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소통(1)
2018.07.08.
멸천대는 구중련의 무인들을 크게 격파했다.
개성이 뚜렷한 조장들의 맹활약에 더불어 진무량이 몸소 선두로 나서 멸천대를 통솔하자, 그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멸천대는 연이어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격파하는 와중이었으나, 진무량의 표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졌다.
‘전황은 우세한 듯 보이나, 승패를 가를만한 결정적인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있다.’
진무량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바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첫째는 구중련의 뜻을 따르는 마교 무인들의 사기가 전혀 꺾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개 일방적인 승부가 이어지다 보면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마련이나, 적들에게선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구중련 소속 고수들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저돌적인 태세로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에 더해 마교 무인들까지 구중련의 움직임에 합세하여 일치단결된 움직임을 보였다.
현재 여도강이 마교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교 소속 무인들의 마음은 완전히 구중련 쪽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담무흔의 존재였다.
담무흔의 무공 수준은 강함을 숭배하는 마교인들에게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경지였던 것이다.
특히 담무흔이 직접 적과 겨루는 모습을 본 이들은 모두 그를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또한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담무흔은 직접 수하들을 죽여 퇴로가 없음을 선언했다.
담무흔에게서 도망치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이는 결과적으로 후퇴는 곧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로 인해 마교 무인들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전황이 불리해도 한마음 한뜻으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으니, 제아무리 멸천대가 활약한다 해도 차마 그 기세마저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몽원양의 존재였다.
광활한 전장에서 펼쳐지는 무수한 전투들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파악한 몽원양은 적재적소의 무인들을 배치시켰다.
또한 조금이라도 열세인 곳에는 즉각 지원을 보내 희생을 최소화했다. 게다가 넓은 전장 속에 흩어진 무인들의 위치를 일일이 파악하여 급작스러운 연계를 통해 대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몽원양의 통솔하에 거대한 구중련 무리들은 낭비되는 힘없이 일치된 움직임을 보였고, 그로 인해 각자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구중련의 드높은 사기와 재빠른 지원을 꿰뚫어 본 진무량은 내심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여도강 측의 연락책이 진무량에게 패전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현재 불시에 당한 협공으로 인해 멸천대를 제외한 네 개의 타격대가 모두 후퇴 중입니다. 파운신검께서는 멸천대의 단독 행동을 용인하셨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만 제게 전해주십시오.”
진무량은 신중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멸천대가 전력을 다한다면 포위를 뚫고 몽원양에게 닿을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몽원양을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은 서지 않았다.
몽원양이 인파의 몸을 숨겨 도망친다면 도리어 멸천대가 고립되어 곤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걸 무시한 채 곧바로 담무흔의 행방을 쫓아가자니, 배후에 남은 몽원양의 존재가 거슬렸다.
몽원양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담무흔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담무흔의 존재가 분명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현재로서 최선은 눈앞의 몽원양이 이끄는 구중련 무인들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억지로 공격에 나서기보단 한차례 후퇴한 후, 다시 구중련을 도모하는 편이 더 이로운 선택이었다.
결심을 내린 진무량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멸천대는 후퇴하여 위기에 처한 아군들을 구할 것이다. 또한 여도강에게 흩어진 아군들의 위치를 파악하여 내게 알려달라 전하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연락책은 대답 후 즉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경공을 펼쳐 여도강에게로 향했다.
진무량 또한 진격을 멈추고, 멸천대와 함께 인근을 돌아보며 아군들을 구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 *
몽원양이 지휘를 위해 임시로 마련해둔 천막으로 유쾌한 승전보가 전해졌다.
“철혈부주님, 여도강 일파가 모두 후퇴했습니다. 게다가 추격을 통해 놈들을 전선에서 멀리 쫓아대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보고를 전해 들은 몽원양의 입가에는 한껏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개전 첫날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몽원양은 더 자세한 정황을 알기 위해 승전보를 전해온 전령에게 하문했다.
“주의하라 일러두었던 멸천대는 지금 어찌 움직이고 있더냐?”
“여도강 일파와 함께 후퇴하여 현재 위치를 추적 중입니다. 멀리 도망친 탓에 정확한 행적을 파악하는 데까지는 좀 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몽원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만족스러운 성과 속에 단 하나의 불만이 있다면 멸천대의 움직임이었다.
