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08화 (108/143)

108화. 지원

2018.04.15.

비천검문은 혈랑대를 비롯한 구중련의 공격을 집요하게 막아 냈다.

유월천이 교묘하게 비천검문의 문도들을 분산시켜, 구중련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시간을 끈 탓이었다.

그렇다고 구중련이 앞길을 막는 비천검문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림맹으로 나아가려 하면 어김없이 배후를 공격하니, 구중련의 입장에서 현재 대적하는 비천검문은 그야말로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다.

혈랑대의 부대주 상관호가 수하들을 향해 버럭 성질을 냈다.

“또 유월천의 위치를 놓친 게냐!”

주위에 십여 명의 수하들이 모여 있었으나, 면목이 없는지 어느 한 명도 입을 열지 못했다.

분을 참지 못한 상관호는 모욕적인 눈길로 수하들을 노려보았다.

“이런 한심한 것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천기자가 막막한 침묵을 깼다.

“내 분명 유월천이 유인책을 쓰고 있다 말했소. 헌데도 무턱대고 공격해 대니 당연히 함정에 빠질 수밖에.”

천기자의 비아냥은 가뜩이나 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상관호를 더욱 분노케 했다.

상관호는 가시가 잔뜩 돋친 어조로 천기자를 쏘아붙였다.

“아주 잘나신 분이 납셨군. 내 친히 혈랑대를 그대에게 맡겼을 때 유월천에게 엉망으로 당했던 건 벌써 잊었나 보오.”

천기자는 무표정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꾸했다.

“이 근방은 구중련의 진격을 막기 위해 유월천이 선택한 곳이니, 지리적으로 비천검문이 유리함을 가지고 있소. 또한 나는 아직 이곳에 모인 구중련 무인들의 역량을 모두 파악하지 못했소. 하여 우선 국지전을 통해 아군과 적군의 역량을 파악함이 우선이었소.”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점점 격앙된 천기자가 상관호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헌데 소규모 국지전에서 단 한 번 패배한 뒤로 그대는 통솔권을 모두 빼앗고, 심지어 내 조언조차 듣지 않았잖소.”

상관호는 내면 깊은 짜증을 내보이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아 시끄러워. 결국 패배의 변명일 뿐이면서 뭐가 그리 거창한가.”

천기자는 깊은 체념이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이런 식이라면 여기 있어 봤자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오. 나를 마교로 보내 주시오. 련주님과 직접 면담을 해야겠소.”

“비천검문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그대는 련주님을 뵐 수 없소.”

천기자는 얼굴색이 확 바뀌면서 처음으로 분노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들이 철악산에서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련주님과의 면담을 약조하지 않았소?”

“그 약속을 실행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유월천의 목이었소. 헌데 그마저 실패하지 않았소?”

“그런 조건은 애초부터 없었거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상관호는 귀찮은 듯 앞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정도는 당연히 눈치챘어야지. 그대의 용도는 유월천을 죽이는 것이었소. 참나, 좀 치켜세워 주니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이라도 한 건가.”

“뭣이라!”

극도로 화가 난 천기자로 인해 분위기가 단숨에 험악해졌다. 그때 짤랑이는 금속음을 울리며 호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갑작스런 혈랑대의 대주 호율의 등장으로 인해 상관호를 비롯한 주변 무인들의 머리가 단숨에 숙여졌다.

깊이 예를 취한 뒤에 상관호가 물었다.

“대주님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네놈들이 비천검문 따위를 두고 고전하고 있다 하여 련주님께서 직접 나를 보내셨다. 다들 부끄러운 줄 알라.”

호율은 천기자를 흘깃 쳐다본 뒤 상관호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상관호의 대답보다 천기자의 말이 더 빨랐다. 천기자는 상관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가 련주님과 대면을 방해하고 있소. 그대가 책임자인 것 같으니, 나를 련주님께 데려다주시오. 앞으로 구중련이 나아갈 행보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소.”

호율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고서 천기자의 면전에 대고 면박을 줬다.

“허. 당돌한 놈일세. 이 새낀 뭐야?”

상관호가 서둘러 호율의 말을 받았다.

“강호에서 천기자라 불리는 자입니다. 구중련으로 귀순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상관호의 말끝이 두려움으로 인해 미묘하게 떨렸다. 오랫동안 모셔 온 호율의 성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율은 감정이 수시로 바뀌어 예측이 불가능했다.

