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음공 (1)
2018.05.03.
연시우는 당장이라도 호율을 향해 달려들 것처럼 난폭한 기운을 발산했다.
허나 무시무시한 기세와는 달리 연시우는 굳게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움직이지 않았다.
경솔하게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냉철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여태껏 수없이 호율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떻게든 거리를 좁힐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일격은 번번이 빗나갔다.
하여 연시우는 격앙된 심정을 가라앉히고, 호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공격 일변도였던 연시우가 잠잠해지자, 호율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며 말했다.
“재미없게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이제야 나와의 실력 차이를 느낀 건가?”
“…….”
호율은 대답 없이 경계 태세를 취하는 연시우를 향해 섬뜩한 목소리를 냈다.
“어느 쪽이든 이제 끝을 내야 할 때란 뜻이겠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생글거리던 호율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내 호율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에서 활이 뻗어 나가듯 순식간에 연시우를 향해 접근했다.
이윽고 지체 없이 날아드는 호율의 주먹!
연시우는 축발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어깨를 틀어 호율의 일권을 피해 냈다.
첫 번째 타격이 완전히 빗나갔으나, 호율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초식으로 이어 갔다.
뒤이어 호율은 마치 순간 수십 개의 주먹이 동시에 날아드는 듯한 빠른 초식을 선보였다.
연속되는 호율의 권(拳)장(掌)은 정확히 연시우의 급소를 향해 파고들었다.
게다가 그 주먹들은 모두 연시우가 피하는 방향을 예측하여 집요하게 날아들었으므로, 당하는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연시우는 굳건하게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호율의 공격을 받아냈다. 호율의 공격을 완벽하게 피해 낼 수는 없기에 점차 상처가 늘어났으나, 급소만은 철저하게 지켜 냈다.
연시우가 사대신마로 불리는 호율의 움직임을 반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 수없이 진무량과 함께 했던 수련 덕분이었다.
분명 호율의 권장은 위협적이었으나, 태산마저 분쇄할 듯이 내리치는 진무량의 일격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당장 수세에 몰린 상태임에도 시간이 갈수록 연시우의 눈빛은 날이 바짝 선 칼날처럼 빛을 더해갔다.
연시우는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호율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관찰했다.
점차 호율의 움직임이 익숙해졌고, 연시우는 순간적으로 호율에게 생긴 빈틈을 포착했다.
스오오오!
흡마공 특유의 괴음과 함께 연시우가 호율을 향해 검게 물든 왼손을 뻗었다.
짤랑 짤랑.
그 순간 호율이 찬 금팔찌가 흔들리며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연시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완전히 붙잡았다고 여긴 호율이 눈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이내 연시우의 뒤에서부터 호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긴 하다만, 감히 내게 대적할 정도는 아니야.”
퍽!
등 뒤에서 날아든 호율의 일장은 정확히 연시우의 등을 타격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기에, 연시우는 미처 대비치 못했다.
정통으로 호율의 장법에 타격당한 연시우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간신히 멈춰 선 연시우는 즉시 몸을 돌려 호율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했다.
호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과장되게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한 방에 뻗을 줄 알았는데, 겉보기와 달리 제법 튼튼하군.”
연시우는 대답 대신 울컥 치미는 피를 뱉어 낸 뒤에, 호율이 손목에 찬 금팔찌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분명히 예측 가능했던 호율의 움직임이 갑자기 변한 순간마다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 사실을 미루어 연시우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저 팔찌에서 나는 소리로 뭔가 술수를 부리고 있군.’
연시우의 추측은 정확했다.
호율은 금팔찌가 흔들리면서 나는 금속음을 통해 음공을 사용한다. 연시우에게 펼친 음공은 유명구혼악(幽冥拘魂樂).
호율의 절기 중 하나인 유명구혼악은 찰나의 순간 동안 움직임이 멎는다. 물론 그 소리를 들은 당사자는 스스로가 멈췄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움직임이 멎을 뿐이지만, 고수들의 승부에서는 한순간으로 생과 사가 갈린다. 허니 호율의 음공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연시우는 호율의 음공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잠시라도 경계를 게을리하면 단숨에 목숨을 빼앗길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란 사실은 인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연시우의 가장 큰 고민은 호율의 음공을 깨부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허나 당장 적의 술책을 깨부술 방법이 없다 하여 얌전히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머리로 복잡하게 생각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 결론은 단순한 곳에 있는 법.
