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대결 (4)
2018.06.10.
여도강 일파는 독룡각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전방위에서 동시에 공격을 퍼부었다.
일부러 소수로 인원을 나눠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 틈에 여도강 본인이 이끄는 주력이 독룡각을 들이쳐 단숨에 감천기의 목을 취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여도강은 남쪽 소로를 기습하여 근방을 지키던 구중련 무리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더 이상 구중련의 무리들이 보이지 않자, 참마검 유안은 근처에 있던 여도강을 찾아가 말을 걸었다.
“여기는 얼추 정리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 독룡각으로 향하시지요.”
유안의 의견에 동의하려던 찰나, 여도강은 다수의 인기척이 몰려들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건 좀 힘들 것 같소.”
이내 유안 역시 여도강이 느낀 인기척을 똑같이 감지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언덕 끝자락으로 향했다.
아래를 내려다본 여도강의 두 눈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의 모습이 보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해진 의복을 입고 살기를 풀풀 풍겨 대는 독룡각원들을 선두로 마교의 고수들이 합쳐졌음이 틀림없었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적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여도강은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정말 엄청난 숫자군.”
허나 그 숫자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몰려드는 적들의 기도를 통해 무공 수준을 가늠했을 때, 만만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들은 못해도 일류 이상이었고, 절정을 뛰어넘는 고수들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유안은 저도 모르게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실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꽝을 뽑은 것 같습니다.”
몰려드는 독룡각원들과 마교의 고수들은 감천기의 주력임이 확실했다.
즉, 감천기는 전력을 다해 여도강 일파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당장 이곳을 찾은 고수들 정도면, 마교를 장악한 구중련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모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독룡각의 방비는 턱없이 약해질 터.
몰려드는 독룡각의 고수들을 내려보며 여도강이 대답했다.
“저들을 감천기가 있는 독룡각으로 끌고 가는 건 하책인 듯하오. 감천기의 목은 진무량에게 맡기고, 우리는 놈들을 확실히 이곳에 붙잡아 둬야겠소.”
여도강의 말대로, 독룡각을 지키는 건 불귀대원들을 통솔하는 소천광과 최소한의 방비뿐이었다. 즉, 감천기를 도모하기에는 멸천대가 최적인 것이었다.
여도강은 한순간에 전체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유안은 속으로 목숨을 걸 각오를 다졌다.
“고전은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마교를 되찾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 줄 좋은 기회라고 여기지요.”
대답을 마친 후 여도강은 검을 고쳐 쥐고는 가장 먼저 언덕의 비탈길을 뛰어 내려갔다.
뒤이어 유안을 비롯한 여도강 일파가 일제히 비탈길을 내려가 독룡각원들에게 나아갔다.
두 세력 모두 가장 많은 인원을 투입한 대규모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 * *
연이은 위지운의 방해로 인해 소천광은 진무량의 기척을 놓쳐 버렸다.
위지운을 달고 진무량을 추격할 수 없었기에, 소천광은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불귀대원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진무량을 쫓아라. 절대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당연히 위지운은 불귀대원들이 방해하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위지운이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멸천대는 흩어지는 불귀대를 쫓았다.
위지운은 오감을 날카롭게 곧추세우며 소천광을 떠보았다.
“나를 피해 대주를 쫓는 건 불가능하지. 그 사실을 아는 걸 보니, 아예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가 봐.”
“시끄러운 놈이군.”
짧게 대답을 마친 소천광은 화살통에 있던 수십 개의 화살들을 모두 머리 위로 던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화살들은 소천광의 내력으로 인해 공중에 뜬 상태로 멈췄다.
이윽고 허공에 멈춰 있던 화살들이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했다.
피이이이잉!
휘몰아치는 태풍처럼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 화살들은 일제히 위지운을 향해 뻗어 나갔다.
위지운은 몸을 뒤로 날리면서 쇄검으로 쏘아진 화살들을 쳐냈다. 황급히 움직이는 중임에도 한결같이 입은 쉬지 않았다.
“말주변이 없는 남자는 인기가 없는 법이라고.”
소천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위지운을 가리켰다.
