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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125화 (125/143)

125화. 독공 (1)

2018.06.14.

멸천대의 지휘를 위지운에게 맡긴 뒤 홀로 떨어져 나온 진무량은 익숙하게 독룡각 내부를 거닐었다.

매복해 있던 불귀대원들이 불시에 덤벼들었으나, 진무량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방해하는 적을 물리치면서 마침내 진무량의 발길이 닿은 곳은, 한 줌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하 암실이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어둠이 짙게 깔린 주변을 경계하며 걷던 진무량에게 불쑥 음산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용케도 잘 찾아왔군.”

아무 기척 없이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당황할 법도 했으나, 진무량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독기가 하도 진동을 해 대서 말이지. 이런 역겨운 독기를 풍길 수 있는 건 천하에 너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나? 감천기.”

그 말대로 곧 어둠 속에서 감천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천기 또한 여유로이 옷깃을 정돈하며 대답했다.

“혹시나 자네가 길을 헤맬까 걱정했는데 잘 됐군. 어쨌든 내 실험실에 온 걸 환영하네.”

빛이라곤 한 줌도 들어오지 않게 철저히 고립된 실내는 절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진무량이 입을 열었다.

“너 같은 놈이 처박혀 지내기는 안성맞춤인 곳이네. 그보다 내가 여기 오길 기다린 것 같은 말투군.”

“바로 보았네. 정확히는 내가 자네를 이곳으로 유도한 게지. 그동안 내 뜻대로 움직이느라 고생 많았네.”

진무량이 여도강 일파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감천기는 가장 먼저 진무량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여도강 일파보다도 진무량에게 주목한 것은 변수를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여도강을 따르는 세력들의 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으나, 독룡각과 마교에 남아 있는 고수들에 비한다면 모자란 수준이었다.

전황을 뒤집을 만한 가능성을 지닌 이는 역시 진무량이었고, 그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감천기는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로 독룡각으로 통하는 모든 요충지를 철저하게 수비했다.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비하는 시늉에 집중했다.

넓은 지역을 방어하려 할수록 허점은 생겨날 수밖에 없는 법. 완벽한 수비의 조건은 억지로 넓은 범위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공격해 올 곳을 미리 예측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원하는 장소로 상대를 유도하여 집중된 전력으로 단숨에 적을 잡아먹는 것이다.

실제로 독룡각을 치기 위해 진무량과 여도강이 선택한 장소들은, 모두 감천기가 의도적으로 방비를 허술하게 해 둔 곳들이었다.

여도강은 정예 독룡각의 고수들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성가신 진무량은 독룡각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여 확실하게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감천기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감천기는 습관처럼 기침하며 말을 꺼냈다.

“콜록콜록. 실에 묶인 인형처럼 내 계획대로 움직이는 자네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퍽이나 재미있었어.”

붕대로 감긴 감천기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진무량은 어렵지 않게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과연 정말 내가 유인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의기양양한 감천기의 모습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진무량은 짙은 비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네가 내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했다니, 내 답례로 여기서 자네 목을 날려 확실하게 패배를 인정하게 해줘야겠군.”

이내 감천기는 품속에서 비도를 꺼내들었다. 폭이 좁고 여타의 단도보다 조금 더 긴 검신을 가진 두 개의 비도는 감천기의 독문무기인 천일혈(天日血)이었다.

천일혈은 검 끝이 예리하지 않았고, 특별히 멀리 날아가지도 않았다. 천일혈만의 특별한 점은 검날에 발라진 극독이었다.

쇠조차 쉽게 녹여 버리는 감천기의 극독을 바르고도 그 형체가 변하지 않는 무기는 천하에 오직 천일혈뿐이었다.

양손으로 천일혈은 굳게 쥔 감천기는 순식간에 진무량과 쇄도했다.

그 즉시 진무량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는 염옥창을 휘둘러, 접근하는 감천기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우선은 섣불리 공격하기보다 상대에 대해 파악할 심산이었다.

감천기 또한 진무량과 생각이 같았다. 하여 두 사람 모두 가볍고 빠른 공격의 중점을 둔 초식을 펼쳤다.

다만 서로의 무공 수준이 워낙 뛰어난지라, 단순한 탐색전임에도 불구하고 염옥창과 천일혈은 불꽃이 튈 정도로 격렬하게 부딪쳐 갔다.