‘몸으로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없겠군.’
호율을 꺾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펼치는 음공을 더 경험하여 약점을 파악해야 했다.
파밧!
피 흘릴 각오를 마친 연시우는 전력으로 호율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짤랑짤랑.
유명구혼악을 펼친 호율은 순식간에 연시우의 사각으로 들어가 일장을 날렸다. 그리고 호율의 손바닥은 정확히 연시우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우드드득.
뼈가 바스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더불어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호율은 자신의 일격이 정확히 적중했음을 느꼈다.
연시우는 분명 중상을 입었음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호율을 붙잡기 위해 왼손을 뻗었다.
지근거리에서 호율이 몸을 뒤로 젖히며 연시우의 왼손을 피해 냈다. 그 짧은 순간 호율은 연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여태껏 수도 없이 날린 일격에 연시우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보통 무인이라면 이미 절명하고도 남았을 정도의 부상임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연시우를 타격했던 자신의 주먹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당장 움직이기도 벅찰 부상을 입었음에도 연시우의 전의는 꺾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연시우가 다시 한번 호율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짤랑짤랑.
그 순간 호율의 금팔찌에서 금속음이 울렸고, 여지없이 연시우의 일격은 빗나갔다.
이윽고 호율의 쌍장이 비어 있는 연시우의 복부에 꽂혔다.
퍼억!
연시우는 몸이 붕 뜬 채 열 걸음 이상 날아갔으나, 쓰러지지 않고 착지해 똑바로 섰다.
“크윽.”
연시우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허나 곧 연시우의 입 꼬리가 아주 미묘하게 올라갔다.
여태까지 무모하게 호율을 공격했던 것은 호율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호율이 날린 권장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그에 상응하는 호율의 허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호율이 의식하지 못하는 일관된 움직임이었다.
호율은 유명구혼악을 펼친 뒤에 늘 오른쪽이나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흡마공을 경계하기에 자연스레 왼손에서 멀리 떨어지려 하는, 일종의 무인이 가진 습성임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호율을 붙잡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명구혼악을 펼친 뒤에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다.
호율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여 그 맹점을 없앨 수만 있다면 호율을 붙잡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고통으로 인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뚱이였다.
호율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당한 심각한 부상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또한 호율이 움직임을 읽혔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또 다른 대책을 세울 터.
허니 두 번의 기회는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야말로 일격 필살로 승부를 지어야만 했다.
연시우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호율은 그가 부상이 깊다고 판단하여 순식간에 연시우를 향해 쇄도했다.
쉬쉬시식!
연시우는 정면에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호율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윽고 호율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자 창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짤랑짤랑.
그때 호율이 찬 금팔찌에서부터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여지없이 연시우의 움직임이 멈췄고, 그 틈을 타 호율은 사각으로 움직여 상대의 뒤를 잡았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등에 일장을 날리려던 찰나, 연시우가 몸을 홱 돌렸다.
연시우의 눈앞에는 꾸며낸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놀란 호율이 보였다.
“네 움직임은 너무 단순해. 뻔히 보여.”
연시우는 후방으로 호율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가로로 창을 크게 휘둘렀다. 그로 인해 호율은 연시우의 공격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후방으로 향한 것이었다.
물론 그 모든 과정들은 연시우가 세운 계획대로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호율은 우선 연시우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신형을 날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시우가 호율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광라흡원진공(曠羅吸元眞功)!’
연시우는 본인이 펼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절기를 펼쳤다.
스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연시우의 왼손으로 대기 자체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빨아들이는 힘이 어찌나 드센지, 깊이 뿌리 내린 고목이 뽑아지고, 묵직한 바위가 나뭇잎처럼 떠올라 연시우의 왼손을 향해 당겨졌다.
멀리 떨어진 적을 강제로 끌어드리는 그야말로 흡마공의 정수가 담긴 최고의 절초!
호율은 억지로 발을 땅에 박으며 버티려 했으나, 결국 빨아들이는 연시우의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호율은 그대로 연시우에게로 당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연시우는 지척까지 다가온 호율의 왼손을 붙잡았다.
“넌 이제 끝이야.”
연시우는 붙잡은 손을 통해 단숨에 호율의 내력을 빨아들였다.
내력은 물론 생기까지 연시우에게로 빨려 들어갔고, 곧 호율의 왼손은 뼈만 남아 앙상하게 형태로 변해 갔다.
