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전야
2018.03.15.
진무량은 치열했던 적무혁과의 결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적무혁은 사파를 침공한 구중련의 무인들에게 있어 실질적인 우두머리임과 더불어 정신적인 지주. 그런 적무혁이 쓰러졌다는 사실은 구중련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집단이라고 한들,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
주인을 잃고 분노한 불귀대는 격렬하게 날뛰었으나, 냉철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영사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간 힘을 보존했던 묵위현이 정면에 나서자, 구중련의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결국은 사파를 침공한 구중련의 무리들은 각자 흩어져 마교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즉, 결과적으로 영사문은 구중련을 크게 격파한 것이었다.
이 소식은 강호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결국 무림맹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단출한 느낌의 방 안. 가구라곤 두 명이 간신히 앉을 수 있는 다탁이 전부였으나, 워낙 방이 좁아 빈 공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은 무림맹주 섭고명이 고민이 깊을 때 찾는 장소인 향월각이었다.
섭고명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허름한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정갈하게 복식을 갖춘 그는 무림맹의 군사 제갈휘(諸葛輝)였다.
제갈휘가 섭고명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기에 여기 계실 줄로 짐작했습니다.”
“내 이곳을 있을 때만은 찾지 말라 했거늘.”
무릇 한 일파를 이끄는 수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수렴해 합당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무림맹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은 강호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인 만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각기 다른 의견들을 조율해야 했다.
당연히 섭고명은 거의 모든 시간을 인파에 둘러싸여 지내야 했다.
향월각 내의 좁은 방 내부는 섭고명이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홀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찾는 장소였다.
주변 시선을 피하고 싶을 때 찾는 장소인 만큼, 제갈휘를 제외하면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조차 향월각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제갈휘 또한 섭고명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으나, 급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보니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사태는 제갈휘의 굳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를 향해 섭고명이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무림맹 소속 밀운사(密雲社), 통천암(通天庵), 창궁문(蒼穹門)이 마교의 공격을 받아 잇따라 멸문했습니다. 생존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바, 살아남은 자는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섭고명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무림맹을 향해 진격을 시작한 구중련은 연전연승을 거듭해 나갔다.
긴 세월 외지에서 힘을 기른 마교 무인들의 존재는 분명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밀운사, 통천암, 창궁문은 무림맹의 속한 중소문파들과 달리 한 지역을 대표하는 거대 문파. 제아무리 마교 전체가 움직였다고 한들,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질 문파들은 분명 아니었다.
“쉽게 납득할 수가 없구나.”
섭고명은 눈짓으로 제갈휘에게 더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어렵지 않게 섭고명의 뜻을 이해한 제갈휘가 보고를 이어 갔다.
“구중련을 상대함에 있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첩자의 존재입니다. 앞서 보고했던 문파들 모두 내부의 적으로 인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음지에 숨어 대업의 때를 기다렸던 구중련. 영겁의 세월을 견디며 그들은 천하일통이란 야욕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두었다.
그중에서도 구중련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바로 첩자였다.
천하 각지에 은밀히 숨겨 둔 구중련의 첩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 소속된 곳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전장에서 믿었던 동료의 배신보다 큰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긴 세월 함께했던 동료의 배신은 제아무리 거대 문파라 하더라도 치명적으로 작용했을 터. 게다가 첩자로 지내면서 문파 내부의 약점들을 속속들이 꿰뚫었음이 분명했다.
지금부터라도 첩자가 숨어 있다는 소식을 널리 알린다면 앞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해결하지 못할 난제가 남아 있다.
첩자의 존재를 의심하다 보면 무림맹의 결속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첩자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서로를 믿고 싸울 수 있겠는가.
‘시급한 문제는 첩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당장 첩자를 찾아내는 데 전력을 쏟고 싶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존재를 숨겨 온 첩자를 이제 와서 쉽게 색출해 낼 수는 없을 터.
무엇보다 내실을 다지는 시간 동안 구중련의 공세를 막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섭고명이 말했다.
“첩자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지원은 무의미하다. 무림맹의 속한 모든 문파들은 우선 구중련의 첩자를 색출해 내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라고 전하거라.”
“당장 마교의 공세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마교의 진격로에서 인접한 문파들을 따로 모아서 임시로 대처한다.”
제갈휘는 머릿속으로 마교의 진격로에서 가장 가까운 거대문파를 떠올렸다.
거리도 문제지만 마교의 진군을 잠시라도 막아 낼 만한 무력을 보유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문파를 떠올리던 중, 제갈휘의 눈빛이 번뜩였다.
다행히 모든 조건의 적합한 문파가 한 군데 있었다.
그 문파의 문주는 칠무제 중 한 명이자, 강호에서 검을 쓰는 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인물.
“맹주님의 뜻을 비천검문에 알리겠습니다.”
