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의표 (2)
2018.04.22.
“우리는 수일 동안 후퇴를 거듭했기에 먼저 구중련을 공격한 적이 없어. 그들은 당연히 기습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 이럴 때…….”
연시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유월천의 이어지는 설명을 끊었다.
“충분히 알았으니까, 생각해 둔 계획이나 말해.”
“성격 한번 급하군. 우선 우리는 인원을 셋으로 나눌 걸세. 기습을 감행할 시각은 오늘 밤이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게야.”
유월천이 장백령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나와 함께 문도들을 이끌고 구중련의 정면을 뚫을 걸세.”
“음.”
장백령의 대답을 듣고서 유월천의 시선이 유서하를 향했다.
“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구중련의 배후를 공격하거라.”
“알겠습니다.”
유서하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연시우가 입을 열었다.
“멸천대는 기습 부대의 움직임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이도록 하지.”
연시우의 의견은 유월천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했다. 유월천이 짧게 대답했다.
“부탁함세.”
상대를 혼란의 빠뜨리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기습을 가하는 편이 훨씬 이롭다. 구중련의 입장에서는 동시에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니 대처하기가 더욱 쉽지 않을 터.
연시우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월천을 노려보았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월천에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찾을 수 없었다.
허나 유월천은 결코 얕잡아 볼 만한 인물이 아님은 확실했다.
전황을 정확히 읽어내 구중련이 방심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한 것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끌어야 하는 입장에서 상식을 깨고 공격으로 돌아설 배짱까지.
세밀한 계획을 토대로 과감하게 실행하니 실로 훌륭한 작전임이 틀림없었다.
살벌한 시선을 느낀 유월천이 연시우에게 질문했다.
“계획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있는 건가?”
“없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작전을 설명하던 유월천이 양쪽 눈을 동시에 떴다.
순식간에 유월천을 감싸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지금부터 중요한 부분이니 모두 잘 듣게. 기습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구중련이 아니네.”
장백령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만만한 놈들이 아니지.”
유월천이 신중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갔다.
“가장 주의해야 할 자는 혈랑대주 호율이네. 그가 어디로 튈지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 누구든 놈과 마주한다면 깃발을 통해 위치를 알리고 즉시 도망치게.”
유월천의 뜻을 짐작한 유서하가 말을 거들었다.
“호율과 마주한 쪽은 도망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나머지 기습 부대가 성과를 올리는 방법이군요.”
유서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에 유월천이 대답했다.
“이번 작전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구중련의 기세를 꺾는 걸세.”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기습을 실행하는 이유는 훗날을 위함이었다.
기습을 성공시켜 구중련의 전력을 약화시킨다면 앞으로의 전투가 더욱 쉬워질 터.
더불어 구중련은 계속해서 기습을 염두에 두어야 하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계속 수비에 신경을 써야 한다. 어쩌면 구중련의 움직임 자체가 소극적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
유월천은 누차 심사숙고를 거듭한 뒤에 기습을 결정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성공의 가능성을 높였으나, 단 한 가지 변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호율의 존재.
사대신마로 칭해지는 호율은 빈틈없이 짜인 작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호율의 무공은 마교에서도 당해 낼 자가 없을 정도.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도 호율과 대적했을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온전한 상태의 유월천이었다면 일전을 겨룰 만했으나, 그는 아직 무형심인지독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한 상태였다.
불시에 마비가 찾아오는 몸으로 호율과 대적하는 건 분명 무리였다.
유월천이 강조를 거듭했다.
“모두 명심하게. 호율과의 승부는 무조건 피해야 해. 이번 작전은 물러날 때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장백령과 유서하, 연시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보였다.
침묵 속에서 장백령이 말을 꺼냈다.
“오늘 밤까지 기습할 준비를 마치려면 여유가 없을 터.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
유월천이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럼 모두 무운을 빌겠네.”
* * *
혈랑대의 부대주 상관호는 호율의 뜻을 알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무림맹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정파의 세력권으로 침공한 세력은 비단 혈랑대 하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담무흔의 명령에 따라 수십 개의 타격대가 혈랑대를 주축으로 뭉친 상태였다.
상관호는 대기 중인 타격대의 대주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호율의 명령을 전했다.