멸천대가 독단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면 일거에 소탕할 방책을 생각해두었건만, 후퇴하는 바람에 그 계획을 실현시킬 수는 없었다.
허나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더없이 만족스러운 대승을 거뒀음은 분명했다.
몽원양은 이 기회에 단숨에 여도강 일파를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계속 멸천대의 돌발행동에 주시하면서 서둘러 도망친 여도강의 위치를 파악하라.”
몽원양의 목적은 담무흔이 무림맹주를 쓰러뜨릴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나, 그 때문에 소극적으로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과감한 공격이 더 효과적이란 걸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원양은 여도강 일파 이외에 다른 세력들의 움직임도 철저히 살폈다.
“근래 묘하게 조용한 무림맹 놈들이 신경 쓰이는구나. 무슨 수상한 짓거리를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느냐?”
“비천검문이 영사문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정황이 발견되어 조사 중입니다.”
“검선과 적포신군 모두 얕볼 작자들이 아니다. 더욱 철저히 감시하라.”
“알겠습니다.”
몽원양은 무림맹과 영사문, 여도강 일파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인사들을 정해 철저히 감시했다.
주의를 요할 소수 고수들의 움직임만 확실히 차단한다면 승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모든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느라 애쓸 필요 없지. 핵심 고수들을 빼면 어차피 피라미들일 뿐.’
평소 까칠한 성격의 몽원양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은 조금도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거듭되는 승전에 한껏 고무된 몽원양이 소리 높여 호방한 외침을 내질렀다.
“천하에 무수히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한들, 내 앞에선 모두 하찮아지는구나. 참으로 유쾌한 일이잖은가. 흐하하하하!”
목청껏 내지르는 몽원양의 웃음소리는 한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 * *
환희에 찬 몽원양의 천막과 반대로 여도강 일파가 모인 곳에서는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첫 전투에서 대패를 경험한 탓에 모두 한풀 의기소침해진 탓이었다.
여도강은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고자,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번 패배의 원인은 우리의 힘이 모자랐다거나, 의지가 나약했기 때문이 아니었소. 단지 우리를 상대하는 적들의 방법이 더 뛰어났을 뿐이오.”
여도강의 듬직한 태도는 모인 고수들의 시선을 주목하게 했으나, 침통한 분위기마저 바꾸지는 못했다.
모두가 몽원양을 궁지에 빠뜨릴 계책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면승부가 통하지 않는다면 획기적인 수로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하거늘, 그 뜻을 실현시킬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암울한 분위기를 참다못한 참마검 유안이 니서서 방책을 내놓았다.
“뾰족한 수가 없다면 제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정면 돌파를 통해 적들의 연계를 뚫고, 몽원양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진무량은 유안의 의견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반대의 뜻을 알렸다.
“무모해. 적의 연계만 뚫는 일이라면 멸천대 단독으로도 가능했다. 허나 그런 우격다짐만으로는 몽원양을 사로잡을 수 없어.”
확고한 진무량의 발언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여태껏 진무량은 확실한 일이 아니면 의견을 내놓지 않았었다.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 아니라면 여도강 일파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 자체를 하지 않았던 진무량이다.
그런 그가 이토록 완강히 반대하고 나설 정도라면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을 터.
당장 뾰족한 수가 없음을 확인한 여도강은 시간을 들여 몽원양의 약점을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모두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게 낫겠소. 비록 우리가 패퇴하긴 했으나, 아직 개전 첫날일 뿐이오. 우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수하들이 동요하지 않게 힘써주시오. 심기일전 한 뒤에 다시 구중련과 일전을 벌일 것이오.”
* * *
여도강 일파의 회의에 참석했던 진무량은 별다른 성과 없이 멸천대가 모여 있는 야영지로 복귀했다.
돌아오는 진무량을 가장 먼저 맞아주는 이는 유서하였다.
야영지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예상보다 회의가 일찍 끝났네요. 성과는 좀 있었나요?”
“뾰족한 수는 찾지 못했고, 우선 태세를 가다듬고 다음 일전을 준비하기로 했어.”
유서하는 진무량의 모습을 유심히 살파다가 질문했다.
“뭔가 말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 중인 게 있는 거죠?”
정곡을 찌른 유서하의 질문에 진무량은 살짝 당황한 모습을 내비치며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유서하가 바라본 진무량은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다면 답답하거나 막연한 감정이 느껴졌을 터. 허나 망설이고 있다는 건 따로 생각해둔 대책이 있다는 뜻.
