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목적
2018.05.20.
진무량은 거동이 불편한 위지운을 주백기에게 맡기고, 자신을 찾아온 여도강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여월산 초입을 지키던 멸천대원들은 여도강 일행을 포위한 상태였다.
여도강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며 어떤 의중을 품고 있는지 몰랐기에, 멸천대원들은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멀리서 여도강의 모습을 확인한 진무량은 주변을 가득 메운 대원들을 향해 짧게 명령했다.
“모두 물러나라.”
진무량의 한마디에 대원들은 포위를 풀고, 여도강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여도강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무슨 용건으로 나를 찾아온 거지?”
여도강은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진무량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하기 위해 찾아왔소.”
그동안 보인 멸천대의 행적을 따져 봤을 때, 진무량이 구중련과 대립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허나 구중련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무량을 마냥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여 여도강은 은밀히 수하들을 풀어 멸천대를 감시해 왔다.
진정 진무량이 바라는 목적이 무엇인지, 과연 구중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상대인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감시만으로는 정확한 진무량의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결국 이렇게 몸소 진무량 앞에 나선 것이었다.
진무량은 여도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재밌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우선 조용한 곳으로 자리부터 옮기지.”
수하들을 모두 물린 진무량은 여도강과 함께 한참을 걸어 완전히 인적이 없는 곳에서 멈춰 섰다.
여도강은 먼저 말을 꺼낼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여 진무량이 먼저 말을 꺼냈다.
“구중련에 반기를 든 세력들을 모으고 있다지. 이젠 제법 규모도 커졌다고 들었어.”
여도강에게 모여든 마교의 세력들은 대부분 천군위를 따랐던 고수들이었다.
비록 천군위는 쓰러졌으나, 그를 따랐던 고수들의 충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천군위를 따랐던 수많은 마교의 고수들이 여도강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것이었다.
진무량은 여도강을 똑바로 마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힘을 모았으니 이제부터는 어쩔 생각이지?”
여도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진무량의 물음이야말로 근래 여도강이 가진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구중련과 일전을 겨루고 싶었지만, 결코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현재 구중련이 가진 힘이 너무도 막강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마교 세력들은 모두 담무흔에게 복종했다. 천군위의 복수를 위해 뭉친 고수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지만, 마교를 점령한 구중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여도강을 중심으로 뭉친 마교의 고수들은 현재 구중련의 세력에 비한다면 삼 할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구중련의 지독한 감시를 벗어나지 못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들이 늘어가는 실정이었다.
반면에 구중련은 모습을 감추고 있던 고수들까지 모두 규합하여 나날이 세력을 불려 가니, 이제는 구중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시국에 구중련 타도를 외치는 건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맞서 싸우자니 힘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여도강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 갔다.
여도강이 말했다.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시오. 그대의 목적은 무엇이오?”
“그야 당연히 하나밖에 없잖아. 구중련을 완전히 몰살시키는 것이다.”
여도강은 턱하고 말문이 막혔다.
현재 구중련은 천하에 패권을 거머쥘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세력이다.
헌데 어찌 저리도 담대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현 무림의 정세를 제대로 알고 내뱉는 말이오? 아니 어떻게…….”
진무량은 더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여도강의 말을 잘랐다.
“무림의 정세? 그 따위 것들은 모조리 하찮은 문제에 불과하지.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뿐이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진무량의 모습은 위풍당당함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함정에 빠진 천군위가 담무흔의 검에 쓰러진 그 당시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이성을 잃은 채 눈앞에 있는 구중련 놈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한참을 미친 듯이 날뛰다가 수십 명의 수하들이 나서서 한참을 말렸기에, 겨우 진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로는 허무하게 쓰러지는 대신에 구중련의 눈에서 벗어나 천군위의 복수를 하리라 다짐했다.
허나 그때와 달리 지금의 자신은 막강한 힘에 주눅이 들어, 구중련을 타도하겠노라 외치지도 못하는 겁쟁이로 변해 버렸다.
현실적인 문제를 핑계 삼아 도망치다 보니, 진정 원했던 일조차 망각하게 된 것이다.
