는 검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모조리 절명했다.
멀리서 견제 중인 무림맹 무사들은 순식간에 경공을 펼쳐 저 멀리로 사라진 담무흔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멀리서 날아드는 암기 또한 담무흔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모조리 반대로 튕겨나갔다.
담무흔은 표정 한 번 찡그리지 않은 채 경공을 펼쳐 수백 명이 둘러싼 적진 사이를 돌파해나갔다.
게다가 그 뒤에는 담무흔의 측근들로 구성된 구중련 고수들이 따랐다.
혼연일체가 되어 나아가는 구중련의 모습은 흡사 성난 파도와 같았다. 그 파도는 하늘 높이 치솟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결국 무림맹 측은 서옥루(犀玉樓)와 밀종문(密宗門)이 와해될 정도의 피해를 입고 담무흔 추격을 멈췄다.
살아남은 몇몇의 무림맹 무사들은 완전히 상대의 무위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망연자실한 눈길로 멀어지는 담무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허나 담무흔은 그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경공을 펼쳤다.
결국 천라지망의 이진까지 담무흔에게 완벽히 돌파당한 것이었다.
* * *
진무량은 멸천대와 함께 전속력으로 담무흔의 뒤를 쫓았다.
허나 번번이 그들의 앞을 기다리는 건 처참한 모습의 시체더미들뿐이었다.
말을 달리던 진무량은 시체더미들 사이에 쓰러진 사내를 발견했다. 그 사내는 척 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진무량은 말에서 내려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도 담무흔에게 당한 것이냐?”
쓰러진 사내는 진무량의 물음을 듣더니 갑자기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극심한 부상으로 인해 근근이 숨을 몰아쉬던 호흡도 급격히 빨라지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그놈은 인간이 아니다……. 놈은 악귀다! 노, 놈이 다가온다……! 으아, 으아아아악!”
부상당한 사내는 미친 듯이 절규하더니, 이윽고 혼절해버렸다.
진무량은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후에 가까이 있는 멸천대원을 향해 명령했다.
“무림맹 측에 여기 위치를 알려.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 많다고 하면 알아서 처리할 거야.”
명령을 받은 멸천대원은 진무량을 향해 한차례 깊이 머리를 숙인 뒤, 무림맹 진영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에서 내린 위지운은 답답한 듯 홀로 하소연했다.
“담무흔을 쫓다 만나는 건 죄다 시체뿐이네. 기껏 살아 있는 놈들마저도 담무흔 이야기만 나오면 겁에 질려 기절해버리니……. 이거야 원, 난감하구만.”
주백기는 진무량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진군 속도를 더 빨리해야겠습니다.”
진무량은 생각이 복잡한 듯 묵묵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때 무림맹 측에서 보낸 연락책과 접선한 연시우가 다급히 진무량에게 다가왔다.
연시우는 무림맹에서 전한 정보들을 함축하여 진무량에게 전했다.
“대주님, 방금 담무흔이 천라지망 삼진까지 돌파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위지운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이진이 뚫렸다는 소리를 들은 게 방금 전인데, 벌써 삼진까지 통과했다고? 무림맹 놈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주백기는 조용히 위지운에게 핀잔을 줬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호들갑을 떨어. 무림맹 놈들이 길을 열어주는 게 아니고서야 이건 너무 심하잖아.”
주백기도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실제로 담무흔의 손에 천라지망이 너무 빠른 속도로 돌파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시우가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또한 담무흔은 일행을 둘로 나눴다고 합니다. 현재 담무흔의 행방을 파악 중이라곤 하지만, 아무래도 둘로 나뉜 구중련 일행의 위치조차 알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평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주백기조차도 이번만은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심각하군.”
한동안 말이 없던 진무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담무흔이 일행을 나눈 건 아마 교란을 위한 임시방편일 것이다. 지금 놈들이 전력을 분산시켜서 얻는 이점은 없어. 반면 감수해야 할 위험성은 훨씬 커지지. 아마도 놈들은 약속된 장소에서 몰래 다시 합류할 거야.”
진무량은 읊조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담무흔을 따라잡는 방법인데…….”
