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04화 (104/143)

104화. 거짓

2018.04.01.

묵소정은 어깨부터 손목에 이르기까지 한 차례 몸을 풀었다.

“이제 시작할게. 잘 봐야 해, 할아버지.”

“오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잘 보고 있으마.”

묵위현의 대답을 들은 묵소정은 자연스레 몸의 힘을 뺐다. 그러자 차츰 긴장됐던 근육들이 부드러워지면서 유연해져 갔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준비를 끝낸 묵소정은 손에 쥔 붉은 천을 굳게 쥐었다.

순간, 묵위현의 눈빛도 신중하게 변했다.

평소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묵소정에게서 무인으로서의 투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펄럭!

묵소정은 팔을 크게 휘둘러 손에 쥔 붉은 천을 넓게 폈다. 그 움직임은 묵위현에게 전수받은 신풍추월(新風追月) 초식의 시작부분이었다.

묵소정은 붉은 천에 내력을 실어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순식간에 길게 뻗어나가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몸 주위를 둥그렇게 감쌌다. 또한 동작이 변하는 사이사이가 조잡하지 않고 흐르는 물결처럼 자연스러웠다.

묵소정의 움직임은 점점 격렬해졌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몸짓에 따라 붉은 천은 더욱 요란스럽게 흩날렸다.

묵소정은 남은 내력을 모두 붉은 천에 실었다. 그에 따라 나풀거리던 붉은 천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단단하게 굳은 붉은 천은 위에서 아래로 곧게 떨어져 내렸다.

쉬익!

묵소정의 마지막 일격에서는 내력이 실린 바람이 느껴졌다. 비록 찰나의 순간 동안 나타난 현상일 뿐이지만, 묵위현이 그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적당히 호신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가르치려 했거늘…….’

흔히 검을 익힌 자들이 검풍(劍風)이라 부르는 경지에 묵소정이 다다랐음이 틀림없었다.

묵소정의 성장 속도는 상식의 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천을 이용한 묵위현은 무공은 익히기가 특히나 까다로운 편이었다.

여타의 병장기들과 달리 천은 그 정해진 형태가 없다. 그러다 보니, 천을 통해 원하는 형태를 이루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룬 형태에 따라 공격과 방어를 취하는 움직임 또한 모두 제각각이다. 조금만 엉성하게 움직여도 초식 자체가 조잡해져 버리니, 실로 난해한 무공이었다.

무공의 진입 자체가 난해한 대신에, 천을 통한 무공은 자유자재로 응용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경지에만 오른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을 활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취를 보인다.

숱한 무림인들을 겪어 본 묵위현은 묵소정이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여태껏 자신이 지도한 수많은 무인들을 모두 합쳐도 묵소정이 무공을 익히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나를 뛰어넘을 재능일 수도 있겠구나.’

묵소정의 재능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장차 무림을 이끌어 나갈 여걸이 되기보다 소소한 삶을 살길 바랐으니까.

묵소정은 발랄한 목소리로 복잡한 생각에 잠긴 묵위현을 깨웠다.

“할아버지! 왜 대답이 없어?”

“음? 뭐라고 했더냐?”

“내가 펼친 초식이 어땠어? 완벽했지? 흠잡을 데 없지?”

묵위현은 괜한 헛기침을 하고선 대답했다.

“으흠, 그래. 딱히 문제될 부분은 없었다.”

“그럼 나 강해진 거 맞지?”

까불거리길 좋아하는 묵소정이었으나 무공을 배울 때만은 진지했다. 묵위현은 그런 손녀가 대견하기도 하여 격려해 주려 했다.

“그래, 그동안 참 고생이…….”

한창 신이 난 묵소정은 단박에 묵위현의 말을 잘랐다.

“강호에 내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몇 명이나 있으려나? 헛, 설마……. 이러다가 나 천하제일인이 되는 거 아니야?”

묵위현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잠시 느꼈던 대견함도 싹 사라져 버렸다.

묵소정이 초식을 펼칠 때 잠시 달라 보였으나, 이렇게 보니 분명 천방지축 손녀가 확실했다.

묵위현은 턱도 없다는 듯, 근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정도 무공을 익힌 무인은 강호에 널렸다. 넌 아직 삼류에 불과해.”

“엥? 삼류? 내가 아직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럼! 허니 절대 남에게 네 무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너는 물론이고, 영사문까지 얕잡아 볼 것이 분명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칫, 알았다고요.”

묵위현은 언제 신났었냐는 듯, 풀이 팍 죽은 묵소정을 바라보았다.

의기소침한 그녀가 안쓰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묵소정은 결코 삼류무인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니,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할까 봐 일부러 거짓말로 둘러댄 것이다.

‘재능이 너무 뛰어나도 걱정이구나.’

묵위현이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을 때, 영사문의 무인이 접근해 왔다. 그는 묵위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에 서찰을 건넸다.