허나 눈앞의 진무량은 달랐다. 그는 명백한 힘의 차이에 굴복하지 않고, 여전히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고 있었다.
그 같은 진무량의 모습은 마치 과거 천군위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때의 자신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마치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모습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던 여도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턱대고 구중련에게 덤비는 건 무모한 짓이오. 구중련을 무너뜨릴 계획은 세운 것이오?”
“당연하지. 무림맹과 사파가 힘을 합치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똑바로 여도강을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천하에서 구중련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기 위해서는 마교의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바로 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오?”
“마교의 주인을 바꿀 것이다.”
담무흔은 무림을 일통하기 위해서 마교를 이용했다. 그 사실을 조금만 다르게 해석해 보면, 구중련이 무림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마교의 힘을 필요하다는 뜻이다.
전쟁의 필수요소인 인력과 물자를 마교에게서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원이 완전히 끊긴다고 가정한다면?
제아무리 위세를 떨치고 있는 구중련이라 해도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구중련이 가진 힘에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야말로 진무량이 세운 계획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은 여도강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분명 기책임이 틀림없다.’
현재 담무흔은 몸소 마교의 고수들을 이끌고 무림맹과 맞서기 위해 떠났다.
즉, 지금이야말로 마교의 주인을 바꾸기 위한 최적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담무흔이 없는 틈을 타 마교 내부를 점령하여 뜻을 하나 모은다면, 임시로 새로운 마교의 교주를 세우는 것도 분명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여도강이 의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새로운 마교의 교주는 누구로 생각 중이시오? 그대가 직접 교주 자리에 오를 생각이오?”
“그건 불가능하지. 일시적으로 마교를 점령하더라도, 그 뒤에 구중련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마교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해. 그 일에는 내가 적임자가 아니야.”
사대신마로 군림했던 시절부터 마교의 원로들은 제멋대로 행동했던 진무량에게 반감을 가진 상태였다. 그런 진무량이 마교를 통치하고자 나선다면 당연히 큰 반발이 따를 터.
당장 구중련을 몰아내기 위해 움직이기도 촉박하거늘, 그런 분쟁들까지 처리할 여유는 없었다.
여도강이 의문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뭘 물어. 너밖에 없잖아.”
여도강은 구중련의 반기를 든 마교 세력들의 수장. 현재 여도강만큼 마교 무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사실을 접한 여도강은 곤혹스러워했다.
구중련과 맞서는 것과 향후 마교를 통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야말로 여도강이 가장 존경했던 천군위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으니,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침묵하고 있던 여도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게 시간을 좀 주시오.”
“알다시피 시간이 촉박해. 오늘 자정까지는 결정하도록 해. 내 계획에 동참한다면 그때부터는 같은 편으로서 최선을 다해 협력하도록 하지.”
* * *
재빨리 날갯짓을 하던 전서구가 독룡각 내부로 날아들었다.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서찰을 받은 무인은 독룡각의 주인인 감천기가 있는 지하 암실을 찾아갔다.
만년한철로 된 문을 열어젖히자, 컴컴한 지하 암실의 빛이 들어오면서 흐릿하게 내부가 보였다.
암실 속 광경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당장 구토를 할 정도로 역겨웠다.
선반에는 피가 마르지 않은 사람의 내장이 걸려 있었으며, 아직도 벌떡이는 장기들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상태였다.
독룡각의 무인이 감천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때 지하 암실 깊숙한 곳에서 다섯 살 정도 되는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에에에에엥!”
당장이라도 목이 터질 것처럼 처량한 아이의 울음소리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독룡각의 무인은 울음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해 다가갔다.
곧 널찍한 검은 천막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는데, 그 천막을 치우자 그 안에서 감천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천기는 안색이 새카맣게 변한 채 죽어 있는 사내아이의 시체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흐음……. 독의 배합이 잘못된 건가.”
자신이 독을 투약한 탓에 눈앞에서 어린 아이의 숨이 끊어졌거늘, 감천기의 관심은 오로지 독에 성분을 분석하는 것뿐이었다.