이대로 뒤만 쫓아서는 더 이상 담무흔과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담무흔을 붙잡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한발 먼저 움직여야만 했다. 문제는 담무흔의 도주 경로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고민을 해소할 방법을 찾던 진무량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눈대중으로 담무흔이 이동한 경로를 살폈다.
‘담무흔은 패도황씨가를 뚫고, 여기서 다시 천라지망의 이진을 돌파했다. 그리고 현재 삼진까지 지나쳤다고 하면…….’
담무흔의 이동 경로를 쫓던 진무량은 순간, 눈빛이 번뜩였다.
전체적인 지형. 강호 무사들이 포진된 장소. 담무흔이 선택한 이동경로.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담무흔은 결코 헛되이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가끔 획기적인 방법을 쓰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어디서든 강호 무사들의 빈틈을 찔러 먼 거리로 이동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움직임. 그 말은 변수가 없다는 뜻과 동일했다. 완벽함. 그것이 바로 담무흔이 가진 맹점이었다.
그렇다면 아군의 포진을 토대로 담무흔이 선택할 이동경로를 추려내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다고 완벽히 담무흔이 향하는 진로를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때 진무량 특유의 본능적인 감각이 꿈틀거렸다.
‘내가 만약 담무흔이었다면…….’
진무량의 손끝은 거침없이 지도를 타고 움직였다. 그리고 순간 한 지점에서 멈췄다.
* * *
강호 무사들의 추격을 뿌리친 담무흔은 잠시 진군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담무흔이 기다리던 대상인 몽원양과 구중련 고수들이 산 중턱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몽원양을 향해 담무흔이 말했다.
“적들에게 정체를 들키진 않았겠지?”
“그렇습니다. 무림맹 놈들의 반응으로 보아 아직 련주님의 위치를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담무흔과 몽원양은 무림맹 측에 혼란을 주기 위해 따로 움직였다.
무림맹 무사들은 담무흔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고, 결국 몽원양 일행에게서 담무흔을 찾는 우를 범한 것이다.
몽원양이 말했다.
“또한 놈들은 저희가 다시 합류했다는 사실도 모를 것입니다. 지금 전력으로 탈출을 시도한다면 천라지망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담무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앞장서서 구중련 일행을 이끌었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경계하며 나아가던 중, 갑작스레 주변이 떨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전면에 자리한 거대한 절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담무흔은 단번에 자신이 기관진식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강호 무사들은 천라지망을 펼치면서 각종 기관진식들을 설치해두었다.
우연히 구중련 일행은 그 기관진식을 지나게 되었고, 담무흔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무림맹 놈들 쓰는 수법이 졸렬하기 그지없구나.”
담무흔의 말을 들은 몽원양은 즉시 내공을 끌어 올리며 구중련 고수들에게 외쳤다.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말라!”
담무흔은 가볍게 주먹을 쥐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수신호는 주의할 필요가 없음을 알릴 때 쓰는 것이었다.
뒤이어 담무흔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에 따라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존재하는 듯, 담무흔의 몸이 허공을 걷기 시작했다.
경공술의 최고 경지인 허공답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낸 것이다.
담무흔은 공중에 뜬 상태로 무너지기 시작한 절벽과 마주했다.
이윽고 절벽이 무너져 내리며 허공에 있는 담무흔을 덮치려 했다.
“흡!”
담무흔은 짧게 일갈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절벽이 무너지면서 굴러 떨어지던 돌덩이들이 시간이 멈춘 듯 제자리에 멈췄다.
뒤이어 담무흔이 옆으로 손을 휘젓자, 멈춰있던 바위들이 모조리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담무흔은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고운 모래처럼 변해 버렸다.
담무흔이 몸에 힘을 빼자 모래는 그대로 바람에 쓸려나갔다.
담무흔의 신형은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실로 엄청난 담무흔의 무위를 목격한 몽원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련주님의 무공은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련주님과 함께라면 이깟 천라지망쯤 우습게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름진 몽원양의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미소가 걸렸으나, 담무흔은 천라지망에 빠진 후 처음으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불청객이 기다리고 있었던가. 용케 나의 움직임을 간파했군.”
담무흔이 경계태세를 취하자, 곧 인근을 둘러싼 협곡에서부터 깃발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 그 깃발은 바로 멸천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