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협상
2018.04.05.
진무량은 연시우를 비롯한 멸천대원들을 이끌고 무림맹 정문을 통과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견무겸은 덩그러니 남겨진 유서하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견무겸은 진무량이 떠난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 유서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감정은 곧 진무량을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잔뜩 화가 난 견무겸은 진무량의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진무량은은 처음부터 아가씨를 이용대상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허니 아가씨께서도 그 따위 놈을 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놈이 아가씨를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었어.”
무작정 진무량의 앞에 나섰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성을 되찾고 진무량을 마주하다 보니 곧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겉과 다른 진무량의 속마음이 느껴졌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유서하의 눈에 비친 진무량은 너무나도 아픈 모습이었다.
진무량이 감추고 있는 내면은 괴로움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유서하가 마음이 쓰이는 건 진무량이 느낄 자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상처 줬다고 여기며 분명 스스로를 탓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진무량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려 왔다.
자신이 힘든 건 상관없지만, 진무량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진무량이 직접 무림맹을 찾아온 데는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을 터.
조급함으로 인해 진무량의 계획을 망칠 수는 없었다.
유서하가 견무겸을 향해 말했다.
“먼저 돌아가 있어. 나는 해야 할 일을 마치고 갈게.”
* * *
정문을 지나 무림맹 내부로 들어온 진무량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곁에 있는 연시우를 향해 물었다.
“방금 나,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
진무량이 건넨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연시우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상한 점을 못 느꼈으면 됐다.”
사실 예상치 못하게 유서하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당황한 쪽은 진무량이었다. 정말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고, 다행히 유서하와 재회했을 때 하려고 미리 준비했던 말을 전했다.
아마도 미리 전할 말을 생각해 두지 않았으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볼 일은 없겠지.’
우연히라도 유서하와 다시 마주친다면, 더 거칠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어서라도 그녀를 떼어 놓을 것이다.
이미 정나미가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의도한 방법은 성공한 셈이다.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씁쓸한 심정이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것 정도였다.
이내 진무량은 유서하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이제부터는 무림맹주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구중련을 토벌하기 위해 무림맹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만큼,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진무량은 망설임을 버리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림맹주 섭고명은 몸소 밖으로 나와 진무량을 맞이했다.
섭고명의 곁에는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휘를 비롯하여 무림맹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고수들이 즐비했다.
진무량 또한 연시우를 포함한 멸천대를 동반하고 있었으니, 위세적인 면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멸천대와 무림맹의 고수들이 대면하자 자연스레 숨이 턱턱 막히는 긴장감이 일었다.
두 세력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없이 반목했던 사이였기에, 서로를 향한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살 떨리는 긴장감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무림맹주 섭고명이었다.
“귀혈악인과 멸천대를 무림맹 안에서 마주하게 되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구먼.”
진무량이 멸천대원들 사이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그건 서로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진무량과 섭고명의 말 속에는 큼지막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섭고명은 단번에 진무량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를 유도해 조금 더 그를 떠볼 생각이었다.
“영사문에서 자네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왔네. 무림맹과 손을 잡기 위해 협상을 하러 온 건가?”
“협상이라,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군.”
진무량은 더 이상 쓸데없는 신경전을 원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본론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협상만을 위해 찾아온 건 아니야. 협상이 결렬된다면 그 순간, 선전포고를 전할 예정이지.”
대화를 듣고 있던 무림맹의 고수는 더 이상 진무량의 건방진 태도를 두고 보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무림맹 무인의 모욕적인 언사를 참을 연시우가 아니었다.
“사리분별을 못하는 놈이군. 목이 잘린 다음에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을까.”
무림맹의 무인들은 동시에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에 맞서 연시우도 당장이라도 흡마공을 펼칠 수 있도록 왼손의 내공을 집중시켰다.
진무량은 연시우를 흘깃 노려보며 물러서라는 뜻을 전했다. 섭고명 역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무림맹 무인들을 진정시켰다.
