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차이
2018.06.21.
비천검문 일행과 헤어져 마교를 향해 떠난 유서하와 연시우는 마침내 귀곡신성에 도착했다.
귀곡신성 내의 분위기는 평소처럼 활기찼다.
번화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방불케 했고, 사방으로 길게 늘어선 노점상은 가게 주인과 손님들이 흥정하느라 시끌벅적했다.
귀곡신성과 독룡각은 위치가 제법 떨어져 있었기에, 멸천대와 독룡각의 전투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혹시 모를 구중련 세력의 난동에 대비하여 여도강 일파가 귀곡신성을 내부를 철저하게 지켰기에, 민가에는 전혀 피해가 가지 않았다.
구중련과 연관된 마교 세력의 처우는 대부분 여도강이 맡았고, 진무량은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교 내의 세력들과 마찰이 잦았기에 스스로 나서서 이로울 것이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여도강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리란 믿음이 바탕이 된 결정이었다.
물론, 흥미가 이는 일을 제외하곤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진무량의 천성도 한몫했지만.
그렇게 여도강이 어수선한 마교 내부를 정리하는 동안, 진무량은 멸천대를 모두 불러 모아 휴식을 명령했다.
여도강이 마교 고수들의 뜻을 모으는 데는 분명 시간이 필요할 터. 또한 앞으로 구중련과 치열한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멸천대를 조금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귀곡신성에 도착한 유서하와 연시우는 멸천대가 머물고 있는 진무량의 본가로 향했다.
유서하는 일전에 진무량의 본가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나, 까딱하면 길을 잃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널찍한 내부는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광활한 마당을 지나 유서하와 연시우는 진무량이 머무는 건물에 다다랐다.
이윽고 두 사람이 건물 입구를 통과해 진무량이 있는 방으로 향하던 중,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위지운, 주백기와 마주쳤다.
그러자 위지운이 먼저 다가가 연시우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야,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오늘쯤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았군. 그래, 대주에게 가는 길이냐?”
연시우와 위지운은 주기적으로 전서구를 통해 연락을 취해 왔기에, 서로의 사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연시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주께서는 무탈하신가?”
“……나중에 찾아와라. 지금은…….”
위지운은 대답 중인 주백기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고는, 시선을 내리깔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천기의 독공이 갑자기 재발하면서 지금 대주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우리로서는 손 쓸 방도가 없어. 당장은 상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유서하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유서하는 단숨에 위지운의 앞으로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렇게 상태가 위독한 건가요?”
위지운은 근심이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한 손으로는 주백기의 입을 틀어막은 상태였다.
“휴우우우. 심각한 상태지. 백방으로 독 기운을 다스릴 시도를 해 봤으나,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아. 이대로라면…….”
유서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지금 진무량은 어디 있죠?”
위지운은 고개를 돌려 시선으로 진무량의 방을 가리켰다.
“저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야. 가서 만나 봐. 널 보면 조금 기운을 차리실지도…….”
유서하는 급한 마음에 위지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단숨에 진무량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주백기는 입을 막고 있던 위지운의 손을 뿌리쳤다. 이윽고 주백기의 불쾌한 시선이 위지운을 향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뭘?”
위지운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조금 전 유서하의 앞에서는 전 재산을 날린 사람처럼 침통한 모습이더니, 지금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가 찬 주백기가 말했다.
“……방금 대주께서 위독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야 당연히 거짓말이지.”
주백기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연시우가 위지운에게 물었다.
“대주께서는 뭘 하고 계시지?”
연시우는 처음부터 위지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정말 진무량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믿었다면 연시우 또한 결코 얌전히 두고 볼 성정은 아니었다.
연시우의 물음에 위지운이 대답했다.
“방금 잠에 들었어.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감천기의 독공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한 건 사실이야. 요새 독 기운을 몰아내는 데만 전념하셨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진무량의 몸 상태를 전해들은 연시우는 한참 동안 걱정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대주께서 쉬고 계시니, 나는 조금 뒤에 찾아뵙겠다.”
“그래도 대주께서 자력으로 독 기운을 몰아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너도 먼 길 오느라 지쳤을 텐데, 조금 쉬어 둬.”
연시우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뒤에 다시 몸을 돌려 진무량의 처소 밖으로 향했다.
그때 멍해있던 주백기가 위지운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왜 유 소저에게 거짓말을 한 거냐?”
위지운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주백기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그냥.”
“……그러니까, 그냥 왜?”
위지운은 주백기의 어깨에 손을 척하고 얹었다.
“이 형님께서 진리를 하나 알려 줄까?”
“……?”
“인생을 즐기려면 생각을 버려.”
위지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주백기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진무량이 위독하다고 했을 때 유서하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상상했다. 그러자 절로 위지운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그러졌다.
“큭큭큭. 기대되네.”
* * *
진무량은 두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마치 푹신푹신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이 기묘한 감각은 현실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므로.
이윽고 진무량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피에 물든 자신의 손이었다.
두꺼운 흑색 갑옷을 새빨갛게 적셨음에도 피는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끈적이는 역겨운 감촉과 더불어 비릿한 혈향과 함께.
좌우로 시선을 옮겨 보아도 살아 있는 생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끔찍하게 도륙된 수천 구가 넘는 시체뿐.
‘그다지 낯선 광경은 아니군.’
패자는 땅바닥에 쓰러져 흙으로 사라지고, 승자는 모든 영광을 얻는 곳이 바로 강호다.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베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가는 상대의 검이 먼저 자신의 심장을 꿰뚫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연명하다 보니 어느덧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멸천대원들로 가득했다.
