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소통(2)
2018.07.12.
진무량과 유서하는 연주를 통해 정, 사, 마의 무인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각지에 퍼져 있는 무림맹 소속 무인들과 영사문을 필두로 한 사파세력. 그에 더해 여도강 일파까지 합치면 그 수가 족히 수십만 명이 넘는다.
이렇듯 엄청난 인파들을 유서하의 곡조를 통해 일치단결시키는 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여 진무량과 유서하는 끊임없는 상의를 통해 점차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나갔다.
두 사람은 생각을 나누기 위해 수일 밤낮을 새며 열띤 토의를 펼쳤고, 그리하여 마침내 진무량과 유서하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에 이르렀다.
기본적인 작전의 틀이 완성되자, 진무량은 즉시 멸천대원들을 모두 한자리로 불러 모았다.
이내 연시우, 위지운, 주백기를 비롯한 멸천대원들이 모두 도착하자, 진무량이 그들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 구중련과 상대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 새로운 작전은 서하의 연주를 이용하여 정, 사, 마 무인들을 지휘하는 방법이다.”
생각지 못한 진무량의 발언에 멸천대원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대원들의 난해한 심정을 헤아린 진무량은 최대한 쉽게 설명을 풀어냈다.
“전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제부터 각 조별로 들려주는 서하의 곡조를 외우기만 하면 된다.”
진무량은 멸천대원들에게 유서하의 곡조를 숙지시킨 뒤, 각각 조별로 나눠 무림맹과 영사문, 여도강 일파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즉, 먼저 대원들에게 곡조 속에 숨겨진 뜻을 외우게 하고서, 정, 사, 마 무인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인 것이다.
진무량의 설명이 잠시 멈추자, 연시우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음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은 분명 획기적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보다 긴밀하고, 즉각적으로 뜻을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뒤이어 연시우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우려되는 점을 밝혔다.
“허나 일방적으로 명령만 내려서는 서로 간의 소통이 불가합니다. 절대 대주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전장 전체를 총괄하다 보면 세세한 부분들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을 정확히 찌른 연시우의 질문이었다.
진무량은 수백 리가 훌쩍 넘는 넓은 전장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고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다. 그에 대한 장점도 분명 존재하겠으나, 소규모로 펼쳐지는 전투까지 모두 신경 쓰는 건 분명 무리였다.
그럴 때는 오히려 현장에서 적과 맞서는 무인들의 판단이 더 정확할 때도 있을 터. 허나 이 뜻을 진무량에게 전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영사문과 여도강 일파는 논외로 치더라도, 자존심이 센 무림맹 무인들까지 진무량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걸 마냥 찬성하진 않을 터.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데에 대한 반발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즉, 연주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건 가능하지만, 반대로 뜻을 전달받는 건 불가능했다.
상호 간의 소통이 되지 않으면 완벽한 연계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법.
게다가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인들이 어우러지는 전장에서 독단적인 판단은 분명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방법이었다.
진무량은 연시우를 대견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진무량 역시 작전을 검토하면서 연시우와 같은 우려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진무량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다. 애초에 진무량은 작은 허점이라도 있는 작전을 밀어붙일 위인이 아니었다.
진무량이 연시우를 향해 대답했다.
“아주 훌륭한 지적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기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두었다.”
말을 마친 뒤에 진무량은 돌연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멸천대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이었다.
진무량은 멸천대를 상징인 흑색 바탕에 붉은 용이 승천하는 형상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곡조를 통해 내린 명령에 대한 답은 바로 이 깃발을 통해 하면 된다.”
깃발을 통해 소통하는 건 멸천대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무수한 전장에서 자주 사용해왔던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미묘하게 색과 길이가 다른 깃발을 통해 전장에서 진격과 후퇴, 대기, 등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연시우는 진무량을 향해 송구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죄송합니다. 대주께서 생각해둔 바를 몰라보고, 제가 쓸데없는 참견을 했습니다.”
“아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고, 적극적인 자세 또한 훌륭하다.”
진무량이 멸천대원들 앞에서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괜스레 부러움을 느낀 위지운은 괜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쳇, 나도 같은 우려를 하고 있었는데. 누구나 그 정도 생각은 하잖아.”
주백기는 옆에서 투덜대는 위지운의 말소리를 듣고는 나지막이 훈계했다.
“……난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어쨌든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았으니, 넌 대주께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
위지운은 불만을 나타내듯 콧방귀를 뀌고서 대답했다.
“흥. 나도 알고 있어.”
“……근데 말투가 왜 그렇게 불만투성인 거냐?”
“몰라. 확실한 건 난 네놈이 제일 싫어.”
위지운과 주백기가 투덕거리는 건 일상이었기에, 진무량은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새로운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하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니, 지금부터 바로 곡조를 들려주겠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향해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그 뜻을 이해한 유서하는 멸천대원들 앞에 나섰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유서하는 조별로 나뉜 멸천대원들에게 각기 다른 곡조를 들려주었다.