서로 물러나지 않고 팽팽히 겨루던 두 사람의 공방은 점차 진무량 쪽으로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연신 감천기가 접근을 시도할 때마다 진무량이 교묘하게 뿌리치는 것이 원인이었다. 결국 길이가 짧은 파일혼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염옥창은 다양한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뒤이어 진무량은 스스로 다가가 감천기와 거리를 좁혔다. 감천기는 여태까지와 완전히 다른 진무량의 갑작스런 동작에 맞서기보다는 후퇴를 선택했다.

감천기가 스스로 거리를 내어주자, 진무량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염옥창의 내력을 집중시켰다.

그에 따라 염옥창의 창끝이 검게 불타오르면서 펼쳐진 초식은 천공포였다.

콰과과광!

내리친 염옥창의 궤적에 따라 쏘아진 천공포는 대지를 가르면서 뻗어나갔다. 허나 감천기가 잽싼 신법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천공포는 지하 암실 석벽에 부딪쳤다.

어마어마한 위력의 천공포를 눈앞에서 보고도 감천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네의 무공 수준은 소문 이상인 듯하군.”

“그래서 지금 스스로 내 앞에 나선 걸 후회라도 하고 있나?”

“설마 그럴 리가. 자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여 잠시 어울려 준 것뿐이네. 아무래도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듯하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감천기는 천일혈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는 양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펼쳐진 손바닥에서부터 짙은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감천기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느낀 진무량은 곧바로 추격에 나서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던 감천기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새 지하 석실은 감천기의 손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온 짙은 회색 연기로 가득 차 버렸기에, 육안으로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들려오는 감천기의 목소리.

“내가 자네를 여기로 유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이제부터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여기까지 찾아온 자네의 오만한 판단을 후회하게 될 걸세.”

감천기가 일평생 심혈을 기울여 제조한 극독들을 모두 모아 놓은 장소가 바로 지하석실이었다. 그리고 감천기는 자신이 독공을 펼칠 때 그 극상의 독들이 일제히 반응하도록 준비해 두었다.

즉, 지금 감천기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회색 연기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극독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진무량은 임시방편으로 소매를 입가에 갖다 대고 호흡을 제한했다. 그와 동시에 내공을 끌어올려 독 기운을 억제하려 했으나, 곧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실험실에 발을 들인 이상, 천하의 그 누구라 해도 살아 돌아갈 수 없지. 직접 독을 제조하여 내성이 생기지 않고서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극독들을 모두 억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신경독은 인체의 오감을 흐리게 할 것이고, 마비독으로 인해 점차 몸이 둔해질 터. 그리고 끝내는 한 줌의 내공조차 운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자연스레 독 기운을 다스리지 못할 테고, 결국 독에 중독되어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진무량을 유유히 지켜보면 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극상의 독들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독은 얼마 전에 특별히 제조한 무혼기연사(無魂氣煙死)였다.

무혼기연사에 중독된 자는 생에 가장 절망스러웠던 순간으로 돌아가 그때를 경험하게 된다.

간혹 무인들이 독을 극복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 바로 강한 정신력이다. 무혼기연사는 바로 그 정신력을 약하게 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독에 저항하여 살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끊어 버리면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극독.

짙은 연기 속에 숨어 진무량을 지켜보던 감천기가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그대의 최후는 내 여유로이 지켜봐 주지.”

무혼기연사의 중독된 진무량이 과거로 돌아가 환각을 보고 있는 시점은 혈마옥에 갇히기 얼마 전이었다.

진무량이 그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던 이유는, 눈앞에서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는 유월천 때문이었다.

채챙!

파괴적인 염옥창에 대항하는 유월천의 부드러운 검.

눈앞에서 펼쳐지는 유월천과의 치열했던 접전은, 실제로 겪었던 것과 완벽하리만큼 똑같았다.

‘감천기의 독에 중독되어 헛것이 보이는 건가.’

꿈을 통해 과거를 봐왔던 진무량에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유월천은 평소 느긋한 모습과 정반대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진무량은 문득 짜증이 일었다.

‘놈이 다 죽어 가고 있을 때 주먹이라도 한 방 시원하게 먹여 줬어야 했는데.’

점차 몸에 힘이 빠지면서 유월천의 검을 모두 막아내지 못하게 됐고, 자연히 불타오르듯 거셌던 염옥창의 기세도 사그라졌다.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현실과 똑같은 감각 탓에, 진무량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과거의 순간에 저절로 몰입되었다.

그리고 점차 그 당시 느꼈던 감정과 생각까지 떠오르기에 이르렀다.