방금까지 웃고 있다가도 사소한 문제라도 생긴다면 순식간에 태도가 변해 버렸다.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단숨에 숨통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체로.

언제 어떤 계기로 호율의 마음이 변할지 모르기에, 마교의 무인들은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상관호가 몸을 사리는 이유 또한 갑자기 호율이 분노하여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천기자는 호율의 예의 없는 태도를 꾸짖었다.

“그대는 어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단 말인가. 또한 한 무리의 수장으로서 인재를 대할 때는 마땅히 정중한 태도로 대접해야 하는 법. 어찌…….”

호율의 손날이 순식간에 천기자의 목젖을 후려쳤다.

숨이 막힌 천기자는 억지로 호흡을 위해 공기를 들이마셨다.

“케엑! 허업! 허업!”

호율은 고통스러워하는 천기자를 우스운 눈길로 내려보았다.

“네가 뭔데 건방지게 훈계질이야?”

호율은 쭈그려 앉아 괴로워하는 천기자의 머리채를 들어 올려 똑바로 얼굴을 마주했다.

“예의를 차리고 말할 테니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펼쳐질 마교의 천하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고 싶으면, 얌전히 내가 내린 명령에나 복종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호율은 천기자의 머리채를 쥔 채 바닥으로 내리찍은 뒤 마구 흔들었다. 천기자의 안면이 거친 흙바닥에 이리저리 쓸렸다.

절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웃음을 지으며 호율이 말을 이었다.

“머리를 잘 흔드는 걸 보니 이해한 걸로 알아듣겠습니다.”

“…….”

천기자는 고통 속에서 비통함과 분노가 뒤얽혀, 고개를 땅바닥에 박은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천기자의 모습을 보고 만족했는지 쭈그려 앉아 있던 호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심한 눈길로 천기자를 내려다보았다.

“제까짓 놈이 교주님을 뵐 생각을 하다니 꿈도 크군. 너 같은 늙은이를 만날 정도로 교주님께서는 한가하지 않다.”

호율은 관심이 사라진 천기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상관호를 향해 명령했다.

“너는 즉시 대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상관호가 대답했다.

“송구합니다만 유월천의 행방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우선 놈의 위치부터 찾아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상황은 모두 전해 들었다. 먼저 처리해 할 놈은 따로 있었어.”

비천검문의 문도들을 넓게 배치하여 도망치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 유월천의 목적임이 틀림없었다.

허나 마교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혈랑대가 도망치는 적을 수십 일 동안 놓치는 것도 모자라, 별다른 피해조차 주지 못했다. 이는 상대가 제아무리 유월천이라 해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수하들에게 비천검문의 세밀한 움직임을 전해 들은 호율은 유월천의 후퇴를 돕는 걸림돌을 찾아냈다.

바로 장백령이 이끄는 소수의 비천검문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절묘하게 나타나 혈랑대의 시선을 끄는 것과 동시에 유월천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무리해서 유월천을 노리다 보니 장백령의 존재를 간과했던 것이다.

호율이 말했다.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놈은 장백령이다. 놈의 위치는 이미 파악해 두었다.”

사라진 유월천의 행방을 따라가다 보니 장백령의 위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장백령은 유월천이 철저하게 숨도록 돕고, 유사시에 시간을 끄는 역할도 해야 하니 완벽히 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백령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전황을 크게 바꿀 수 있을 테고, 어쩌면 그를 공격함으로 인해 깊이 숨은 유월천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사문이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서둘러 움직이거라.”

상관호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호율의 명령에 대답했다.

“존명!”

* * *

창명한 푸른색의 검기가 짙은 구름이 깔린 밤하늘을 가득이 수놓았다.

정심한 기운이 서려 있는 푸른 검기는 남궁지가 휘두르는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쉬쉬쉬쉭―!

남궁지의 검이 초승달처럼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휘어져 나갔다.

안정된 하반신과 거듭 수련을 반복한 바른 자세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남궁지의 검을 감싼 푸른 검기가 거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이내 검신을 가득 메운 푸른 검기는 충격파와 함께 사방으로 뻗어 나가듯 쏘아졌다.

‘대정검!’

