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협박
2018.04.12.
섭고명은 제갈휘를 비롯한 수하들을 밖에 세워 두고, 홀로 진무량이 위치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진무량은 간단한 인사말도 전하지 않은 채, 눈앞의 섭고명을 향해 곧바로 물었다.
“결정은 내린 건가?”
“그렇다네. 무림맹은 이 시간 후부터 구중련을 무너뜨릴 때까지 자네를 비롯한 사파 전체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네.”
그런 섭고명의 답이 석연치 않은 듯, 진무량은 의문을 나타냈다.
“무림맹의 속한 문파들의 반대가 꽤나 심할 텐데. 지금 내뱉은 말을 책임질 수 있는 건가?”
무림맹은 수많은 정파 문파들의 집합체. 과연 섭고명의 의지대로 무림맹이 움직일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섭고명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 무림맹주 섭고명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그에게서는 강호를 대표하는 무림맹의 맹주로서의 권위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에게서부터 뿜어지는 강렬한 기세는 진무량이 가진 의심을 모두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무거웠던 분위기를 살짝 누그러뜨리며 섭고명이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의심은 서로 그만두지. 이제부터는 서로 힘을 합친 관계로서 묻겠네. 무림맹을 끌어들이고자 했을 때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을 터. 그 계획에 대해 말해 보게.”
“내 계획을 밝히기 전에 하나만 말해 두지. 내 목적은 구중련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짓밟는 것뿐이야.”
진무량은 무의식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살기를 뿜어 댔다. 천군위와 등가휘, 그 외에도 수많은 동료들을 무참하게 죽인 구중련에 대한 원한이 어우러진 살기였다.
진무량은 분노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무림맹의 역할은 정면에서 구중련을 상대하는 것이야.”
“무림맹과 영사문과의 연계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가?”
“무림맹과 영사문이 뒤얽혀서 싸우는 일은 없을 거야. 영사문은 측면에서 구중련을 압박할 테니까.”
진무량은 무림맹과 영사문을 최대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데 초점을 두었다.
두 세력이 어우러져 싸우지 않는 이유는 쓸모없는 분쟁 없이 서로가 가진 힘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대신 무림맹과 영사문은 구중련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며 긴밀하게 협력해야 해. 그 과정에서 분란은 절대 허락되지 않아.”
“자네의 생각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했네.”
반복해왔던 두 세력을 억지로 뭉치게 하기보다,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여 각자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 시킨다.
강대한 힘을 가진 두 세력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다양한 방면으로 구중련을 몰아붙인다면 그 파괴력은 수십 배로 증가할 터.
진무량의 계획은 무림맹과 사파의 힘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책임이 틀림없었다.
진무량이 섭고명을 향해 물었다.
“첩자 색출이 거의 끝나 간다고 들었는데, 무림맹은 언제쯤 움직일 수 있지?”
구중련이 천하를 일통함에 있어 가장 위협이 되는 곳이 바로 무림맹이었다. 그렇기에 구중련은 첩자를 비롯해 수많은 함정들을 미리 안배해 두었다.
또한 무림맹은 사파의 비해 세력의 규모가 더 크기에,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섭고명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내린 최소한의 기한을 입 밖으로 꺼냈다.
“보름일세.”
예상보다 긴 시일을 필요로 했기에, 진무량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비천검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무림맹으로 향하는 구중련의 진격을 막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비천검문이 무너진다면 구중련은 곧바로 무림맹으로 향할 터. 무림맹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로 구중련과 겨룬다면 승부의 방향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섭고명이 말했다.
“비천검문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허나 영사문의 원조에 더해, 미약하지만 무림맹도 계속해서 지원을 보낸다면 분명 버텨 낼 수 있을 걸세.”
“문제는 비천검문 하나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구중련의 련주, 담무흔을 마교에서 끌어내야 돼.”
“내게 말하지 않은 생각이 있는 것 같군.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겐가?”
섭고명의 추측은 정확했다. 진무량은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계획을 차근차근 꺼내 놓았다.
“구중련을 완전히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무림맹과 사파만으로는 부족해.”