유서하가 대답했다.
“척하면 척이죠. 이젠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걸요.”
“너무 당연한 것처럼 말하니까 좀 당황스럽네.”
여태껏 진무량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이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진무량은 주로 상대하는 적의 의표를 찔러 수없이 많은 승리를 이뤄냈다. 의표란 결국 상대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공략하는 것.
즉. 철저한 심리전의 우위를 가져가야만 가능한 방법이다.
심리전의 핵심은 본심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 이는 특히 진무량이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는데, 유서하에게만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유서하가 말했다.
“예전에 하도 거짓말에 당해서 그런가 봐요.”
“그렇다면 다 내 덕이네. 나한테 고마워해야겠어.”
유서하는 입일 삐죽 내밀며 퉁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거 아주 고맙네요.”
진무량은 마음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상대가 유서하였으니까.
어차피 그녀에게만은 아무것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진무량은 속으로 생각해두고 있던 몽원양과 맞설 대책을 유서하에게 털어놓았다.
“오늘 구중련 놈들과 겨루다보니 몽원양이 무슨 생각 중인지 파악되더군. 놈은 몇몇의 고수들에게 집중 감시를 붙여놓고 있음이 틀림없었어.”
후퇴하면서 여도강 일파의 무인들을 구출할 때, 구중련의 추격은 현저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여도강 일파 중에서도 유안을 비롯한 고수들에겐 실력이 출중한 무인들이 혼신의 추격에 나섰다면, 반대로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무인들은 제대로 된 추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한 추측이었으나, 전황을 살필수록 그 추측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렇다면 몽원양이 경계하지 않던 무인들이 돌연 일제히 공격에 나선다면 분명 철혈부의 철통같은 정보체계도 무너질 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다만 섣불리 움직인다면 몽원양은 즉시 대처할 거야. 몽원양의 지배력을 넘어 단숨에 승기를 가져올 방법은 한 가지야.”
“그게 뭐죠?”
“비천검문을 포함한 무림맹은 물론, 영사문까지 연동하여 전 방위에서 몽원양을 치는 거지. 그렇다면 몽원양도 대처하지 못할 거야.”
진무량의 심중을 알게 된 유서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분명 뛰어난 계책임은 틀림없지만…….”
유서하는 곧 진무량이 왜 이 안건을 다른 사람에게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눈치챘다.
진무량의 계획은 정파와 사파, 마교가 모두 일치단결된 움직임을 보여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작전이었다.
허나 여태까지 서로 적대해왔던 정, 사, 마가 어우러져 일치된 움직임을 보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휘체계 없이 수많은 인원이 움직인다면 필히 혼란을 초래하는 법.
한없이 광활한 전장 속에서 수십만 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인다면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각기 다른 목표로 움직이다 보면 움직임이 조잡해지고, 필히 동선도 얽힐 것이다. 게다가 긴 세월 반목해왔던 정, 사, 마가 합심하여 연계 공격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수천 년간 어둠 속에 숨어 강호일통을 준비해온 구중련. 그들이 펼치는 체계적인 움직임에 대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회심의 일격은 실패했을 때 돌아오는 타격도 더 큰 법.
진무량이 생각한 연합 공격이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천하의 주인이 구중련으로 정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진무량이 말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건 알아. 무엇보다 가장 큰 난제는 무림맹, 영사문과 소통할 방법이야.”
어떤 식으로든 정, 사, 마가 일관된 지휘체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단숨에 몽원양을 꺾을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허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이 복잡하게 꼬인 진무량은 고개를 훌훌 터며 머릿속을 비워냈다.
그때 유서하가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진무량에게 말을 걸었다.
“무림맹, 영사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
진무량은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유서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연주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뜻이야?”
“곡조를 통해 저희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암어를 만드는 거예요.”
현재 유서하의 음공 수준이라면 능히 수백 리가 넘는 지역까지 연주소리가 들리게 할 수 있다.
즉, 무림맹과 사파, 마교 무인들까지 모두 유서하의 연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
그렇다면 유서하의 연주 속에 숨겨진 암어를 통해 뿔뿔이 흩어진 무인들을 지휘한다는 게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음을 통해 무인들을 지휘한다라……. 획기적인 방법임은 틀림없군. 무엇보다 아주 재밌을 것 같아.”
진무량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듯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시작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