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19화 (119/143)

119화. 결심

2018.05.24.

여도강은 진무량과 헤어진 뒤부터 긴 시간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수없이 생각을 거듭해도 마교의 교주 직위는 여도강에게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단적으로 마교는 무림맹을 제외하곤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라 칭해지는 거대 세력. 필연적으로 마교의 교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게 된다.

현 마교의 교주인 담무흔은 전쟁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현재 강호는 크게 요동치는 중이었다.

선택 한 번으로 인해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갖는 자리가 바로 마교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여도강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고민들이 떠다녔다.

스스로 마교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만약 교주가 된다면 마교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상념들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수없이 많은 고민 중에서 명쾌한 해답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내 모든 걸 포기할까 하는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과거 천군위가 해 주었던 조언이 머릿속을 스쳤다.

ㅡ막연한 예상들은 모두 너의 결정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당장 다가올 내일이 두렵다면, 우선 네가 진정 하고자 하는 일부터 찾거라. 모든 해결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라.

오래 전부터 늘 고민이 한발 앞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했던 여도강을 걱정하여 천군위가 남긴 말이었다.

천군위의 깊은 속마음을 이해하고, 여도강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되짚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천군위의 대한 복수였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단순히 담무흔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학살당한 옛 동료들을 비롯하여, 마교가 입을 피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천하 패권을 쥐기 위한 야욕으로만 움직이는 구중련.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스스로 외면했던 본심을 알게 되었다. 진정 바라는 건 천군위의 복수를 비롯해, 구중련의 만행들을 모두 바로잡는 것.

그리고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 온 마교를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 뜻을 이뤄 주던 천군위는 없다. 이제부터 바라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남이 아닌, 스스로 직접 나서야만 했다.

나아가야 할 현실이 두렵다고 해서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감에서 도망치다 보면, 결국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결심을 내린 여도강은 마침내 칙칙한 어둠이 잔뜩 낀 방 안을 벗어났다.

밖으로 향한 여도강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하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경비를 서고 있던 수하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교에 심어 둔 첩자들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감천기가 급히 마교의 고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 감천기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입니다. 혹시라도…….”

여도강은 마교 무인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위치가 드러났을 수도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여도강은 현재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태껏 끈질긴 마교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대비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위치가 발각됐다 하더라도, 당장 마교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방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도강이 우려하는 바는 자신과 함께하는 세력들을 설득하고 뜻을 모으는 것이었다.

여도강의 동료들은 대부분 천군위의 복수가 목적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여도강 본인이 마교 교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교주가 되고자 하는 생각 자체를 거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로 인해 완전히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니 우선은 뜻을 합친 동료들에게 스스로가 교주의 재목임을 증명해야 했다.

동료들의 마음조차 얻지 못하고서, 어찌 교주란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을까.

마교의 교주는 수없이 많은 무인들을 거느리는 존재. 당연히 만인에게 먼저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곁에 있는 마교 무인을 향해 여도강이 말했다.

“긴밀히 회의를 열어야겠구나. 내 지금 서찰을 써 주마.”

“서찰은 어디로 전하면 되겠습니까?”

“나와 뜻을 합친 각 세력의 수장들을 모두 소집할 것이다.”

* * *

감천기가 내린 명령에 따라 맹사와 소천광은 독룡각 내부에 머물렀다.

같은 방에서 머물고 있던 두 사람에게 구중련의 연락책이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

“추격조가 여도강을 놓쳤다고 합니다. 현재 위치를 파악 중이지만, 제법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락책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맹사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하라더니, 추격에 실패했다는 게 말이 되냐?”

소천광은 불필요한 소리를 지껄이는 맹사를 흘깃 노려본 뒤에 연락책에게 물었다.

“독룡각주께서는 어떻게 대응한다고 하시던가?”

“우선 여도강를 놓친 곳에 추격조를 더 파견할 예정입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맹사는 혀를 차며 불평이 가득한 속내를 내보였다.

“쯧. 그러니까 놈에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는 여기서 대기하라는 뜻이잖아. 젠장, 지루한 건 딱 질색인데.”