‘선풍시.’
튕겨 나간 화살들은 일순간 제자리에 멈추더니, 방향을 바꿔 다시 위지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변화에 당황할 법도 했으나, 위지운은 특유의 민첩한 동작으로 몸을 회전시켜 화살을 비껴 냈다.
선풍시를 피해 급히 몸을 날리느라, 위지운은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천광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화살 세 개를 집어서 낙영신궁의 시위에 걸었다.
‘단선삼시.’
위지운은 착지와 동시에 상체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바짝 엎드렸다. 그러고는 몸을 튕기면서 그 힘을 이용해 소천광을 향해 달려나갔다.
당연히 위지운이 나아가는 방향에는 정면에서 무서운 속도로 단선삼시가 날아오는 중이었다.
위지운이 화살을 향해 몸을 던진 이유는 암혼인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암혼인으로 인해, 찰나의 순간 화살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궤도를 확인한 위지운은 고개를 살짝 비트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단선삼시를 피해 내고는 그대로 소천광에게 파고들었다.
“이건 피하지 못할걸.”
완벽하게 거리를 좁힌 위지운은 단숨에 일격을 찔러 넣어 소천광의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다.
허나 그때 위지운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허공섭물로 화살을 띄운 뒤, 접근한 상대를 역으로 궁지로 몰아넣는 소천광의 절기, 낙뢰시(落雷矢)였다.
위지운은 어쩔 수 없이 출수한 쇄검을 거둬들이면서 쏟아지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쳐냈다..
간신히 낙뢰시를 쳐낸 위지운이 다시 소천광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가 낙영신궁 시위의 화살을 걸고 있는 상태였다.
‘아뿔싸.’
낙뢰시를 쳐내는 데 정신이 쏠려 순간적으로 소천광의 움직임을 놓쳤다. 자세가 무너진 터라 화살을 피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파천괴시.’
소천광은 무정하게 팽팽히 당겨진 시위를 놓았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파천괴시는 굳은 땅거죽마저 물결처럼 갈라버리면서 위지운을 향해 뻗어 나갔다.
챙!
위지운은 간신히 쇄검으로 파천괴시를 튕겨냈으나,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리느라 심각한 내상을 입어야만 했다.
당장 엉망진창으로 뒤틀린 내기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위지운은 임시방편으로 근처에 있는 바위 뒤로 몸을 날렸다.
소천광은 순순히 위지운을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곧바로 허공에 떠 있던 소천광의 선풍시가 위지운이 몸을 숨긴 바위로 쏘아졌다.
콰과광!
선풍시에 적중당한 바위는 단숨에 조각조각으로 부서졌다.
허나 바위 근처에서 위지운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소천광이 입을 열었다.
“비겁하게 도망칠 셈이냐.”
위지운은 독룡각 담벼락 뒤에 숨어 소천광의 말을 듣는 중이었다.
위지운은 바위 뒤로 몸을 숨겨 소천광의 시야를 벗어난 순간, 지형지물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기척을 지우는 은신술인 혼돈밀을 펼쳤다.
그리고 선풍시가 바위를 부수기 직전에 반대쪽 담벼락으로 몸을 날려 소천광의 감시에서 벗어난 것이다.
혼돈밀은 정점의 살수만이 익힐 수 있는 최고의 은신술이었다. 일전의 비무에서 진무량조차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허나 위지운은 이대로 숨어서 목숨을 연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소천광의 화살은 진무량과 멸천대원들에게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할까.’
소천광의 공격 방식은 단순한 편이었다. 먼저 허공에 떠 있는 화살들로 움직임을 둔하게 한 뒤에, 낙영신궁으로 결정타를 노리는 식이었다.
낙영신궁으로 직접 쏜 화살의 파괴력은 허공에 떠다니는 화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막아내기만 해도 심각한 내상을 입을 정도이니, 낙영신궁으로 쏜 화살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소천광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활을 쓰는 상대를 제압하려면 우선 접근을 해야 하는데, 가까이 붙으면 천뢰시가 쏟아지니 무턱대고 다가갈 수가 없었다.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소천광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초식은 단 하나, 살수로서의 정수가 모두 담긴 일격필살의 절초 무상검밖에 없었다.