유려한 음률 속에는 여러 가지 숨겨진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나아감과 물러남은 기본으로, 근처에 적이 있음을 경고하는 곡조도 존재했다. 또한 근처에 아군과 합류하라는 뜻을 가진 음도 있었으니, 꽤나 다양한 곡조를 외워야만 했다.
멸천대원들은 각자 구중련을 무너뜨릴 결의를 다지며 수많은 곡조들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 넣었다.
그렇게 멸천대원들이 순조롭게 암기를 진행하는 와중에 유독 위지운의 습득 속도가 느렸다.
디링-! 디리리링-!
유서하는 음의 높낮이가 분명한 연주를 선보였다. 낮은음과 높은음이 연속해서 반복되는 이색적인 곡조였다.
그 속에 내포된 뜻은 주위를 신경 쓰지 말고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연주를 끝낸 뒤에 유서하는 마주 앉은 주백기를 향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위지운은 간신히 답을 내놓았다.
“제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뜻이지?”
유서하는 안타까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쉽지만 틀렸어요. 다시 한번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유서하가 다시 금을 켜려 할 때, 유독 위지운의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위지운은 굳이 찾아 헤매지 않더라도 웃음소리의 주인이 주백기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위지운은 유서하에게 잠시 멈추라는 손짓을 전한 뒤에 주백기를 향해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좀 딴 데로 꺼지시지.”
“……이런 미안하군.”
주백기는 전혀 미안한 심정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를 전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자리를 떠나는 척하면서 혼잣말을 가장하여 속내를 털어놓았다.
“……평소 남에게 무식하다고 타박하더니 꼴좋군.”
위지운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주백기가 다시 성질을 긁었다.
“……음률은 머리로 외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면 될 텐데.”
위지운은 평소처럼 주백기에게 으르렁대지 않았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유서하를 향해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한 번만 다시 알려줘. 이번에는 확실히 외울 테니까.”
주백기는 위지운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는 묵묵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멀찍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연시우가 돌아서 걷고 있는 주백기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무 빨리 물러나는 거 아니야? 이제껏 위지운에게 무시당한 것에 대한 복수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놈이 너무 진지하니까 놀릴 수도 없더군.”
주백기는 괜스레 억울했다.
지금까지 위지운이 어떤 시비를 걸어와도 자신은 웬만해선 다 장난으로 치부하고 넘겨왔다. 헌데 위지운은 이 정도 놀림 가지고도 저리 심각하게 반응하다니…….
“……하여간 속 좁은 자식.”
주백기의 불평을 들은 연시우는 고개를 돌려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토라져서 장난을 안 받아주는 위지운이나, 장난을 안 받아줬다고 토라지는 주백기가 너무도 닮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각하는 게 비슷하니까 잘 싸우고, 그만큼 친해질 수도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주백기가 연시우를 향해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 난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어차피 위지운과 주백기는 몇 시진만 흘러도 평소처럼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연시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괜히 난처해지지 않도록 재빨리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났다.
* * *
암기로 고생한 위지운을 끝으로 멸천대원들은 모두 숨겨진 뜻을 내포한 유서하의 곡조를 외우는 데 성공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진무량은 다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모인 멸천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멸천대 이 조는 연시우를 따라 비천검문과 접선해야 한다. 그 뒤로는 무림맹 무인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평소 연시우 답지 않게 살짝 대답이 느렸다.
하필이면 비천검문으로 향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진무량에게 금제를 걸었던 유월천과는 정말 어울리고 싶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명령에 토를 달수는 없었다.
진무량의 시선이 이번에는 위지운에게로 향했다.
“멸천대 삼 조는 영사문과 합류한다. 적포신군에게 내 뜻을 정확히 전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하라.”
“그 정도야 간단하죠. 맡겨만 주십시오.”
진무량은 여유 넘치는 위지운의 대답을 듣고서 주백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파운신검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두었으니, 사조는 지금처럼 여도강 일파와 함께 행동하면 된다.”
주백기는 듬직함이 느껴지는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진무량은 마지막으로 멸천대 전체를 바라보며 위엄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나의 명령을 전하고, 그들의 뜻을 내게 알리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한 치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음을 모두 명심해야 한다!”
쿵! 쿵!
멸천대원들은 대답대신 각자 지닌 창을 바닥에 내리 찍으며 투지를 내비쳤다.
그 모습을 더없이 흡족하게 여긴 진무량은 마지막으로 멸천대원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전했다.
“우리가 다시 한자리에 모일 때는 몽원양을 완전히 꺾은 다음일 것이다. 비록 이제부터 모두 흩어져서 임무를 수행하나, 우리의 의지는 언제나 하나일 것이다. 모두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하라!”
* * *
멸천대 삼 조와 함께 길을 떠난 위지운은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영사문의 무인들이 모여 야영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특유의 흑색 갑주와 나찰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행색을 확인한 영사문의 무인들은 멸천대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하여 간단한 절차를 수행하고서 위지운은 영사문의 문주 적포신군과 만날 수 있었다.