맹사처럼 대놓고 투덜거리진 않았으나, 소천광 역시 기약 없이 독룡각에 남아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중련의 연락책은 두 사람에 파악한 소식을 한 가지 더 전했다.

“또 한 가지, 아직 확실치는 않은 정보지만, 여도강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멸천대의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연락책의 입에서 멸천대가 나온 순간, 무표정하던 소천광의 표정이 분노한 짐승처럼 사납게 변해 갔다.

맹사 또한 멸천대의 존재를 전해 듣자 흥미가 일었다.

“혹시 그럼 그곳에 진무량도 있는 것이냐?”

“지금 조사 중입니다. 다만 말했다시피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소천광은 살의가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맹사를 향해 말했다.

“진무량은 반드시 내가 직접 죽일 것이다. 쓸데없이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말을 걸기도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모습에 소천광과는 달리 맹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든지. 난 그런 괴물 같은 놈과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 나는 약한 놈을 괴롭히는 게 더 좋거든.”

그런 맹사를 뒤로하고, 소천광은 진무량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무림맹을 떠난 뒤부터 진무량의 행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위치를 놓쳐 버린 현 상태에서 진무량이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멸천대가 숨어 있는 곳일 터.

끈질기게 진무량을 추격하던 소천광은, 이번에야말로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 연락을 넣어 추격대에 불귀대를 합류시키도록 하겠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멸천대의 위치를 찾아내고, 파악하는 즉시 내게 알리거라.”

영사문과의 분쟁에서 적무혁을 잃고 큰 피해를 입은 불귀대는 현재 소천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중이었다.

불귀대는 무공 수준이 뛰어날 뿐 아니라 추적 실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불귀대가 멸천대를 찾는 데 협력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터.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드는 소천광과 달리, 맹사는 넓은 관점으로 현 상황을 살폈다.

‘어쩌면 진무량과 여도강은 이미 접선했을지도 모르겠군.’

여도강을 추적하던 중에 멸천대의 행방이 발견됐으니, 두 세력이 연합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진무량과 여도강은 현 마교를 위협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

그들이 정말 힘을 합쳤다면 분명히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맹사의 눈매가 살짝 휘면서 동시에 입술이 씰룩였다.

“이거 점점 흥미로워지는군.”

* * *

여도강과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하나둘씩 비선사로 모여들었다.

비선사를 중심으로는 사방으로 기문진이 넓게 펼쳐져 접근을 차단했으며, 정교한 기관까지 갖춰져 그야말로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마교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각지에 마련해 둔 은신처 중에서도 가장 특별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비선사였다.

신중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여도강이 비선사로 모이게 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하여 여도강의 서찰을 받고 모인 이들은 범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이미 짐작했다.

약속된 인원이 모두 도착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도강이 비선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도강은 먼저 포권을 하며 한자리에 모인 마교의 고수들을 향해 예를 갖췄다.

“긴급한 연락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 주어 고맙소.”

여도강은 모여 있는 인사들을 차례차례 살폈다.

마교에서 가장 긴 경력을 지닌 원로들부터 내로라하는 마교의 고수들까지 모두 합치니 드넓은 비선사가 가득 찼다.

오랜 시간 마교의 장로를 지냈던 참마검(斬魔劍) 유안이 모인 사람들을 대표해서 여도강에게 질문했다.

“그럼 이제 우리들을 한자리로 모이게 한 이유를 말해 주시오.”

현재 비선사의 모인 이들은 마교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인원이 많아질수록 겉으로 드러나기 쉬우니, 한자리에 오래 모여 있는 건 분명 위험을 동반할 수 있는 행위였다.

여도강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담무흔은 독룡각주 감천기를 마교에 남기고 무림맹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떠났소. 즉, 지금이야말로 거사를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라는 뜻이오.”

비선사 내부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구중련의 반기를 든 순간부터 늘 마음 한편에는 마교와 정면 승부를 벌이는 순간을 그려 왔다.

