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기약.
2018.06.28.
진무량은 한참 동안 대답 없이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금제를 풀기 위한 목적이었다곤 하나, 예전부터 유서하는 진무량의 내공을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상반된 정과 마의 기운을 합칠 수 있게 된 것도 유서하와 함께 금제를 푼 뒤부터였다.
비록 지금 금제의 속박에서 났다고는 하나, 유서하가 다시 정의 내공을 움직일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진무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정(正)의 기운을 움직일 수 있겠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유서하는 곧바로 바닥에 앉아 금을 무릎 위에 올렸다. 순식간에 연주할 준비를 마친 뒤에 유서하가 믿음직한 어조로 진무량에게 말했다.
“독 기운을 없애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뭐든지 해야죠.”
진무량의 고민은 짧았다.
타인이 내력을 움직이게 두는 건 심대한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허나 진무량은 여태까지 눈앞에 난관이 닥치면 우회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선택해 왔다. 게다가 유서하와 함께이기에 망설일 이유가 더더욱 없었다.
진무량은 즉시 제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좋아. 그럼 바로 시도해 보자.”
이윽고 진무량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유심히 그 모습을 살피던 유서하는 천천히 금을 켜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진무량의 내공이 연주 소리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티딩-! 띠디디딩-!
유서하는 소리를 통해 진무량에게 내력을 전했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진무량 몸속에 정의 기운이 넘실대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까지 진무량의 부름을 완강히 거부해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의 기운은 유서하의 연주에 열렬히 반응했다.
진무량의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정심한 기운은 유서하의 내공과 합쳐져 끝없이 증폭됐다.
그로부터 파생된 정의 기운은 너무도 고강하여, 잠시마나 진무량조차 당황한 기색을 내비칠 정도였다.
뒤이어 진무량은 천천히 마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서서히 진무량을 중심으로 불길한 묵색 기류가 흘러나오면서 파괴적인 마기가 모여들었다.
진무량은 상반된 두 개의 기운을 합치기 위한 사전 준비를 끝내고서 유서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스스로의 집중을 깨지 않음과 동시에,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유서하에게 정확히 뜻을 전달하기 위해 전음을 선택한 것이다.
ㅡ혹시 내가 마기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느낄 수 있겠어?
유서하는 유심히 진무량의 체내를 살폈으나, 복잡한 기의 흐름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허나 유서하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서하는 한 가지 꾀를 냈다.
음을 통해 진무량에게 전달하는 기를 넓게 분산시킨 것이다. 단전과 음독양맥은 물론 기혈 곳곳까지 정의 기운을 흩어놓아, 그 기운을 통해 진무량 체내의 기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유서하가 반신반의로 시도한 방법은 대성공이었다.
정의 기운은 상반된 마의 기운을 정확히 감지해 냈고, 그로 인해 유서하는 진무량의 마공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확실히 간파할 수 있었다.
ㅡ네. 마기의 흐름은 확실하게 파악했어요. 다음은 뭘 하면 되죠?
ㅡ이제부터 두 기운을 합칠 거야. 넌 내가 마기를 운용하는 방식과 정반대로 정의 기운을 움직여야 해.
온전히 단전에서 상반된 두 개의 내공을 합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충돌을 없애야 했다. 기혈에서부터 정과 마의 기운이 뒤엉켜 서로 부딪치는 걸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도로 정밀한 내공 운용이 필요할 터.
ㅡ결코 쉽지는 않을 거야. 준비 됐어?
유서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서 진무량의 전음에 대답했다.
ㅡ네. 시작하죠.
전음임에도 불구하고 결의마저 느껴지는 유서하의 어조였다.
이윽고 진무량은 본격적으로 마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유서하는 진무량의 마공과 반대로 정심한 기운을 움직였다. 초기에는 어렵지 않게 마공의 흐름을 따라갔으나, 점차 미친 듯이 폭주하는 마공에 유서하는 곤혹스러움을 드러냈다.
‘빠르다!’
