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37화 (137/143)

137화. 타격.

2018.07.26.

고개를 바닥으로 축 늘어뜨린 몽원양은 느린 보폭으로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구중련 고수들 또한 몽원양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정, 사, 마 무인들의 추격에 당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몽원양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이런 심각한 패배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오로지 천하일통을 이루기 위해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음지에 숨어 지내왔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끝내고, 마침내 대업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무림맹과 전쟁을 선포했을 때만 하더라도 어떠하였는가. 구중련 무인들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허나 지금 그 시절의 패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재 구중련의 무인에게 남아 있는 건 짙은 패배감뿐이었다.

몽원양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한 사내로 꼽았다.

‘진무량……. 네 이놈……!’

진무량은 함께 본진을 습격했던 정, 사, 마 무인들을 이끌고 직접 구중련 토벌에 나섰다.

몽원양이 패배하고, 전략적 요충지였던 본진마저 잃은 구중련 무인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간파한 진무량은 구중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최적의 기회로 여겼다.

하여 무리해서 몽원양을 쫓기보다 혼란에 빠진 구중련 고수들을 처단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진무량이 몽원양에게 빼앗은 본진은 넓게 뻗은 구중련 포진에서 심장부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부터 진무량과 강호 무인들의 성난 파도 같은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구중련 무인들은 연이어 대비치 못한 습격에 수없이 큰 타격을 입었다.

보통 이런 때 전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몽원양이 직접 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해야 했다.

허나 겁에 질린 몽원양은 진무량의 추격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마지막 기회조차 놓친 것이다.

진무량은 몽원양이 반격할 기세가 없음을 알아채고서 진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시작된 진무량과 강호 무인들의 쾌진격에 구중련은 완전히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몽원양은 어떻게든 구중련 무인들을 피신시키려 애썼으나, 그 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도강과 묵위현, 그리고 유월천이 몸소 몽원양 추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몽원양은 면목이 없어 차마 자신을 뒤따르는 수하들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부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상 담무흔은 몽원양에게 모든 구중련 무인들을 통솔할 수 있는 전권을 맡겼다. 실제로 담무흔은 최측근만을 거느린 채로 무림맹주를 쫓았고, 나머지 고수들을 모두 몽원양에게 일임했기 때문이다.

허나 구중련주 담무흔의 기대와 달리, 몽원양은 진무량에게 처절하리만큼 쓰디쓴 패배를 겪었다.

즉, 구중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몽원양은 끝내 침통한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소수의 수하들과 함께 담무흔을 찾아갔다.

* * *

크게 패배한 몽원양이 강호의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식은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그 소식을 가장 반갑게 여긴 이는 무림맹주 섭고명이었다.

구중련주 담무흔은 섭고명의 목을 취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몽원양에게 구중련의 무인들을 일임한 이유 또한, 섭고명을 치는 시간동안 강호 고수들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확실한 목표를 세운 담무흔은 지독하리만큼 끈질기게 섭고명을 쫓았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섭고명도 다양한 방법으로 담무흔의 추격을 뿌리치려 했다.

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기문진법과 함정들을 설치했고, 미리 무림맹 고수들을 매복시킨 곳으로 담무흔을 유인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기발한 방법으로 담무흔을 저지하려했으나, 모두 헛된 시도였다.

담무흔의 무력 앞에서는 어떤 계책도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점점 담무흔의 추격을 뿌리치기 버거워지던 와중에 몽원양이 대패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섭고명은 희소식을 전해온 제갈휘에게 자세한 정황을 캐물었다.

“몽원양의 행방은 파악했는가?”

“아직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십중팔구는 담무흔에게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몽원양은 이미 홀로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니 당장 그가 몸을 의탁할 곳은 담무흔의 곁이란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도 도망치고 있을 수 없겠군.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제갈휘는 즉시 섭고명의 물음에 대답했다.

“맹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까진 담무흔의 매서운 공세를 피해 도망쳤으나, 전황이 완벽히 바뀌었다.

몽원양이 무너짐으로서 이제부터는 각지의 강호인들이 모두 담무흔을 향해 모여들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구중련의 기세도 점차 꺾일 수밖에 없을 터.

이때 지금까지 목표로 삼아왔던 무림맹주까지 반전하여 공세로 나선다면? 이는 구중련 소속 무인들에게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맹주님께서는 계속 모습을 드러내시면 안 됩니다.”

제갈휘의 어조는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실제로도 굉장히 고심한 뒤에 꺼낸 조언이었다.

줄곧 제갈휘는 섭고명에게 숨거나 도망칠 것을 주장했다. 전체적인 전황을 따져봤을 때, 그 의견은 분명 타당했다.

허나 무림맹주가 아닌 섭고명 개인의 입장은 어떨까?

단 한 번도 적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하는 처지가 반가울 리 없었다.

섭고명 역시 소싯적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무인.

적에게 등을 보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고, 강자를 보면 피가 뜨거워지는 호기로운 성격이었다.

무림맹주의 직위에 오를 정도이니, 무공 수준 또한 천하의 어느 고수와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또한 담무흔에게서 도망치는 건 섭고명에게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구중련과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섭고명은 어떤 칭송도 듣지 못할 터. 오히려 겁쟁이라는 질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꺼이 섭고명의 선택은 기꺼이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적의 손에 쓰러졌을 때 벌어질 참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능히 강호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거대한 세력이다. 무인들의 수만 따져봤을 때는 영사문과 여도강 일파를 합쳐도 무림맹에 비해 모자랄 정도였으니까.