흉흉한 분위기가 조금 수그러들자, 섭고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사파의 무리들과 손을 잡지 않는 이유를 자네가 몸소 보여 주었군. 언제 등을 칠지 모르는 상대와 어떻게 힘을 합친단 말인가?”
진무량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받았다.
“그런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난 이런저런 구실을 핑계 삼아 제 뜻도 제대로 정하는 못하는 놈들을 기다려 줄 정도로 여유로운 성격이 못돼서 말이야.”
진무량은 한껏 커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파는 지금 구중련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뜻을 합쳤다. 무림맹과 힘을 합치고 싶은 이유는 그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 허나 무림맹의 존재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당연히 제거해야겠지.”
섭고명은 진무량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구중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방해되는 존재는 제거해야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더 이상 전할 말은 없겠군.”
진무량은 무림맹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흘. 그동안 아무 연락이 없다면 무림맹은 적이 되는 걸로 생각하지. 어느 쪽이 서로에게 득이 되는지 잘 판단했으면 좋겠군.”
용건을 모두 전한 진무량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무림맹을 나왔다.
이내 무림맹 인근을 벗어나자, 연시우가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정말 무림맹과 적대할 생각이십니까?”
“왜? 언제는 태연스레 무림맹을 부숴야 하는지 묻더니, 막상 겨룰 생각을 하니 두려운 것이냐?”
진무량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연시우는 여전히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대주의 생각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중요한 건 무림맹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아니다. 내가 무림맹을 찾은 진짜 이유는 그들이 선택할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이지.”
진무량은 자신의 언변으로 무림맹주의 결정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십 일 동안 마주 앉아 입씨름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무림맹 소속도 아닌, 원수처럼 지내왔던 자신의 말을 섭고명이 받아들여 줄 리가 없다.
허나 언제까지 손 놓고 무림맹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어느 쪽이든 무림맹의 입장을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만약 무림맹이 정말 자신과 힘을 합칠 생각이 없다면, 구중련을 부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반대로 무림맹과 힘을 합친다고 해도 그 시기는 빠를수록 이롭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무림맹의 확실한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무량은 그 뜻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어떤 식으로든 무림맹은 사흘 내로 뜻을 밝힐 테니까.
어쨌든 이제 남은 건 사흘 동안의 지루한 기다림뿐이었다.
진무량이 연시우를 향해 말했다.
“대원들은 적당한 객잔을 정해서 쉬게 해. 그에 관련된 일은 네게 일임하겠다.”
“맡겨 주십시오.”
이윽고 진무량은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에 들어서기 전에 진무량이 연시우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좀 쉬고 싶구나.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 * *
구름이 없어 유난히 달빛이 빛나는 밤이 찾아왔다.
유서하는 무림맹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진무량을 지켜봐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진무량이 머무는 객잔으로 향했다.
그동안 유서하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진무량이 세운 계획이 차질이 생길까 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시간도 늦었고, 진무량이 객잔에 오래 머무르는 것으로 보아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없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유서하가 진무량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연시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연시우는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유서하에게 경고를 전했다.
“오늘은 대주를 만나실 수 없소.”
“급한 일을 하고 있는 건가요?”
“휴식을 취한다고 하셨소. 허나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경계해야 할 상대라면 이런 설명도 보태지 않았겠지만, 연시우는 유서하이기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연시우는 유서하가 진무량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비천검문으로 떠났음을 알고 있었다.
유서하는 재차 연시우를 향해 부탁했다.
“비켜 주세요. 잠깐만 만나면 돼요.”
유서하는 진무량이 무림맹을 찾은 목적도 모르고, 무엇보다 언제 떠날지도 알 수 없었다.
즉, 지금 놓친다면 정말 다시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유서하는 절대 진무량이 쉬고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시우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그럴 수 없소. 돌아가시오.”
