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이유
2018.05.17.
위지운은 그동안 멸천대원들과 함께 머물렀던 곳으로 진무량을 안내했다.
세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은 버려진 절이었는데,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됐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낙후된 상태였다.
외견은 완전히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며, 내부 또한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지어 천장에서는 주먹만 한 크기의 쥐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절간 내부를 돌아보던 진무량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기서 지냈던 것이냐?”
진무량의 물음에 위지운이 대답했다.
“구중련의 눈을 피해 은신처를 옮기다가 이곳에 다다르게 되었소.”
진무량은 멸천대원들이 그동안 겪었던 고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원한을 품은 마교의 감시를 벗어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터.
다 쓰러져 가는 절에서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은, 그동안 멸천대원들이 겪었을 고생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리라.
진무량은 마음이 편치 못해 주변을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무량의 심정을 눈치챈 주백기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지내기에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이렇게 모인 너희들이 대견하다.”
민망한지 위지운이 나서 괜히 이죽거렸다.
“고작 이 정도 시련에 쓰러진다면 멸천대가 아닐 거요.”
진무량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인 뒤에 화제를 돌렸다.
“여도강 쪽과 연락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냐?”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할 생각에 잠시 망설이던 주백기가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여도강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습니다.”
진무량의 시선이 위지운을 향했다.
“네가 여도강이 보낸 수하와 만났다고 했지. 무슨 대화를 나눴느냐?”
“대화랄 것도 없었소. 갑자기 나타나 대주의 행방을 물었을 뿐이오. 그들의 의도가 뭔지 파악하지 못했기에, 대주가 마교를 떠났다는 사실만 전했소.”
“내가 무림맹에 있을 때였나?”
“그렇소.”
진무량은 먼저 접선해 온 여도강의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진무량의 고민이 길어지자, 주백기가 의견을 내놓았다.
“……제가 여도강의 위치를 찾아보겠습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는 듯, 위지운이 주백기의 뜻에 반박했다.
“그건 무리다. 우리가 놈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면 애초에 대주가 고민을 왜 하겠어?”
현재 여도강은 구중련의 뜻을 반대하는 마교 세력들의 수장이나 다름없다.
마교를 점령한 구중련의 입장에서 그런 여도강의 존재는 매우 거슬렸을 터. 실제로 담무흔이 직접 명령을 내려 여도강의 위치를 수색한 적도 있었다.
허나 번번이 구중련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구중련의 철두철미한 수색을 여도강은 보기 좋게 피해 간 것이었다.
거대 세력인 마교가 움직여도 실마리를 잡지 못한 여도강의 행방을, 소수의 멸천대가 움직여 찾아내는 것은 분명 무리였다.
또한 멸천대는 현재 구중련의 감시하에 있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수색활동을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진무량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위지운이 실망감이 역력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게 무슨 방법이오? 그러다가 그들이 다시 접선해 오지 않는다면 어찌할 생각이오?”
“나를 반드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여도강은 애초에 멸천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야. 즉, 여도강 쪽에서도 나와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흐음.”
주백기는 진무량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겨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여도강은 수하들을 통해 꾸준히 멸천대의 행방을 조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구태여 우리가 나서서 일을 꼬이게 할 필요가 없어. 답답하더라도 우선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옳은 생각이십니다.”
흔쾌히 대답하는 주백기와 달리 위지운은 생각에 잠긴 듯 표정이 굳어 갔다. 이내 위지운이 나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당장 급한 일은 없다는 뜻이군.”
위지운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진무량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위지운은 더없이 진지한 눈길로 진무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주께 비무를 신청하오.”
대화를 듣던 주백기가 짧은 한숨을 내신 뒤에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
위지운은 흘깃 주백기를 노려보고는 다시 진무량에게 시선을 옮겼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내 목표는 대주요. 내공도 되찾았고, 시간도 촉박하지 않으니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지 않소.”
유심히 위지운을 지켜보던 진무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심이군.”
위지운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진무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소.”
진무량은 가타부타 긴말 없이 벽에 걸쳐 두었던 염옥창을 집어 들었다.
“승부를 받아 주지. 밖으로 나와.”
진무량과 위지운은 여월산 중턱에 위치한 공터로 향했다.
멸천대원들은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진무량과 위지운, 그리고 승부를 지켜보기 위해 주백기가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한 상태였다.
위지운은 정면에 서 있는 진무량과 마주하자, 문득 손에서 땀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이 긴장감은 어떻게 조금도 변하질 않는군.’