이윽고 호율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영월단의 단주 천유성(天流星)이 자리한 천막이었다.
영월단은 혈랑대의 지원을 위해 마교에서부터 출발한 후속대로서 이제 막 도착한 상태였다.
천유성을 대면한 상관호는 정중하게 인사를 전했다.
“단주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천유성은 무인답지 않게 작은 체구였다. 허나 마교의 무인들 중에서 그 누구도 천유성을 얕잡아 보는 무인은 없었다.
영월단 자체가 오직 교주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특수 집단. 영월단의 단주라는 직책만으로도 존경을 받기 충분할 정도였다.
절정을 훌쩍 뛰어넘은 무공으로 인해 천유성은 영월단의 단주로 낙점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수없이 많은 마교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 까다롭다는 흡마공의 정점에 오른 자.
과거의 천군위에게 깊은 신임을 받아 마교의 장로들조차도 예의를 차렸던 인물이 바로 천유성이었다.
천유성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여정이 길어져 피곤한 상태다. 전할 말이 있다면 짧게 끝내고 돌아가라.”
“그렇다면 현재 전황만 보고 드리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멸천대의 합류로 인해 당분간 대기하라는 명령입니다. 먼저 비천검문과 멸천대의 관계를 파악하고, 영사문이 도착하기 전에 때를 노려 공격할 예정입니다.”
천유성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시종일관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했다. 상관호의 입에서 멸천대가 나오기 전까지는.
순식간에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천유성이 대답했다.
“다시 말해 봐.”
천유성이 갑자기 살기를 뿜어대는 바람에 상관호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잠시 대기한 뒤에 때를 잡아…….”
“그거 말고!”
버럭 성질을 낸 뒤에 천유성이 말을 이었다.
“방금 분명 멸천대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천유성이 내뿜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내 다시 그의 입이 열렸다.
“멸천대에 대해서 파악한 바가 있는가?”
“이곳에 있는 멸천대를 통솔하는 자가 누구인지까지는 알아냈습니다.”
“누구냐?”
“멸천대의 이 조장 연시우라 합니다.”
잠시 동안 천유성은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리기라도 한 듯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내 굳게 멈춰 있던 천유성의 입이 열리면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참으로 기묘한 악연이구나. 설마 여기서 놈과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이야.”
천유성은 연시우에 대해서라면 천하의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천유성은 긴 세월 연시우를 가장 가까이서 모셔 왔다.
연시우에게 직접 흡마공을 배우기도 했으며,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도 했었다.
연시우가 영월단주라는 직책을 버리고 멸천대로 향하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연시우가 영월단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충격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믿고 따르던 우상이 한순간에 변해 버린 순간을.
그때의 배신감은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천유성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꽉 물었다. 어찌나 턱에 힘을 줬는지 이가 부딪치면서 쇳소리가 새어나왔다.
‘연시우,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생각이냐……!’
심지어 연시우는 영월단을 떠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진무량의 밑에서 마교의 반기를 들었다.
한때 우상으로 섬겼던 사내가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내가 직접 처리할 수밖에.’
그것이 한때나마 진심으로 연시우를 존경했던 천유성의 배려였다.
상관호를 향해 천유성이 말했다.
“영월단이 멸천대의 대한 조사를 적극적으로 돕겠다. 또한 멸천대를 공격할 때가 정해진다면 내게 가장 먼저 전해 다오.”
“먼저 혈랑대주께 전한 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다.”
상관호는 천유성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영월단의 천막을 떠났다.
천유성은 조급한 마음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내 그가 천막 밖을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영월단의 무인 한 명이 들어오며 천유성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는 따로 멸천대의 움직임을 감시할 것이다. 은밀하게 진행하되, 미세한 움직임까지 모두 내게 보고하라.”
* * *
서로 간에 복잡한 생각이 얽힌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자시(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각. 어김없이 찾아온 어둠은 만물을 뒤덮고 고요함을 선물했다.
허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방에서 치솟은 불길은 어둠을 몰아냈고, 적막함은 절규하는 듯한 우렁찬 함성소리로 인해 깨졌다.
“와아아아아!”
삽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놀란 호율은 속히 천막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내 눈앞에 달려오는 상관호가 보이자, 호율이 버럭 성질을 냈다.