막상 그 순간이 찾아오니, 대부분 마교의 고수들은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지거나 긴장된 심정을 다스렸다.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장내에 다시 한번 여도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만 지금 마교를 치는 건 어디까지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오. 담무흔을 쓰러뜨리지 않는 한 구중련의 손아귀에서 마교를 되찾을 수는 없소.”

마교의 고수들은 모두 여도강의 말에 수긍했다.

담무흔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마교를 장악한 구중련의 세력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유안은 길게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담무흔을 도모할 계획을 정한 것이오?”

“그렇소. 우선 독룡각주 감천기를 쓰러뜨려 마교를 점령할 것이오.”

여도강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직접, 마교의 임시 교주가 되어 담무흔과 맞설 생각이오.”

웅성웅성―.

생각지 못한 여도강의 발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어수선한 반응은 여도강이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자신 또한 쉽사리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경험이 있기에, 이곳에 모인 이들이 얼마나 큰 혼란을 겪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도강은 입구 쪽에서 대기 중이던 수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내 여도강의 눈짓을 받은 사내는 밖으로 나가 거대한 수레를 끌고, 다시 비선사 내부로 들어왔다.

좌중에 시선이 일제히 의문의 수레로 향했다. 덩치 큰 거한 세 사람도 너끈히 들어갈 거대한 수레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가득했다.

여도강이 말했다.

“이 문서들에는 향후 더 나은 마교를 만들기 위해 내가 생각한 방안들이 적혀 있소. 이것이 곧 나의 각오요.”

교주가 되고자 결심했을 때부터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교가 나아갈 올바른 길에 대해 강구했다.

문서 속에는 다양한 시도들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조항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여도강은 진심을 담은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나는 선대 교주님처럼 훌륭하지 않아 여러분을 이끌 능력이 부족하오. 그러니 모두 내게 힘을 보태 주시오.”

비선사의 모인 이들 중 절반은 여도강의 뜻에 동조했다.

그들은 제멋대로 날뛰는 구중련 무리들로 인해 마교가 망가지는 모습을 막연히 바라보기만 했던 시절에 여도강을 만나 구중련 타도에 뜻에 동조했다.

천군위에 대한 복수와 구중련의 타도를 위해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키운 자가 바로 여도강이었다.

실질적으로 구중련 타도 세력을 이끄는 것 또한 여도강이었기에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도강이 교주의 자리에 오르는 걸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았다. 대놓고 표현하진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여도강의 자질을 의심하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여도강 또한 자신의 자질을 의심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담무흔을 쓰러뜨리기 전까지 교주직은 임시일 뿐이오. 그 뒤에 마교를 이끌기에 더 적합한 자가 나타난다면 나는 지체 없이 교주직에서 물러날 것이오. 여기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맹세하오.”

“…….”

웅성이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때 참마검 유안이 말을 꺼냈다.

“저는 파운신검의 뜻에 따르겠소.”

유안을 시작으로 침묵하고 있던 마교 무인들이 연이어 여도강의 뜻에 찬성했다.

“나도 마찬가지요.”

“더 두고 봐야겠으나, 이 몸도 일단은 파운신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보오.”

마교의 고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도강의 뜻에 동조했다.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여도강이 손을 들어올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뜻은 모아진 걸로 알겠소. 그럼 이제부터 감천기를 쓰러뜨리는 데 집중해야 하오.”

사대신마인 감천기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감천기는 독에 관해서는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는 명성이 자자한 독공의 절대 고수.

비선사의 모인 고수들을 포함해서 구중련의 반기를 든 이들이 모두 모여도, 독룡각과 마교에 남아 있는 세력들과 비교한다면 모자란 것이 현실이었다.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해 여도강이 말했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이오. 다만, 지금 이곳에 오지는 않았으나 우리를 도와줄 천군만마의 아군이 있소.”

올바른 뜻을 지녔다고 승리하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 이기는 건 언제나 더 강한 쪽이니까.

그리고 여도강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강한 사내를 알고 있었다.

여도강이 곁에 있는 수하를 향해 명령했다.

“이제 서찰을 진무량에게 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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