점차 자신의 몸놀림이 둔해진 이유는 수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염옥창의 기세가 평소보다 날카롭지 않았던 것 또한 비천검문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과도하게 내공을 소모한 탓이 아니었다.

맞서 싸운 유월천은 실로 강했으나, 단 한 순간도 그의 검에 굴복한 적은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보니 이제야 패한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저버렸다.

유월천과 맞서기 훨씬 전부터 생을 포기한 상태였다.

연일 치열한 싸움을 거듭해 온 육체는 지쳤고, 전장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느꼈던 쾌락도 어느샌가 지루해졌다.

늘 목숨을 내던지며 살아온 인생에 죽음은 늘 곁에 있는 존재였기에, 그다지 낯설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지친 몸이 좀 더 편해지고 싶었고, 여한 없이 창을 휘둘렀으니 만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생을 포기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 자신의 곁에는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존재가 곁에 있다.

미치도록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여인이 있다. 또한 홀로 남겨졌을 때 그녀가 느낄 비통함을 알기에, 포기 따윈 생각할 수조차 없다.

허무로 가득했던 생에서 유서하는 처음으로 살고자 결심한 의지였다.

역설적이게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기 위해 제조된 무혼기연사의 용도와는 반대로, 진무량은 가장 처참했던 과거에서 굳건한 생의 의미를 되찾았다.

망설임이 사라진 진무량은 환각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단숨에 폭발적인 마공과 정심한 내공을 동시에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점차 넘쳐나는 황금빛 기운!

진무량의 신형에서 넘쳐 나오기 시작한 그 기운은 감천기가 내뿜는 독공의 회색 연기를 모두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황금빛 기운이 찬란하게 빛났다.

‘용형십삼식 십일식 금린탈혼창!’

정과 마의 기운이 집약된 황금빛 기운은 사방으로 쏘아져 지하암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지하에 위치한 감천기의 실험실은 결국 진무량의 강맹한 기운을 견뎌 내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구궁!

지하의 암실이 붕괴면서 미친 듯이 대지가 요동쳤다.

천지가 진동하는 소란스런 와중에 감천기는 가까스로 암실을 탈출했다. 떨어져 내리는 흙에 파묻혔다가 빠져나온 그는 흉내 연신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콜록! 이 미친 자식이, 같이 생매장이라도 당할 생각이었더냐!”

감천기의 외침과 달리, 황금빛 기운을 두른 진무량은 무너져 내린 흙더비 속에서도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그럴 리가. 단지 너 같은 놈과 어두컴컴한 곳에 있으려니 역겨워서 참을 수 없었을 뿐이야.”

무너진 지하 석실을 둘러보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겸사겸사 네놈의 같잖은 함정도 깨 버린 셈이군.”

감천기는 그야말로 가슴속에 천불이 나는 심정을 느껴야 했다.

실험실은 만년한철을 포함하여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재료들로 특별히 지어진 곳이었다. 그런 실험실이 이토록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진무량이 실험실을 무너뜨린 탓에, 이곳에 보관해 두었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최상의 극독들도 같이 묻혀 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구할 수조차 없는 재료들과 독을 배합하는 방법이 적힌 서책들까지 소실되었을 터. 그 손해는 이루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네놈이 감히……!”

“아끼는 독을 모두 잃었으니 열 좀 받겠군. 어차피 아이들을 잡아 변태적인 실험이나 해서 만든 것들일 텐데,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도 좋겠지.”

감천기가 독을 실험하기 위해 살아있는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소문은 마교에서도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어차피 길바닥에 뒈질 아이들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나 살았겠지. 그런 쓰레기들이 내 실험을 통해 훌륭한 독을 제조하는 데 참여했으니, 오히려 영광이 아닌가.”

감천기의 주장에 진무량은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렇게까지 버러지 같은 놈인 줄은 몰랐군.”

“어디서 깨끗한 척 위선을 떠는가. 네놈의 창은 피가 묻지 않았더냐?”

“냄새 나니까 그 입 닥쳐.”

검을 잡는 이유는 다양하다. 의협심으로 인해서 혹은 명예를 드높이거나, 복수를 위해서 일수도 있다.

다만 어떤 이유든 간에, 타인의 피를 묻히는 순간 스스로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는 강호에서 검을 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이었다.

허나 감천기에게 희생당한 어린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강호와는 아무 관련 없는 힘없는 존재일 뿐이니까.

이런 기본적인 차이조차 알지 못하는 감천기와 더 이상 나눌 말은 없었다.

“뇌수부터 썩어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 무지한 채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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