허나 호율은 포기하지 않았다. 곧 내력을 일으키기 시작한 그는 빨아들이는 연시우의 기운과 정면으로 맞섰다.
이내 호율의 입에서 분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네놈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호율이 십 성의 내공을 모두 방출하자, 연시우는 곤혹스러움을 드러냈다. 호율의 내력이 너무 거대해 온전히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연시우와 호율은 내력 승부를 펼쳤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광풍이 몰아쳤고, 마치 천지가 뒤바뀌기라도 하려는 듯 대지가 요동쳤다.
내력 승부가 길어지자, 점차 연시우의 신형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흡마공은 붙잡은 상태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무공이지만, 문제는 연시우의 부상이었다.
이미 누차 호율의 권장에 타격당한 부상으로 인해 연시우는 온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호율은 점차 뒤로 밀리는 연시우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 그를 압박했다.
“네놈의 하찮은 발악도 이제 끝이다!”
거센 외침과 동시에 호율은 붙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연시우의 가슴팍에 일장을 날렸다.
퍼억!
결국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나간 연시우는 흡마공을 펼치기 위해 붙잡은 호율의 왼손을 놓쳐 버렸다.
튕겨져 나간 연시우는 힘없이 땅바닥을 구르다가 곧 멈춰 섰다.
붙잡은 상태에서 호율을 놓쳤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앞으로 호율은 경계심을 놓치 않을 테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터.
게다가 이미 전신이 망가져 더 이상 의지대로 손가락조차 까딱일 수 없었다.
호율은 흡마공에 당해 말라비틀어진 왼팔을 부여잡았다. 더 이상 왼팔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호율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네놈 따위가 감히……! 내 네놈을 산채로 갈가리 찢어 주마.”
호율은 쓰러진 연시우를 향해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겼다.
연시우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도저히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부터 금을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리리링―!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려는 듯 맑고 청아한 음색은 유서하의 연주였다.
호율은 의문의 연주에 신경 쓰기보단 우선 연시우의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허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치 온몸이 단단한 쇠사슬에 포박 당한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호율과 연시우 사이에 금을 들고 있는 유서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음공을 펼치는 호율의 소리를 따라와 이 자리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유서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연시우를 바라보며 안부를 물었다.
“상태가 어떤가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연시우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대체 여긴 왜 온 것이오? 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시간을 끝 테니 어서 여기서 도망치시오.”
비천검문으로 향하기 전에 진무량이 내린 명령은 유서하를 지키는 것이었다.
홀로 숨이 끊어지는 건 상관없지만, 진무량이 내린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건 죽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서하는 재빨리 연시우의 상태를 살폈다. 척 보기에도 연시우는 전신이 망가진 상태가 틀림없었다. 그런 그를 데리고 도망쳐 호율에게서 벗어날 확률은 희박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유서하가 믿음직한 목소리로 연시우를 향해 말했다.
“거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이제부터 저자는 제가 상대하도록 하죠.”
호율은 잔뜩 경계심을 품은 눈길로 유서하를 살폈다.
그는 믿기지 않는 현실로 인해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유서하의 펼친 음공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금을 연주함으로서 자신의 절기인 유명구혼악을 펼쳐냈다. 완전히 몸을 결박하는 그 감각은 분명 자신의 절기가 틀림없었다.
호율이 신중한 눈길로 유서하를 쏘아보았다.
“네가 어떻게 유명구혼악을 연주할 수 것이냐?”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그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그 소리를 본떠 연주를 했을 뿐이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유서하를 보고 호율은 기가 찼다.
무지한 사람에게 금팔찌가 부딪히는 소리는 매우 단순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허나 그 단조로운 소리 속에는 실로 복잡한 내공이 실려 있다.
그 난해함은 천지조화와 천재지변의 이치를 파헤치는 것과 비견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여기까지 도착하는 동안 들은 것만으로 그 음을 똑같이 펼쳐냈다? 이건 직접 경험하고도 믿을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천재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군.’
유월천을 붙잡을 생각으로 꾸민 함정에서 유서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의 존재가 거슬렸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음공을 다루는 무인으로서 본능적으로 유서하의 존재를 위협적이라고 여겼던 것이리라.
유서하가 금을 고쳐 잡으며 호율을 향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음공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저와 한번 승부를 겨뤄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