위지운은 평소에 방탕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게 포권을 쥔 채 묵위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멸천대 삼 조장 위지운이 적포신군을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사실 위지운은 적포신군을 존경하는 감정 따윈 조금도 없었다.
허나 진무량의 명령에 따라 멸천대를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사파의 지존 묵위현과 마주해야 했으므로 정중하게 예를 표한 것이다.
묵위현 또한 친분이 있는 진무량의 수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대들의 늠름한 모습만 보고서라도 멸천대가 천하에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구려. 헌데 이토록 많은 인원을 이끌고 여기까진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멸천대주의 뜻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윽고 위지운은 금의 연주를 통해 구중련과 맞서는 작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목조목 핵심 요소들을 강조하는 위지운의 어조는 불필요하게 더하거나 주요한 설명을 빼지 않고, 묵위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위지운의 설명이 끝난 뒤에 묵위현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묵위현과 진무량의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묵위현 역시 영사문의 무력만으로 몽원양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여 은밀히 비천검문과 접선을 시도하던 중이었는데 이렇듯 멸천대 쪽에서 합심하여 구중련과 맞서자는 뜻을 알려온 것이다.
게다가 깃발과 연주를 통해 서로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은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리고 묵위현은 함께 난관을 헤쳐 나온 진무량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마음을 굳힌 묵위현이 위지운을 향해 뜻을 전했다.
“영사문 전 인원은 이 시간부로 멸천대주의 계획에 합세하겠소. 나 묵위현이 이 자리에서 맹세하리다.”
* * *
위지운과 묵위현의 만남이 이뤄지던 중에 연시우 또한 비천검문의 막사에 도착한 상태였다.
연시우는 유월천을 기다다리면서 수천 번도 넘게 마음을 다스렸다.
과거의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예로서 유월천을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연시우는 본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장백령을 포함한 비천검문 인파들과 함께 유월천이 연시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시우는 다시금 예를 갖추길 다짐하며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유월천의 말이 한발 더 빨랐다.
“여기까진 또 무슨 일인가? 이리도 자주 본문을 방문하다니……. 혹시 비천검문의 입문하고자 함인가?”
언뜻 듣기에 유월천의 어조는 친근함 그 자체였다.
허나 그다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듣는 친근한 인사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연시우는 이마에 짜증스런 주름이 생기는 걸 어떻게든 내보이지 않으려 했다.
무엇보다 연시우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말 같지도 않은 유월천의 농담이었다.
연시우가 적대하는 감정을 유월천이 모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유월천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런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직선적인 성격에 연시우는 유월천의 그런 부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성격은 상극인 것이다.
결국 연시우는 예를 갖추고자 하는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대주의 뜻을 전하러 왔소.”
연시우는 진무량이 세운 작전에 대해서만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연시우의 설명이 끝나자, 유월천이 대답했다.
“흠……. 과연 훌륭한 작전임이 틀림없군. 허나 무림맹 무인들이 이 뜻을 모두 따라 줄지는 의문이군.”
“하여 검선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소. 정파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않소.”
“흠. 그건 너무 과찬인데.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아님은 확실하지.”
“그렇다면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
“흠 근데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어떤가? 자네가 비천검문의 입문한다면 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
연시우는 부글거리는 속을 나타내듯 이를 가며 대답했다.
“지금 농담할 때는 아닌 걸로 알고 있소만.”
“역시 그렇지? 어쨌든 내 한번 힘써보겠네. 쉴 곳을 마련해줄 터이니, 내 집이라 여기고 편히 지내시게.”
연시우는 간단히 포권을 취한 뒤에 고개를 홱 돌려 돌아갔다.
연시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장백령이 유월천을 타박했다.
“어차피 뜻을 합칠 거면서 왜 그렇게 짓궂게 구는 건가?”
유월천의 둥근 눈매가 더욱 휘어지면서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억지로 예를 갖추는 사이는 불편하지 않은가. 서로 어렵게 생각한다면 소통이 어렵지. 허니 먼저 편안히 대해주는 걸세. 그래야 저쪽도 조금이나마 더 마음을 터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장백령은 졌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하여간 자네는 능구렁이야.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
* * *
사전에 약속된 시간이 되자, 진무량과 유서하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올랐다.
이윽고 진무량은 안력을 집중한 뒤에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그럼 준비가 다 됐는지 알아봐줘.”
유서하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금에 손을 올려 간단하게 현을 훑었다.
디리리리링-!
유서하의 섬섬옥수가 현을 지나자 아름다운 음이 흘러나와 널리 퍼져나갔다.
뒤이어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멸천대를 상징하는 깃발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는 것이 아닌가.
무림맹 무인들은 물론, 영사문과 여도강 일파까지 곳곳에서 멸천대의 깃발이 흩날렸다.
그 광경을 확인한 진무량은 계획했던 일들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