허나 무턱대고 무상검을 펼쳤다가 진무량과 비무 때처럼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소천광이 방심한 순간을 노려 일격의 끝을 내야 했다.
위지운은 발검술인 무상검을 펼치기 위해 조심히 쇄검을 검집에 넣었다.
소천광은 섣불리 진무량을 찾기보다 성가신 위지운을 처리하는 걸 우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천광은 숨어 있는 기척을 찾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한때 강호에서 손꼽히는 살수 조직 혈월회의 일원이었던 그다.
이미 과거 최고의 살수로 꼽혔던 혈월회주를 훌쩍 뛰어넘는 경지에 다다른 소천광이니, 은신술을 간파하는 능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소천광은 천천히 눈을 감고 대기 그 자체를 받아들였다.
위지운은 단순히 기척을 쫓는다고 찾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허나 제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이라 하더라도 공기마저 속일 수는 없는 법.
온전히 대기의 기운을 느끼다 보면 반드시 이질적인 기척을 느낄 수 있을 터.
그리고 마침내 소천광은 담벼락 뒤에서 수상한 기운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거기 숨어 있었나?”
소천광은 단숨에 위지운이 숨어 있는 담벼락을 향해 선풍시를 쏘았다.
선풍시는 두꺼운 담벼락마저도 간단하게 무너뜨렸고, 거기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위지운이 튀어나왔다.
소천광은 곧바로 손끝으로 위지운을 가리켰다.
“놓치지 않는다.”
수십 발의 선풍시가 단숨에 위지운을 향해 쇄도해 갔다.
위지운은 잽싼 몸놀림으로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냈다. 허나 기묘한 선풍시의 움직임을 모두 간파할 수는 없었고, 결국 화살이 허리 깊숙이 박혔다.
결국 위지운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소천광은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여 곧바로 화살이 걸린 낙영신궁의 시위를 당겼다.
이때 소천광은 불행히도 위지운의 숨겨 둔 한 수를 읽지 못했다.
위지운이 엎어지는 척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소천광은 위지운이 짓고 있는 회심의 미소를 보지 못했으니까.
무영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먼저 방심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적이 가장 방심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역설적이게도, 승부를 마무리할 생각으로 일격을 날릴 때였다.
허리를 감싼 위지운의 손은 곧바로 쇄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무영검을 펼치는 순간만은 숙련된 자신의 감각보다도 몸이 더 빨리 움직인다.
위지운은 그 순간이 마치 시간이 멈춰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
위지운은 자연스레 무영검의 구결이 떠올랐다.
진정한 쾌에는 힘도 변화도 필요치 않으리니, 무영검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무영검에 당한 자는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리라.
서걱!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점을 도려내는 소리가 들렸으나, 소천광은 갑자기 사라진 위지운을 찾기 바빴다.
뒤이어 가슴에서 흐른 피로 인해 축축한 촉각이 느껴졌고, 두 눈으로 그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 위지운의 검격에 당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게냐?”
위지운은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소천광의 물음에 대답했다.
“뭐긴 뭐야, 네가 나한테 당한 거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걸 보니, 부상 때문에 내 검이 얕게 들어갔나 보군.”
소천광은 본능적으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에서 손을 떼고, 억지로 화살이 걸린 낙영신궁의 시위를 당겼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내 손으로 직접 노군님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뜻은 가상하지만 무리다. 너는 이제 곧 죽을 거야.”
“내가 어찌 너 같은 놈 따위에게…….”
“너 혼자만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내게도 목숨 따윈 가볍게 던져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것들이 가득 있어.”
“…….”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맞서다 패한 것이니, 너무 원통해할 필요 없다. 너는 실로 강했다.”
곧 숨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느낀 소천광은 생에 끝에 남은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날 죽인 놈의 이름 정도는 알고 가야지.”
“멸천대의 삼 조장 위지운이다. 덕분에 한바탕 즐거웠어. 마지막은 내가 지켜봐 주마, 소천광.”
소천광은 숨이 끊어져 두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위지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