진무량이 마공을 운용하는 방식은 마치 연쇄적으로 터지는 폭발을 연상케 했다.
불규칙적으로 이는 폭발처럼 여기저기서 갑작스럽게 마공이 터져 나온다. 또한 그 마공조차 제각각으로 흩어지다 보니, 전혀 그 흐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유서하는 필사적으로 진무량의 마공을 감지하여, 그와 반대로 정의 기운을 운용했다.
그에 따라 점차 진무량의 단전에서 상반된 두 개의 기운이 합쳐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진무량이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을 합쳐 왔던 것과 달리, 정과 마의 기운이 균형 있는 조화를 이뤘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진무량을 중심으로 어느 때보다 찬란한 황금빛 기운이 뻗어 나왔다.
사실 오랜 시간 음공을 수련해 온 유서하이기에, 간신히나마 폭주하는 마기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유서하는 수천수만 가지 변화를 지닌 난해한 곡조들조차 완벽히 연주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신마로 불리는 호율과의 승부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음공을 이루는 가장 기본은 섬세한 내공의 조절.
그 방면에서 이미 유서하는 천하의 그 어떤 고수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정작 본인은 아직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유서하는 마기의 흐름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폭주하듯이 길길이 날뛰던 마기가 점차 느려짐에도 그녀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때 진무량의 목소리가 유서하에게 들려왔다.
“이제 끝났어.”
감았던 눈을 뜬 유서하는 눈앞에 멀쩡히 서 있는 진무량의 모습을 보고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그도 잠시 유서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독 기운은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
“아무 이상도 없어. 독 기운은 모두 몰아냈고, 그 덕에 지금 내 몸은 최상의 상태야.”
진무량의 대답을 듣고서야 유서하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번처럼 정의 기운을 움직일 수 있겠어? 그게 가능하다면 분명 앞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아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정의 기운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건 무리였다.
허나 그 역할을 유서하가 해 준다면?
몸에 부담을 줄이는 건 물론이고, 온전히 상반된 두 개의 기운을 합친 채 적과 맞설 수 있다.
게다가 유서하의 도움으로 합쳐진 정과 마의 기운은 지금까지 운용했던 내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힘을 지녔음이 틀림없었다.
허나 분명한 문제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
가장 큰 난관은 유서하의 부담이었다. 단순히 내력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 초식에 내공을 싣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당연히 전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자가 훨씬 난해하다.
“분명 많이 힘들겠지만…….”
유서하는 단칼에 진무량의 말을 자르며 명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울게요.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할 거예요.”
유서하는 당장이라도 금을 연주할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수련을 시작하죠.”
진무량은 자신을 돕기 위해 열정적으로 나서는 유서하가 고마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금 걱정도 되었다.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 의욕이 너무 과해도 좋지 않아.”
이윽고 진무량의 시선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해를 향했다. 뒤이어 진무량이 아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루가 벌써 다 갔네. 오늘만은 마음 편히 쉬려고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돼 버렸군.”
“그럼 수련은 돌아가서 할까요? 해가 다 질 때까지만 쉬는 걸로 하고요.”
진무량은 유서하의 곁에 앉았다.
“그래. 잠깐이라도 좋으니, 아무 방해 없이 그냥 이렇게 같이 있자.”
나란히 앉은 진무량과 유서하는 자연스레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았다.
꼭 함께 즐거운 일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이렇게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무량과 유서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유서하가 조심스레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이번 구중련과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 다음 계획은 생각해 봤나요?”
“…….”
진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구중련을 깨부순 뒤에 찾아올 미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순간도 앞으로의 삶을 꿈꾼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도 없었고, 살아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았기에.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래도 널 굶기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어.”
“살림은 제가 책임질 거예요. 뭘 해도 부족함 없이 지낼 있도록 제가 확실하게 책임질게요.”
“그럼 아무 걱정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녀 볼까? 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정처 없이 떠도는 건 금방 싫증나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군.”
유서하는 조심스레 본심을 꺼내 놓았다.
“사실 전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게 뭔데?”