그런 거대 세력인 무림맹의 수장이 바로 섭고명이었다.

즉, 섭고명은 무림맹의 결속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섭고명이 쓰러진다면 무림맹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담무흔이 가장 먼저 섭고명을 처단하려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림일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을 섭고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섭고명은 자신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을 때 무림맹 무사들이 어떤 곤경에 처할지 알고 있었다. 하여 늘 똑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당연히 내 직접 나설 생각은 없네. 구중련과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되, 더 이상 우리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지만 보여주는 걸로도 충분할 걸세.”

“정말 괜찮겠습니까?”

제갈휘의 물음에 섭고명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림맹주 직을 오래 지내다보니, 진정으로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더군. 더불어 세간의 평가나 자존심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

“평소에는 좀 감춰줬으면 하는 속마음까지 잘도 떠벌렸으면서 뭐가 그리 조심스러운가.”

특유의 차가운 제갈휘의 표정에서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실히 맹주님께서는 궂은일을 맡으셨을 때가 제일 잘 어울리시는 것 같긴 합니다.”

“그래, 이런 독설을 날려줘야 자네답지. 그럼 어서 움직이게.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게야.”

“맹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완벽히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제갈휘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고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섭고명은 문득 제갈휘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을 떠올렸다.

‘궂은일이라…….’

확실히 구중련과 전쟁을 선두에서 이끈 건 무림맹이 아니었다. 더불어 영사문이나 여도강 일파에 속한 인물도 아니었다.

실로 혼란스러운 현재 시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는 바로 진무량이었다.

구중련과 일전에서 거둔 승리가 대부분 진무량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만 따져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오롯이 진무량 혼자 이뤄낸 업적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하는 유서하와 멸천대, 그리고 강호의 무인들까지 모두 힘을 합쳤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그리고 끝으로 수많은 군중들의 노력 끝에 이뤄낸 값진 성과가 그 시절 가장 빛나는 한 사람을 통해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영웅은 난세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지.’

* * *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몽원양은 마침내 담무흔 앞에 도착했다.

담무흔의 모습을 확인하자, 몽원양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담무흔은 분노에 타오르는 눈길로 몽원양을 노려보았다.

“수많은 동료들을 모두 죽이고서 네가 무슨 낯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냐.”

“제가 저지른 실책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담무흔은 당장에라도 몽원양의 목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몽원양은 구중련을 위해 앞장설 유능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대다수의 고수들을 잃은 현시점에서 몽원양은 더더욱 필요한 존재였다.

담무흔은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일어나라.”

담무흔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몽원양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네놈을 죽이지는 않겠다. 네가 저지른 패배의 대가는 앞으로 전장에서 활약하여 만회하도록 하라.”

몽원양은 울먹이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결코 련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담무흔은 홱 고개를 돌려 몽원양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사실 당장 해결해야 할 안건은 몽원양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다.

몽원양의 패배로 난국에 빠진 현 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도저히 납득하고 싶진 않지만, 무림과 전쟁을 이어나가는 건 분명 무리였다.

보급로가 끊기고 막대한 인명 피해까지 입은 상태로 전쟁을 밀어붙이는 건 분명 한계가 있었다.

담무흔에게 강호의 무사들은 조금 위협도 되지 않는 하찮은 상대에 불과했다.

허나 애당초 담무흔의 목적은 강호를 지배하에 두는 것이지, 무림인들을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확실한 사실은 현재 전력으로는 강호인들을 복종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후퇴뿐이었다. 우선 물러난 뒤에 몸을 숨겨 다시 힘을 기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구중련은 천년 동안이나 모습을 숨긴 채 강호에서 암약해왔다. 다시 본거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강호인들에 눈을 피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담무흔은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나, 불쾌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강호에 자신을 상대할 적수가 없음에도 물러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담무흔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몽원양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계획을 바꿔 후퇴할 것이다. 퇴로로 삼을 경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

“최대한 적의 경계가 허술한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저희가 후퇴한다면 무림맹 놈들을 포함하여 여도강 일파와 사파 놈들까지 추격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강호 놈들의 경계를 벗어나기 위한 경로를 찾는데 집중하면 된다. 강호 놈들의 추격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진득한 살기를 풍기며 담무흔이 말을 이었다.

“강호 놈들 중에서 내 적수가 될 만한 실력자는 없다. 떼거지로 덤빈다 해도 마찬가지. 놈들이 제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이 몸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몽원양은 담무흔의 말이 허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담무흔의 무공 수준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으니까.

칠무제라 불리는 화산의 장문인을 손쉽게 제거하고, 전 마교 교주 천군위와 승부에서도 결국 승리하지 않았던가.

평소 몽원양은 무조건적으로 담무흔을 신뢰해왔으나, 지금 이 순간을 달랐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진무량으로 인해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파악했던 강호의 고수들 중 유일하게 진무량만이 담무흔과 필적한다고 느꼈었다.

‘진무량만 피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몽원양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안감을 씻어냈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결코 구중련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담무흔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역대 구중련주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공의 소유자인 담무흔은 이미 구중련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구중련의 맥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터.

언젠가 틀림없이 강호 전역에 구중련의 깃발이 휘날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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