허무로 가득했던 삶에서 멸천대는 처음으로 함께하고 싶은 존재였다.
허무한 죽음을 막기 위해 멸천대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고, 함께 사지를 헤쳐 나갈수록 그 유대는 더욱 굳건해졌다.
허나 강호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강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런 자들에게 이기는 방법은 상대보다 더 사악해지는 것이었다.
나쁜 놈을 이기는 건 언제나 더 나쁜 놈이니까.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사로잡은 적을 무참하게 고문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적들은 모조리 매장했다.
한 명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수천 명의 희생이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친히 선두에 서서 수천의 적을 죽일 것이다.
그게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니까.
천하는 무림공적이라고 비난했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무림공적이라는 사실을 이용했다. 소문을 더욱 과장되게 부풀려 적을 겁먹게 하는 용도로 썼으니까.
언제나 굳건했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최근이었다. 정확히는 적무혁과 감천기를 만난 뒤였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다른 점이라곤 감천기는 아이들의 목숨을, 적무혁은 동료들을 버렸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건가.’
적어도 적무혁과 감천기 같은 인간들과는 다르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은 똑같았으니까.
두 사람을 보고 분노를 느꼈으나,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끝없이 성찰을 하다 보니 곧 자신이 꿈을 통해 과거를 보는 이유를 깨닫게 해 주었다.
‘무의식 속에 감춰진 죄책감이 끊임없이 과거의 나를 보여 주는 것이었구나.’
꿈속에 나왔던 과거의 일들을 겪었을 때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고 여겼으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과거의 순간들이 꿈속에 나오는 걸로 보아, 그 당시 짊어지기 버거울 정도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그 감정을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꿈에서 깰 때마다 척추가 뇌를 뚫고 올라가는 듯한 그 끔찍한 두통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받아들일수록 진무량의 고뇌는 점점 더 깊어졌다.
생각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갈 때, 갑자기 진무량의 귓가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서럽게도 우는지, 아무리 무시하려 애써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그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이끌려 진무량은 꿈속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뜬 진무량이 목격한 것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서하였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럽게 울어?”
유서하는 눈물을 훔쳐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흑흑. 정신이 들어요? 몸은 좀 어때요? 지금 위독한 상태라면서요?”
진무량은 단번에 유서하가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또한 오해의 원인이 누구 때문인지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멸천대 내에서 유서하에게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놈이라곤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위지운이 뭐라고 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이에요? 그럼 안 죽는 거죠?”
“그래. 널 두고는 절대 안 죽을 테니까, 그만 울어.”
유서하는 진무량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이성이 돌아왔다.
그러자 차츰 지금 자신의 어떤 몰골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하도 울어서 눈덩이는 퉁퉁 부어 있었고, 코와 볼은 새빨갰다. 또한 끝없이 넘쳐흐르던 눈물은 말라서 피부에 달라붙었으니, 얼마나 추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훤히 연상됐다.
유서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잠깐 나가 볼게요. 왜 이런 거짓말을 했는지 따져야겠어요.”
진무량은 돌아서려 하는 유서하의 손목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아무데도 못 가.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 쉽게 보내 줄 수는 없지.”
유서하는 오랜만에 만난 진무량에게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좀…….”
“질질 짜는 것들은 질색인데, 넌 아니야. 넌 우는 얼굴도 예뻐.”
상체를 일으킨 진무량은 유서하에게 다가가 아직 눈가에 마르지 않은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까 다른 놈 앞에선 절대 울지 마. 그걸 본 놈이 있으면 눈알을 확…….”
배시시 웃는 유서하의 모습을 본 진무량은 말을 멈췄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요.”
지척의 거리에서 진무량과 눈을 맞추며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멍하니 유서하를 바라보던 진무량은 유서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유서하는 균형을 잃고 진무량이 누워있는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엉겁결에 진무량과 같은 침대에 눕게 된 유서하는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이게 뭐하는 거예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줘.”
안절부절 못하던 유서하는 곧 옆에 누운 진무량의 몸에서 나는 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몸에서 불을 때기라도 하는 듯, 열이 끓어올라 진무량의 몸은 뜨거웠다.
실제로 진무량은 체내의 남은 독 기운의 통증과 악몽으로 인해 요 며칠 제대로 수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진무량이 나직이 속삭였다.
“네가 옆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아. 펑펑 울 정도로 내가 아픈 게 슬프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유서하는 제대로 아픈 내색도 하지 못하는 진무량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이내 유서하는 옆에 누운 진무량의 어개를 감싸 안았다.
진무량은 예상외의 유서하의 행동에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유서하는 감싸 안은 진무량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분명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했죠?”
“헛된 소리를 지껄인 내 입을 꿰매 버리고 싶군. 그 약속은 취소하는 걸로…….”
“환자는 얌전히 잠이나 자요.”
깊은 탄식과 함께 체념한 진무량은 다시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아무리 고민해도 찾을 수 없던 해답을 현실에서 찾게 되었다.
감천기나 적무혁의 행동에는 최소한의 의(義)도 없었다. 허나 그들과 달리 진무량은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을 찾아냈다.
유서하를 실망시키지 않고, 언제나 그녀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것.
남들이 사소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자 했을 때 진무량이 처음으로 변하고자 다짐한 뜻이었다.
눈을 감은 채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그거 알아? 내가 힘들 땐 언제나 네가 내 옆에 있어.”
그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는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곤 서툰 말솜씨로라도 진심을 전하는 것뿐.
“고맙다. 항상 내 곁에 있어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