구중련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둠 속에 숨어 무림 일통을 준비해 왔다. 그 시간 동안 구중련은 첩자를 비롯해 수많은 함정들을 미리 안배해 두었을 터.
구중련은 어쩌면 위기에 빠졌을 때 다시 어둠속으로 숨어 들어갈 방법까지 찾아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여 진무량은 구중련을 완전히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진무량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섭고명이 물었다.
“무림맹과 사파로도 부족하다니……. 도대체 자네의 속내가 무엇인가?”
“마교까지 구중련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거야.”
놀라움을 뛰어넘어 황당함마저 느낀 섭고명은 순간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무림맹과 사파를 힘을 합치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마교까지 움직이려 한단 말인가.
다른 누군가가 이 말을 꺼냈다면 터무니없는 공상이라 여겼을 것이었다.
허나 진무량은 지금껏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각들을 모두 현실로 이뤄 냈기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마교를 움직이는 건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일이야. 무림맹을 찾아오기 전부터 수하들을 통해 준비 작업도 진행시켜 두었고.”
“어떻게 마교를 움직이게 할 생각인가?”
“마교가 나의 뜻에 동참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보니 확답을 해 줄 수는 없군. 다만 마교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구중련주를 밖으로 끌어내야 해.”
진무량의 생각을 알게 된 섭고명은 그의 조급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담무흔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을 터. 반드시 마교 밖으로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무리해서 준비도 마치지 않은 채 무림맹의 문파들을 대대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섭고명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당장 뾰족한 수가 나올 것 같지는 않군. 자네의 뜻은 충분히 알겠네. 그에 따른 방법은 맹으로 돌아간 뒤에 찾아보도록 하지.”
섭고명이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는 수없이 많았다.
애초에 사파와 힘을 합치는 것부터가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실. 이 안건 하나만으로도 무림맹의 수뇌부들 중에서 몇몇은 펄쩍 뛰며 반대하고 나설 것이었다.
시일이 촉박하다고 해서 무작정 서두르면 오히려 일은 복잡하게 꼬이기 마련.
당장 눈앞의 문제들부터 차근차근 풀어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면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도 조금씩 해결 방안이 보일 테니까.
섭고명은 곧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무량 또한 전할 용건을 모두 끝냈기에 섭고명을 붙잡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거리를 걸어 섭고명이 향한 곳은 무림맹이었다.
* * *
멀찍이서 섭고명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유서하는 진무량이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던 유서하는 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연시우의 목소리를 듣고 순간 걸음을 멈췄다.
“대주님, 지금 즉시 출발하셔야 합니다. 위지운이 보낸 서찰을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진무량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멸천대를 집결시키기 위해 거짓소문을 퍼뜨렸을 때, 진무량은 멀리 떨어져 있던 위지운과 주백기에게 따로 임무를 전해 두었다.
그 임무는 바로 천군위의 호위무사였던 파운신검 여도강과의 접선.
다수의 마교 무인들은 담무흔의 압도적인 힘에 머리를 숙였지만, 끝까지 구중련과 맞서는 세력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두각을 보이는 세력이 바로 천군위의 곁을 지켜온 호위무사들을 이끄는 여도강이었다.
여도강과 접선할 수만 있다면 마교 내에서 구중련에게 반기를 든 세력들과도 접선할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진무량이 여도강과의 접선을 명령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무량의 최종 목표는 천군위를 따르는 세력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마교의 주인을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은밀히 마교 내부에서부터 힘을 길러 단숨에 교주 자리를 빼앗았던 구중련의 방식을 똑같이 되돌려 줄 계획이었다.
연시우가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진무량을 재촉했다.
“여도강 측에서 보낸 접선 시일을 맞추려면 지금 즉시 출발하셔야 합니다.”
여도강 측에서 일방적으로 접선 시간을 전해온 것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먼저 연락을 해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구중련의 손아귀에 떨어진 마교 내에서 활동하면서도 꼬리가 잡히지 않은 그들을 멸천대가 찾아내기는 사실상 불가능.
즉, 향후 마교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여도강과의 접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었다.