승부를 겨룰 때 진무량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지금 그에게선 자신이 따르던 멸천대 대주의 모습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진무량에게서 느껴지는 건 오직 눈앞에 상대를 완전히 박살내고자 하는 투지뿐.
바로 그런 진무량의 모습을 바랐다. 최강의 사내가 바로 자신의 목표였으니까.
온몸에 털이 바짝 설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던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면서,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져 갔다.
무공을 수련하면서 늘 진무량을 머릿속으로 그려 왔기 때문일까. 어쨌든 수련을 거듭해 온 그 시간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나머지는 자신이 정한 최강의 상대를 향해 전력을 다해 맞서는 것뿐.
진무량과 위지운은 동시에 내력을 끌어올렸다.
점차 진무량에게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나오자, 위지운이 의문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못 본 사이에 또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 것이오?”
“그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진무량은 특유의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조소를 피어 올리며 물었다.
“몇 수를 접어주랴?”
“한 수. 딱 한 수면 충분하오.”
살수에게 두 번의 공격은 필요치 않다. 단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야말로 위지운의 방식.
염옥창을 사선으로 비껴들며 진무량이 대답했다.
“좋다. 먼저 공격해 봐. 그 뒤부터는 나도 전력을 다하지.”
휘이이익.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진무량의 눈앞에서 위지운의 신형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경공을 펼쳐 시야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지형지물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기척을 지우는 은신술인 혼돈밀(混沌密)이었다.
위지운이 완전히 기척을 지우자, 진무량 또한 그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제법이군.’
진무량은 차분히 위지운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숨는 행위는 결국 일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 섣불리 움직여 빈틈을 보이지 않고, 위지운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반격을 가할 심산인 것이다.
몸을 숨긴 위지운은 나무에 등을 대고 숨을 골랐다.
진무량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계획까지는 성공했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순간, 진무량은 자신의 위치를 알아낼 터. 약간의 살기를 내뿜는 것도, 심지어 진무량을 바라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지극히 사소한 행동으로도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 테니까.
진무량에게 확실하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은밀함과 속도가 동시에 필요했다.
은밀함을 통해 진무량의 반응을 조금이라도 느리게 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는 순간, 이미 진무량의 몸에 검이 꽂혀 있어야 할 정도로 빠른 검격으로 끝을 낸다.
그 모든 것들을 모두 충족시켜 줄 초식은 바로 무상검(無上劍). 위지운의 비장의 한 수이자 최고의 절초로서,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검격이었다.
위지운은 감각을 증폭시키는 암혼인을 펼쳤다.
극대화된 감각들을 통해 위지운은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진무량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냈다.
무상검을 펼치는 순간은 고속으로 움직이다 보니 눈으로 상대의 모습을 쫓지 못할 정도이다. 하여 위지운은 암혼인을 통해 진무량의 위치를 파악해 낸 것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위지운은 조심스레 허리춤에 꽂힌 검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쾌가 가장 우선시되기에 무상검은 검을 뽑음과 동시에 펼쳐진다.
단호한 결의를 굳힌 위지운은 단숨에 검을 뽑아들었다.
쉬이이이익!
위지운은 이미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진무량의 사각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빛살과 같은 속도!
암혼인으로 극대화된 감각으로 진무량의 뒤를 잡은 위지운은 무게를 실어 단숨에 검을 찔러 넣었다.
캉!
위지운의 필살의 일격인 무상검이 염옥창에 가로막혀 둔탁한 탁음이 울려 퍼졌다.
무상검이 완벽하게 막히자, 위지운은 당황스러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진무량은 대답 대신에 불길한 조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위지운은 진무량이 반격해 온다는 사실을 직감했으나,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모든 정수를 녹여내 단 한 번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 바로 무영검. 그 일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죽음을 뜻한다.
위지운은 눈앞으로 날아드는 진무량의 주먹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철썩!
“으아아악!”
차디찬 물을 뒤집어 쓴 위지운이 괴성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수통의 물을 털면서 주백기가 말했다.
“……한심한 놈.”
위지운은 신랄한 주백기의 독설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실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자로 땅에 뻗은 채 위지운이 주백기를 향해 말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참 노랗네.”
“……하늘은 아주 새파랗다.”
“뭐야. 그럼 내 눈에만 노랗게 보이는 거였어?”
대답을 마친 뒤에 위지운은 실소를 흘렸고, 주백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근처에서 진무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정신이 든 거냐? 고작 그 정도로 뻗다니.”