완강한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연시우를 바라보던 유서하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제게 갚을 빚이 있잖아요. 그 빚 지금 갚으세요.”
순간 연시우의 몸이 움찔거렸다.
유서하가 말하는 빚이 무엇인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일전에 부상당한 멸천대와 함께 있을 때, 유서하는 추연희를 지키기 위해 싸워 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유서하 앞에서 빚을 갚겠노라 호언장담했던 사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빚은 다음에 갚겠소.”
방금까지 완고했던 연시우는 한풀 그 기세가 누그러졌다. 물론, 유서하는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다음이 언제죠?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처음부터 말만 하고 빚을 갚을 생각은 없었던 건가요?”
꼬치꼬치 캐묻는 유서하의 물음에 연시우는 무엇하나 대답할 수 없었다. 이내 연시우가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을 어기면 나는 대주께 죽을 수도 있소.”
“저는 정말 죽을 뻔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
연시우는 유서하가 맹사의 한빙신장을 맞고 사경을 헤맸던 모습을 떠올렸다.
난처해하는 연시우를 향해 유서하는 간곡한 진심을 전했다.
“제가 진무량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계시잖아요. 부디 한 번만 그를 만나게 해 주세요.”
연시우는 더 이상 유서하의 절실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주를 만나면 술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해 주시오.”
영문을 모르는 유서하는 의문을 내비쳤다. 길을 비켜 주며 연시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객잔으로 들어가 보면 알 것이오.”
* * *
진무량은 번화가에서 떨어진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비록 손님이 많지 않은 객잔이었지만, 규모는 여타의 객잔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넓은 공간은 식당으로 사용하는 일 층이었다.
허나 그 넓은 식당은 지금 속이 텅 빈 술병으로 인해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식탁을 가득 메운 건 물론이고,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들로 인해 지나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토록 많은 술병을 비운 건 객잔의 유일한 손님인 진무량이었다.
진무량은 단숨에 술을 들이켜며 순식간에 또 하나의 가득 찬 술병을 비워 버렸다.
그는 한껏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술을 마시면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취한다. 심지어 객잔을 술병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으니, 취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젠장.”
진무량은 취기어린 목소리로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혼자 있다 보니 머릿속에는 유서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서하가 보이지 않을 때는 간신히 버텨 왔는데, 다시 마주하게 되니 도저히 술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진 그녀와 떨어져 있는 동안이 가장 힘들다고 여겨 왔는데, 그 생각은 틀렸다. 가까이 있는 유서하를 찾아가지 못하는 지금이 훨씬 더 죽을 것 같으니까.
달그락. 달그락.
그때 유서하가 바닥에 가득한 술병을 가로지르며 진무량을 향해 다가왔다.
유서하는 셀 수 없이 널브러진 술병들을 바라보며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이게 다 뭐예요? 설마 이걸 혼자 마신 거예요?”
진무량은 반쯤 감긴 눈으로 유서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배시시 웃었다.
“또 환영이냐?”
진무량은 눈앞의 유서하를 자신이 술에 취해서 환영을 보는 것이라 여겼다. 그토록 심한 말을 했는데 그녀가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밖은 연시우가 철통처럼 지키는 중이었다. 연시우가 명령을 어기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무량은 비틀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내가 이래서 술을 안 마셨던 건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취기가 오른 진무량은 유서하의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환영 주제에 되게 시끄럽네.”
진무량은 손을 뻗어 유서하의 긴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러고는 단숨에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유서하와 입술을 맞췄다.
거칠어진 그녀의 숨이 피부에 닿았고, 터질 듯이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없이 유서하의 입술을 탐했다.
진무량은 맞닿았던 입술을 떼면서 눈앞에 있는 유서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갑자기 그녀가 사라질까 봐 불안해진 진무량은 유서하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는 마. 조금 더 이대로 있어.”
유서하를 만났을 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눈앞에 보이는 건 환영일 뿐이니까.
진무량이 유서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다. 네가, 미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