진무량은 그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유서하는 일부러 기척을 내면서 객잔의 문을 열었다.
유서하의 모습을 확인한 진무량이 연시우를 향해 말했다.
“잠시 나가 있어.”
“알겠습니다.”
연시우는 대답을 마친 후에도 조금 더 진무량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연시우의 기척이 사라지자,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밖에서 다 들었지?”
“네. 미룰 수 없는 급한 볼일이 있는 것 같더군요.”
살짝 고개를 틀어 시선을 피하는 진무량을 향해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맹주님의 결정을 들었으니 저도 비천검문으로 돌아가 봐야 해요.”
“…….”
진무량은 여전히 유서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막한 침묵 속에서 유서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제가 비천검문으로 가지 말까요?”
진무량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각 대답했다.
“어.”
유서하 또한 몹시 안타까운지 살짝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진무량은 답답한 듯 한숨을 길게 뱉어내고서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이 사실을 네게 말하기가 망설여졌던 거야.”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무량은 마교로 유서하는 비천검문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유서하를 납치해서 곁에 두고 싶었다.
허나 억지로 유서하를 곁에 두었을 때 그녀가 느낄 괴로움을 알고 있었기에, 그 방법은 불가능 했다.
여태껏 깊이 남의 심정 따위를 헤아리려 했던 적은 없었다. 제멋대로인 인생에서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유서하였다.
어느새 나 자신보다도 그녀가 더 소중해졌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유서하가 웃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생판 모르는 타인이 자신의 인생보다 더 소중해진다. 이건 정말 유서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유서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제가 언제나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비천검문이 위기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당신을 찾아갈게요. 아버지께 정식으로 허락도 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진무량은 성큼성큼 유서하를 향해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알았어.”
진무량은 유서하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이별의 슬픔을 감추던 유서하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진무량의 허리를 꽉 안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주 안은 두 사람에게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진무량의 품속에 안긴 유서하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말했다.
“그럼 이제 놔주셔야죠.”
“언제나 몸조심해야 돼. 네가 다치면 내가 곧바로 비천검문을 멸문시키러 가겠다고 유월천에게 똑똑히 전해.”
“뭐예요. 그건 협박이잖아요.”
“그래. 걱정이나 위로로는 지금 내 심정을 다 못 전하겠어. 그러니까 내가 제일 잘하는 협박을 할 거야.”
유서하와 눈을 맞추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언제나 너는 네 안위보다 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너를 지키지 못한 놈들은 내가 다 죽일 거야. 그러니까 너를 제일 우선으로 생각해.”
“알겠어요. 실수라도 다치지 마세요. 당신 없이는 이제 저 못 살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진무량은 천천히 유서하를 안고 있는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긋이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래. 기다기기 너무 힘들 것 같으니까 비천검문을 구하는 즉시 나를 찾아와야 해.”
“알겠어요. 그리고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협박 말고 진심을 전하는 법도 알려 줄게요.”
유서하는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헤어지는 순간에 힘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무량 또한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다시 만나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
진무량과 인사를 나눈 뒤 유서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객잔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기에.
홀로 남은 진무량은 객잔 밖에서 대기 중인 연시우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연시우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너는 대원들을 이끌고 서하를 따라가라.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을 생각하되, 비천검문에도 적당히 협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진무량이 내린 명령에 연시우는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런 연시우를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했다.
“나에게 금제를 건 검선에게 원한이 남아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허나 구중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비천검문을 지켜내야 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느냐?”
“……명을 따르겠습니다.”
진무량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연시우는 즉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연시우를 유서하에게 보내자 진무량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마교로 향해 길을 떠나기 전, 진무량은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교에서 쫓겨 나왔을 때는 오직 구중련을 무너뜨리겠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영사문을 찾아 그 동안 이를 갈며 세웠던 계획들을 하나씩 실현해 갔다.
허나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사파와 무림맹이 힘을 합쳤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구중련도 가만있지는 않을 터.
그때부터 진정으로 천하의 패권을 가를 전쟁이 시작될 것이었다.
마음을 굳게 다잡은 진무량은 다시 한번 마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