“도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
“비천검문이 야습을 감행했습니다!”
“뭐라?”
무림맹이 움직인다는 기별은 받지 못했다. 심지어 아직 영사문도 도착하지 못한 상황.
그렇다면 현재 야습은 비천검문과 멸천대의 힘으로만 벌인 짓이 틀림없었다.
철저히 방비만 했다면 오히려 쳐들어온 비천검문에게 큰 타격을 입힐 기회였겠으나, 얼핏 주변을 둘러보아도 제대로 된 대비 중인 곳은 없었다.
수십 일 동안 이리저리 도망치기만 했던 비천검문이다. 게다가 조금만 있으면 영사문의 지원군이 도착할 터. 이런 때 야습을 시도할 것이란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일 만한 인물이라 한다면…….
‘유월천의 짓인가. 보기 좋게 당했구나.’
어쩔 줄 모르고 주변에서 불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던 상관호가 야단스럽게 말했다.
“대주, 이 일을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제아무리 경험이 많은 마교의 무인들이라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비천검문의 공격을 받고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허나 그중에서도 호율만은 특별했다.
그는 안력을 집중시킨 채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 멀리까지의 일대 전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적들의 움직임이 일관되지 않고 독립적이군.’
유심히 비천검문의 움직임을 살피던 호율은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인원을 셋으로 나눈 건가.’
호율은 근처에 보이는 이들 중에서 가장 무력이 뛰어난 타격대를 확인하고서는 상관호를 향해 말했다.
“너는 즉시 옥종대(玉鐘隊) 염혼사대(艶魂死隊)와 함께 정면에 방어진을 구축하라. 그들이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는 것이다.”
“사방에서 비천검문 놈들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정면에 힘을 집중시켜도 되겠습니까?”
“적의 기책에 걸려든 순간, 피해를 입지 않을 수는 없다. 시간이 없느니라.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상관호는 순식간에 경공을 펼쳐 상관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홀로 남은 호율은 좌우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양쪽 다 적에게 크게 당하는 형국이 틀림없었다. 지원을 가지 않으면 많은 사상자를 낼 터.
이럴 때 힘을 분산시켜 양쪽 모두를 도우려 한다면 완전히 비천검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이다.
최선의 선택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천검문의 타격을 입히는 것.
정면에는 마교의 정예 고수들을 배치했으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터.
한쪽은 적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고, 나머지 한쪽을 부숴 버린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천검문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
호율의 고개가 한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유월천, 네놈의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최후에 웃을 사람은 나야.’
호율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 * *
멸천대는 구중련의 진형을 두고 봤을 때 남서 방향을 공격했다.
유월천이 세운 작전은 훌륭하게 적중했다.
제대로 대비되지 않은 적들은 마땅히 반격에 나서지 못했고,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적이 창에 꿰뚫렸다.
연시우를 선두로 멸천대는 종횡무진 적진을 누볐다.
가로막는 적들을 창으로 쳐 내며 진격하던 중, 청풍이 메마른 울음소리를 토해 내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히히이이힝!”
청풍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지한 탓에 급히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그리고 곧 여태까지 마교의 무인들과 확연히 다른 강렬한 기세를 뿜어 대는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저하게 진용을 갖춘 그들은 멸천대와 마주하면서도 전혀 물러나는 기색이 없었다.
연시우는 한눈에 앞을 가로막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비록 얼굴을 본 지 수십 년이 흘렀다고는 하나, 어찌 자신을 따랐던 영월단원들의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연시우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쓴 나찰 가면을 벗었다.
“너, 너는?”
가면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연시우의 표정은 평소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당황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멸천대의 앞길을 가로막은 영월단. 그중에서도 선두에 서 있던 천유성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벌써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직 얼굴은 기억하나 보군.”
은밀히 멸천대를 감시하던 천유성은 곧 그들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간파해 냈다.
이렇듯 대대적으로 비천검문과 함께 멸천대가 야습을 감행할 것까진 예측하지 못했으나, 어느 정도 대비를 마친 탓에 멸천대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하여 천유성은 영월단 전체를 이끌고 멸천대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원한 가득한 눈길로 연시우를 노려보며 천유성이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소. 단주, 아니 배신자 연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