영사문의 무인이 건넨 서찰을 받아들며 묵위현이 물었다.

“누가 보낸 서찰이냐?”

“진 소협께서 보냈습니다.”

예상치 못한 진무량의 서찰에 묵위현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내 그가 말했다.

“알겠다. 너는 이만 가 보거라.”

무인은 짧게 묵위현에게 짧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 걸어갔다.

묵위현은 진무량이 쓴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묵소정은 얼른 묵위현의 곁에 달라붙으면서 말했다.

“오라버니가 무슨 일로 서찰을 보냈대요? 혹시 저한테 남긴 말은 없어요?”

서찰을 읽던 묵위현은 슬쩍 눈을 돌려 묵소정을 쳐다보았다.

서찰 속에 묵소정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면 분명 섭섭해할 터.

“그래, 네가 잘 지내는지 아주 걱정하고 있구나.”

묵위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으나, 눈치 빠른 묵소정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손녀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만 받아 둘게요.”

“이 녀석이…….”

겸연쩍어하는 묵위현을 뒤로하고 묵소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틈을 안 준다니까.”

솔직히 섭섭한 심정도 없진 않았으나, 전혀 여지를 안 주는 것이 진무량 나름의 배려임을 묵소정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확실한 태도를 보였기에 진무량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었으니까.

묵소정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오라버니가 뭐라고 적었어요?”

“담판을 짓기 위해서 무림맹으로 직접 찾아간다고 하는구나.”

진무량은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에 서찰을 적어 영사문으로 보냈다. 무림맹과 힘을 합치는 건 영사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미리 자신의 행보를 전한 것이었다.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중, 순간 묵위현이 의문을 나타냈다.

“음…….”

“왜요? 무슨 일인데요?”

“강호에 소문을 하나 내 달라고 하는구나.”

“소문이요?”

“그래, 진무량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려 달라는군. 이 소문도 그가 꾸미는 계획의 일부분이겠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근데 소문의 내용이 참 어이가 없네요. 오라버니가 쉽게 죽을 리 없잖아요.”

묵위현은 서찰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런 소문을 내 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구나.”

사파의 세력들을 규합하는 일은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됐다. 더 이상 영사문을 위협할 만한 힘을 지닌 세력은 없었고,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도 성공했다.

구중련의 횡포는 확실히 도를 넘어섰다. 특히 거대세력인 흑진방이 구중련의 소행으로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사파에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사문은 구중련 토벌의 뜻을 내세워 사파의 세력들을 규합했고, 앞장서서 구중련의 첩자들 또한 색출해 냈다.

사파는 이미 구중련과 맞설 준비를 끝냈다. 나머지는 나설 때를 기다리는 것뿐.

묵위현은 진무량을 돕는 일이야말로 결전의 때를 앞당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묵위현이 묵소정을 향해 말했다.

“할아비는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이제부터 바빠질 것 같구나.”

* * *

영사문은 강호의 정보단체들을 접선하여 진무량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인력과 돈을 충분히 지급했기에, 소문은 날로 강호에 퍼져 나갔다.

진무량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헛소문이라 여겼고,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그 소문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허나 멸천대는 달랐다.

마교를 벗어나면서 진무량이 내렸던 결코 잊을 수 없는 명령.

천하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소문으로 퍼질 때가 바로 집결의 순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두.

땅이 터질 듯이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자욱한 먼지.

멸천대의 이 조장 연시우는 선두에서 기마를 달렸고, 검은 갑주를 입은 수십 명의 멸천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서둘러라.”

연시우와 멸천대원들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강호에 퍼진 소문을 듣는 순간, 진무량이 보내는 집결 신호라는 눈치챘다.

연시우는 즉시 소문의 출처를 찾아 나섰고, 곧 영사문에서 파견된 무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애초에 영사문은 소문을 낸 사실을 버젓이 드러냈기에, 연시우가 그들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영사문의 무인들은 지시받은 대로 연시우에게 진무량의 위치를 알렸다. 그 즉시 연시우와 멸천대원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진무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대로를 질주하던 연시우의 눈앞에 익숙한 신형이 보였다.

그동안 한순간도 잊은 적 없던 진무량의 모습이었다.

연시우는 즉시 고삐를 쥐어 말을 멈추게 했다. 뒤를 따르던 멸천대원들 모두 멈추자, 연시우가 대표로 인사를 건넸다.

“멸천대 이 조장 연시우. 대주님의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내가 보낸 신호를 용케 알아챘구나.”

“대주께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소문을 퍼뜨려 주신 덕분입니다.”

늘 그렇듯 진지한 표정을 짓는 연시우에게 진무량은 특유의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윽고 진무량의 시선이 집결해 있는 멸천대원들을 향했다.

“너희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쿵!

멸천대원들은 손에 쥔 창을 바닥으로 찍어 진무량의 대답을 대신했다.