위지운은 억울한 듯 진무량을 향해 항의했다.
“마음먹고 패는 대주한테 맞고 실신하지 않을 놈이 어디 있소?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네.”
의식이 돌아오고 조금 지나서야 고통이 몰려왔다.
진무량이 사람을 죽기 일보 직전까지 때리는 신비한 기술이 있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지금 몸 상태가 딱 그랬으니까.
위지운은 속에 들어 있는 근심들을 다 털어내듯, 한숨을 크게 내쉰 뒤에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무영검을 완벽히 막아낸 거요?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생채기 정도는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진무량은 느낀 그대로를 솔직히 위지운에게 말해 주었다.
“네 일격은 훌륭했다. 오랫동안 고심하고 단련해 온 흔적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 일격을 사용하는 과정이 좋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네가 일격을 가해 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난 방어에만 전념했다. 그러니까 네 일격을 받아낼 수 있었던 거야.”
위지운은 차분히 진무량의 말에 속뜻을 헤아린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가 대비하지 못할 때를 노리라는 뜻이오?”
“그래. 암살이라면 상관없지만, 정면승부에서는 상대가 미처 대비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게 우선이다.”
“……대비하지 못한 상태의 대주였다면 무영검이 통했을 거란 뜻이오?”
“글쎄. 아마도 이렇게 무사하진 못했겠지.”
위지운은 아쉬운 마음에 눈썹을 찡그렸다.
“에잇! 조금 더 가다듬고 나서 도전했어야 했는데.”
진무량은 위지운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화제를 바꿨다.
“너, 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생뚱맞게 그게 무슨 소리요?”
“이젠 나는 더 이상 마교의 사대신마도 아니고, 따로 소속이 없으니 나를 꺾는다 해도 무인으로서의 명예를 떨치기는 힘들지. 까놓고 말해서, 멸천대에 머물 이유가 없잖아.”
“혹시 야수천가(野獸天家)를 기억하시오?”
“어.”
“거짓말하지 마시오. 그렇게 옛날 일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이오?”
“정확히는 몰라. 다만 내가 반 죽여 놓은 놈들인 것만 기억하고 있지.”
“그놈들을 반 죽여 놓은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소.”
살막 소속이었던 위지운이 멸천대에 항복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야수천가와 크게 시비가 붙었다.
야수천가의 가주는 투항한 위지운과 살막 소속 살수들을 충성심 없는 버러지라며 노골적으로 비웃었고, 사소한 문제를 핑계 삼아 시비를 걸어 온 것이었다.
마교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야수천가는 살막 소속이었던 살수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존재였고, 위지운은 야수천가의 가주에게 이유 없이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그때 진무량이 나타나 살막 소속의 살수들을 멸천대로 거두며 말했다.
ㅡ이제부터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머리 숙이지 마라. 오직 그것만이, 목숨을 걸고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멸천대가 갖는 단 하나의 보수다.
그날 진무량은 야수천가의 가주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위지운이 진무량을 목표로 삼게 된 계기 또한 바로 이 사건이었다.
야수천가를 초토화시킨 뒤에 진무량이 받은 처벌은 멸천대와 함께 사지로 불리는 전장으로 보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진무량은 물론, 멸천대원들조차 단 한마디의 불평도 늘어놓지 않았다.
결국에 멸천대는 험난한 전장에서도 보기 좋게 승리했다. 처벌을 내린 마교의 원로들은 그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멸천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의환향하듯 마교로 돌아왔다.
위지운이 말했다.
“대주를 따르는 데 이유 같은 건 없소. 칼을 쥐고 사는 놈들에게 미래는 아무 의미도 없소. 당장 내일 칼 맞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훗날을 생각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
“나도 마찬가지고, 대원들 모두 그저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오. 그리고 그게 대주와 함께하는 것이겠지.”
“속 편한 놈들이군.”
위지운은 온몸을 배배 꼬면서 대답했다.
“앞으로 이딴 건 묻지 마시오.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으니까.”
“그래. 동감한다.”
진무량 또한 어깨를 올리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위지운은 벌렁 드러누운 채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목표는 대주를 뛰어넘는 거요. 그러니 앞으로도 자주 승부를 부탁하겠소.”
“알았다. 영원히 목표를 뛰어넘진 못하겠지만, 대신에 평생 네 목표로 있어 주마.”
편안한 얼굴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멸천대원 한 명이 다가와 소식을 전해왔다.
“대주님, 지금 급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파운신검 여도강이 대주님을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