명망 높은 남궁세가에서도 손꼽히는 초식을 완벽하게 펼쳐 냈음에도 남궁지의 표정에서 만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의문의 인기척이 남궁지를 향해 다가왔다. 손에 쥔 검을 쭉 뻗으며 남궁지는 경계를 취했다.

“이런, 내가 방해를 한 건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남궁지는 익히 알고 있는 유월천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즉시 검끝을 땅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유월천은 자연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남궁지를 향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지치지도 않는 건가? 오전에 혈랑대와 그리 사투를 벌여 놓고 또 이리 수련하다니……. 그러다가는 몸이 못 버텨.”

“저는 괜찮습니다. 수련은 끝이 없다던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수천수만 번 반복했던 초식도 돌아서면 부족한 점을 찾게 되니,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검선은 남궁지의 마음가짐이 대견한 듯 쳐진 눈매가 더욱 휘어졌다.

“그것 참 이상하구먼. 내 눈엔 부족함이 전혀 보이지 않던데. 자네의 활약 덕분에 오늘 후퇴하면서도 희생자를 내지 않은 걸세.”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나이의 비해 무공의 성취가 월등한 것 같은데, 특별히 강해지고 싶은 이유라도 있는 겐가?”

“목표가 되는 사내가 한 명 있습니다.”

“그 목표가 진무량인가?”

“……그렇습니다.”

유월천은 잠시 동안 생각을 마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목표로 하기에는 여러모로 그리 좋지 못한 상대군.”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성격이지. 아주 제멋대로야. 그런 점은 절대 닮으려 하지 말게.”

부드러운 검선의 농담에 남궁지는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유월천은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남궁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그 눈빛에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간격을 조금 좁혔다 싶으면 목표는 금세 멀찌감치 달아나 버리지. 그것만큼 허무하고 분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분명 맞는 말씀이십니다. 허나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월천은 밤하늘의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내 조언은 필요 없겠군. 천하의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진무량과 스스로를 비교한다면 대부분 좌절할 걸세. 아니, 진무량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이도 드물게야.”

“…….”

“헌데 자네는 상대의 능력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좌절하지 않았잖은가. 지쳐서 숨이 차고 점점 더 벌어지는 격차에 절망하면서도 계속 뒤를 쫓고 있지 않은가?”

유월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자체가 대단한 거야. 그런 강한 마음을 지닌 이는 반드시 강해진다네. 내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니 믿어도 좋네.”

힘들어 보이는 상대에게 예의상 내뱉는 위로와, 진심으로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고 건네는 격려는 다르다.

전자는 잠깐 동안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후자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닿아 따뜻하게 토닥여 준다.

그 자체만으로 지친 몸을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진심을 담아 남궁지가 말했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노친네의 주제넘은 참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다행이구먼.”

푸근한 웃음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비천검문의 무인이 유월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문주님, 급보입니다.”

“말하라.”

“혈랑대가 야습을 감행. 현재 태상장로님께서 포위당해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유월천의 양쪽 눈이 동시에 커졌다.

장백령을 중심으로 비천검문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들로 선별한 선발대는 앞으로 후퇴에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핵심 전력인 그들을 잃는다면 앞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었다.

구중련도 그 점을 알고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 틀림없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췄을 터. 제아무리 장백령이라 하더라도 자력으로 그 위기를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남궁지가 유월천을 향해 물었다.

“서둘러 도우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기다리거라.”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 버리면 구중련과의 정면 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것이야말로 구중련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

유월천이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갑자기 땅이 미세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잠시 뒤에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이윽고 흉악한 나찰의 가면을 쓴 채 늠름하게 말에 올라탄 멸천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월천의 앞에서 멸천대는 동시에 고삐를 잡아 말을 멈췄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혀 흐트러짐 없는 대형을 유지했다.

위용을 갖춘 멸천대의 틈에서 유서하가 나와 유월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유월천은 모인 멸천대원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유서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맹주님께서 보낸 서찰을 통해 상황은 전해 들었다. 헌데 멸천대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우리를 돕기 위해 와 주었어요.”

멸천대의 선두에 있던 연시우는 고개를 돌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딱히 유서하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멸천대의 지원은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구중련도 멸천대의 출현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터.

당장 위험에 빠진 장백령을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었다.

“서하야, 아무래도 회포는 조금 뒤에 풀어야겠구나.”

유서하를 바라보며 유월천이 말을 이었다.

“네가 즉시 도와야 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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