“세가를 세우고 싶어요. 영향력이 천하에 모두 닿을 정도로 명망 높은 세가를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조금 의외군. 세가를 세워서 하고 싶은 일이 뭔데?”
“정과 사, 마의 구분 없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요.”
무림맹과 사파가 힘을 합치는 이유는 구중련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여도강 역시 마교에서 구중련을 몰아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일 뿐.
구중련이 천하에서 사라진다면 정파와 사파, 마교는 다시 전처럼 서로를 견제하는 시절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서로 단절하고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불만의 골이 깊어질 터. 그렇다면 언젠가 정파와 사파, 마교 중 어느 세력이 다시 혈겁을 일으킨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당장 마교와 사파, 그리고 무림맹을 하나로 합치는 건 명백한 무리.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긴 시간 대립해온 이들을 억지로 화해시키는 건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테니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천하의 정세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까다로운 난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유서하의 답은 바로 정, 사, 마가 모두 거리낌 없이 왕래하고 교류할 수 있는 지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주 먼 훗날이 됐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때가 찾아온다고 가정했을 때, 정, 사, 마의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왕래하고 교류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분명 서로 화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무리하게 힘으로 천하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유서하의 선택이었다.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세가를 세워, 그 영향력이 닿는 곳만은 철저하게 분쟁을 금지하는 거죠. 정, 사, 마의 불만을 단번에 잠식할 힘이 있어야 할 거예요.”
“그렇겠지. 서로의 영역이 침범 당했을 때 얌전히 물러날 놈은 없을 테니까.”
“거기다가 무력은 일체 사용하지 않아야 돼요. 이미 천하는 구중련과 전쟁으로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니까.”
“흠…….”
“사실 막연히 생각한 거라, 이를 위해서는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인 만큼, 뜻을 이뤘을 때 보람도 클 거예요.”
“일리가 있군.”
“괜찮지 않나요? 이 정도면 뜻을 이룰 만한 가치도 있고, 우리가 가진 힘을 올바르게 쓰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나쁘지 않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해 보고 싶은 거잖아.”
유서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내가 움직일 이유는 네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돕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진무량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또, 제법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 * *
철혈단의 단주 몽원양은 흰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가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는 현재 마교의 상황을 알리는 전서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몽원양의 도착한 곳은 담무흔이 임시로 사용 중인 천막이었다.
긴급한 소식을 전할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몽원양은 담무흔에게 간략하게 예를 취한 뒤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련주님, 긴급한 소식입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이냐?”
몽원양은 전서구에서 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담무흔에게 전했다.
“감천기가 죽고, 마교의 지배권이 여도강에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순간 담무흔의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일련의 과정도 없이 다짜고짜 마교의 지배권을 뺏겼다고? 아니, 그보다 누가 감천기를 쓰러뜨렸다는 거냐?”
“소식이 늦게 전해진 건 여도강 일파가 철저히 정보를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천기를 벤 자는 진무량입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일에 배후에 진무량과 멸천대가 있는 듯합니다.”
담무흔은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살의를 순식간에 거두어들였다.
당장 분노로 허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몽원양에게 전해 들은 사안은 긴급했다.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공급해야 할 마교가 적의 손에 넘어간 건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허니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우선 물러나 훗날을 기약하거나, 총력전을 벌여 단숨에 무림맹을 짓밟는 것이었다.
물론 담무흔은 후자를 선택했다.
완전히 근거 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현재 구중련은 화산파를 무너뜨리고,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그야말로 대나무를 쪼개 버릴 듯한 거센 기세였다.
실제로 무림맹은 담무흔의 공세에 번번이 패배했다. 오죽하면 무림맹의 속한 중소문파들은 담무흔의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오줌을 지린다는 풍설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담무흔은 지금이야말로 적에게 넘어가려 하는 승기를 빼앗아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기세를 드높여야 할 터.
담무흔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몽원양에게 명령했다.
“즉시 구중련은 물론, 마교의 수뇌까지 모두 모이게 하라. 급히 전할 특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