마교를 떠난 뒤부터 썩은 쓸개를 핥고, 가시나무 위에서 자는 심정으로 견뎌 왔다.

눈을 감으면 억울하게 쓰러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구중련의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무슨 음식을 먹든 피 맛이 났다.

연시우와 멸천대원들은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오로지 복수를 이루기 위해 보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모두 모여 집단전을 단련했고, 밤이 되면 각자 흩어져 무공을 수련했다.

숱한 사지를 함께 헤쳐 나가다 보면 굳이 말로 표현하자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

진무량은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멸천대원들의 마음가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연시우가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다른 조장들은 아직 입니까?”

“놈들에게는 다른 명령을 내려 두었다.”

연시우와 달리 위지운과 주백기는 진무량이 부른 장소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소문을 전해들은 두 조장은 영사문을 통해 진무량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알렸고, 진무량은 서찰을 통해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명령을 내렸다.

연시우는 멸천대가 모두 모이지 않은 것으로 진무량의 생각을 얼핏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 아직 구중련을 짓밟을 때는 아니겠군요.”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한 걸음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마지막 남은 일을 처리하러 갈 예정이다.”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무림맹이다.”

무림맹은 그야말로 정파의 성지. 멸천대는 물론, 무림공적인 진무량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연시우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먼저 무림맹을 부숴야 하는 것입니까?”

상대가 무림맹이라고 한들 망설이지 않는 연시우의 모습이 진무량은 흡족했다.

“기합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잖아. 뭐, 그런 자세가 싫지는 않지만……. 어쨌든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가면서 하도록 하지.”

진무량의 시선이 연시우에게서 늠름한 멸천대원들로 옮겨갔다.

이윽고 진무량의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나를 따라와.”

* * *

유서하는 유월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견무겸과 함께 무림맹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경공을 펼친 두 사람은 무림맹에 도착했으나, 무림맹주 섭고명을 접견하지 못했다.

좋지 못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유서하를 향해 견무겸이 물었다.

“오늘도 맹주님을 뵙지 못한 것입니까?”

“응. 업무가 바쁘셔서 오늘은 힘들 것 같아.”

섭고명에게는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대부분의 업무는 구중련의 관련된 것들이었다.

구중련의 진격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움직임까지 모두 미리 파악해야만, 그에 따른 올바른 대처를 할 수 있다.

무림맹 소속의 정보단체들은 모두 구중련에 대한 보고를 전했고, 무림맹주 직을 수행하는 섭고명은 그 정보들을 모두 확인하여 처리해야 했다.

하여 섭고명은 미리 약속이 되지 않은 접견객들을 모두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서하 또한 현재 무림맹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기에, 자신의 용건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무림맹의 군사 제갈휘를 만나 현재 비천검문의 위급한 사태를 전했으니 곧 연락이 올 터. 그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유서하가 견무겸을 향해 말했다.

“우선은 돌아가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와야겠어.”

“알겠습니다.”

유서하와 견무겸이 돌아가려 할 때, 주변이 급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웅성 웅성.

의문을 느낀 유서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곧 머지않은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무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 게야? 숨 좀 돌리고 천천히 말해 보게.”

“허억 허억.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놈들이 이리로 오고 있다니까!”

“그러니까 놈들이 누구냐고?”

“멸천대 말일세! 귀혈악인이 직접 그 악귀놈들을 이끌고 밖에 와있다니까!”

대화를 엿듣던 유서하는 놀란 감정을 내보이듯 동그랗게 변한 두 눈을 치켜떴다.

그 뒤로는 머리가 멍해져, 무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걱정, 그리움, 불안, 기대 등등, 오만가지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오히려 멍해져 버렸다.

들리는 소리가 없어지고 나서는 주변에 보이는 사물들도 사라져 버렸다.

이내 머릿속까지 백지로 변해 버리자, 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무작정 진무량을 만나기 위해 무림맹의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미 단 한순간만이라도 진무량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잠식해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태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길을 무작정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유서하는 차츰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진무량이 보였다.

하얗게 변한 유서하의 시야 속에는 오직 진무량만이 존재했다. 그 외에 주변의 사물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서하는 천천히 한 걸음씩 진무량을 향해 걸어갔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으니까.

“너 뭐야?”

그때 진무량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제야 유서하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주변에 사물들과 진무량의 곁을 지키는 멸천대원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윽고 유서하의 시선이 다시 진무량을 향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진무량의 눈빛은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마치 원수를 눈앞에 바라보는 것처럼 날카롭게.

진무량은 유서하를 노려보며 고저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를 냈다.

“제 발로 떠난 주제에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지?”

“…….”

유서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달려왔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유월천의 금제가 풀리면서 너와의 관계는 끝났어. 더 이상 넌 내게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야.”

진무량은 유서하를 어깨로 밀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니까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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