천군위가 마교의 주인이었을 때만 하더라도, 산 사람을 상대로 독을 실험하는 건 엄격히 금지하는 사항이었다.
허나 담무흔은 교주가 된 즉시 그 규제를 없애 버렸다.
하여 감천기는 버려진 아이들을 납치해서 자신이 배합한 여러 가지의 독을 실험할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독을 먹였을 때 그 반응이 빨리 나타나기 때문에, 감천기는 주로 어린아이들을 통해 독의 성분을 검사했다.
얼굴을 감싼 천을 살짝 내리며 감천기가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이 서찰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독룡각의 무인은 서찰을 감천기에게 내밀었다. 감천기는 느릿느릿하게 다가와 서찰을 받아 들었다.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감천기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제 막 새로운 독이 완성되려던 참인데, 귀찮게 되었구나.”
“무슨 일입니까?”
“여도강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이다. 여태까지 잘 숨어 다니던 놈이었거늘……. 어쨌든 성가시게 됐군.”
그는 새로운 독을 만드는 것 외에 모든 일들을 귀찮게 여겼다.
허나 무흔이 무림맹을 정벌하기 위해 떠나면서 감천기에게 마교를 맡겼기에, 평소처럼 암실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마교의 남은 놈들 중에서 쓸 만한 놈들을 불러 모아야겠군.’
기침을 내뱉으면서 감천기가 독룡각의 무인을 향해 명령했다.
“콜록콜록. 마교의 남은 자들 중 쓸 만한 놈들을 찾아볼 터이니 잠시 기다리거라. 준비가 되면 단숨에 여도강과 그 일파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볼일을 마친 감천기는 시신이 된 어린아이를 발로 툭툭 차면서 말을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냄새 나는 이 쓰레기부터 좀 치우도록 해.”
* * *
대부분 마교의 무인들은 담무흔을 따라 무림맹과 일전을 겨루기 위해 떠난 상태였기에, 현재 마교에는 남은 고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분에 마교에서 실력 있는 고수를 선별하는 일은 더욱 쉬웠지만.
감천기는 구중련의 반기를 든 세력들과 그 수장인 여도강을 치기 위해 두 명을 독룡각으로 불러들였다.
감천기의 부름을 받고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바로 맹사였다.
독룡각 대문에 도착한 맹사는 기지개를 쭉 펴면서 귀찮은 기색을 내보였다.
“급히 찾는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게만 하는 거야.”
맹사는 일부러 큰소리로 투덜거렸으나, 독룡각 대문을 지키는 무인들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입을 삐쭉 내민 채 맹사는 괜히 더 투덜거렸다.
그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에 바람이 불어와 맹사의 목덜미를 스쳐 갔다.
이내 익숙한 기척을 느낀 맹사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뭐야, 너도 심심해서 온 게냐?”
곧 맹사가 바라보는 곳에서 한 사내가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활을 등에 멘 그 사내는 한때 적무혁의 수하로 활약했던 소천광이었다.
소천광은 마치 감정이 빠져나가 버린 인간처럼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시끄럽다. 쓸데없이 내게 말 걸지 마라.”
적무혁이 숨을 거둔 영사문과 일전에서 소천광은 흑진방의 잔재세력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하여 소천광은 진무량과 겨룰 기회조차 없었을 뿐더러, 적무혁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극도로 분노한 소천광은 그 뒤로 계속해서 진무량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담무흔을 따라가지도 않고 마교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진무량을 쫓는 일에 몰두하느라 감천기의 부름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소천광은 어쩔 수 없이 독룡각을 찾아왔다.
맹사는 소천광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쳇. 까칠하긴.”
소천광과 맹사가 모두 모이자, 입구를 지키던 무인이 서둘러 독룡각 내부로 들어갔다.
이윽고 독룡각 내부에서 감천기가 걸어 나왔다.
감천기는 맹사와 소천광을 확인한 뒤에 썩은 이빨을 내보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잘 왔네. 두 사람 모두 안으로 들어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