섭고명 역시 비천검문을 염두에 두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제갈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찰은 내 직접 쓰겠다. 그대는 가장 빨리 비천검문으로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제갈휘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향월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섭고명은 다탁 위에 놓여 있던 붓을 집었다.
‘미안하네. 무리한 요구임은 알고 있으나, 당장 마교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네.’
비천검문이 얼마나 버텨 주느냐에 따라 앞으로 전쟁의 판도가 크게 달라질 터. 그들이 허무하게 쓰러진다면 어쩌면 남무림 자체가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계산해 봤을 때, 당장 취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음은 분명했다.
허나 너무 무거운 짐을 떠맡긴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섭고명은 지금 느끼는 심정과 현 사태의 심각성을 붓을 통해 옮겨 적었다. 그렇게 흰 종이에는 정성스레 쓰인 글씨가 가득 메워졌다.
* * *
비천검문의 태상장로 장백령은 집무실로 견무겸을 불러들였다.
장백령은 속내를 감추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요새 서하는 잘 지내느냐?”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장백령을 향해 견무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예전처럼 문도들과도 잘 어울리고 계시며 무공 수련도 열심히 이십니다.”
장백령 또한 유서하를 유심히 지켜봤기에, 견무겸의 언변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새는 밖으로도 자주 나오곤 했기에 안부 정도는 충분히 확인 가능했다.
장백령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묻는 게 아니네. 자네는 오랫동안 서하를 지켜보지 않았는가? 혹시 따로 알고 있는 점이 있는지를 묻는 걸세.”
잠시 멈칫거리던 견무겸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제 소견으로는 아가씨께서 일부러 밝은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이군.”
장백령은 스스로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이전과 달리 유서하를 지켜보고 있자면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높은 상공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아슬아슬한 기분이랄까.
그녀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한참 장백령이 고심에 빠져 있을 때, 집무실 문쪽에서부터 비천검문 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문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맹주님께서 친히 작성하신 서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장백령은 곧바로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음을 느꼈다. 무림맹주가 직접 서찰을 작성해 보내 왔다면 그 사안이 결코 가볍지 않을 터.
“급히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백령은 시름 가득한 목소리로 견무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앞으로도 서하를 지켜봐 주게.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망설이지 않고 말해도 되네.”
* * *
묵위현은 수하들을 이끌고 영사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힘겨운 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영사문의 무인들은 모두 한껏 고양된 상태였다. 밤에는 본인의 과장된 무용담을 수없이 떠들었으며, 또 누군가는 고성과 비슷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대승이라곤 해도 희생이 없을 수는 없었다.
영사문의 무인들은 동료의 희생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승리를 위해 물러섬 없이 싸우다가 쓰러진 동료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가슴속에 품었다.
우울한 감상에 빠지기보다 모두가 함께 바랐던 승리를 기뻐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영사문에 도착하자, 묵위현은 수하들의 노고를 달래기 위해 넉넉하게 술을 내렸다.
곧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다. 한참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묵위현은 따로 진무량의 처소를 찾았다.
묵위현이 진무량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오늘은 밤새도록 시끄러울 걸세. 자네가 이해해 주게.”
“상관없어. 이런 식으로 소란스러운 건 그리 싫어하지도 않고.”
진무량은 멸천대와 함께 숱한 전장을 누볐다. 그렇기에 영사문 무인들의 미묘한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무량을 향해 묵위현이 말했다.
“자네도 한잔 하지 않겠는가? 이번 승리의 주역이 청승맞게 혼자서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먼.”
“술은 됐어. 그보다 무림의 정세는 어때?”
“자네의 예상대로일세. 구중련을 상대로 무림맹이 고전하고 있어. 현재 구중련이 향하고 있는 곳은…….”
“거기까진 관심 없어.”
진무량은 비교한 두 세력의 역량은 호각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구중련을 한 수 아래로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의 고전을 예상한 것이다.
그 이유는 긴 시간 지속된 평화였다.
천하에서 가장 날래고 강인한 신체를 가진 호랑이라 해도, 오랜 시간 사냥을 하지 않으면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스스로 얼마나 빠른지 판단하지 못한다. 목덜미를 뜯어내던 이빨은 무뎌지고, 발톱을 휘두르는 방법은 잊어버린다.
무림맹이 호랑이라면 구중련은 늑대.
호랑이와 달리 늑대는 수백 년 동안 발톱을 가다듬으며 호랑이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무림맹이 고전하고 있음이 그 증거였다.
“무림맹도 곧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겠지.”
“그러기 위해선 우선 기세를 한번 꺾을 필요가 있겠군. 그렇다면 이번에 구중련과 대적하게 된…….”
“누가 대적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무림맹은 쉽게 무너질 정도로 그리 호락호락한 세력이 아니니까.”
호랑이는 잠시 사냥하는 법을 잊고 있을 뿐이다.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면 스스로 사냥하는 법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백 년 동안 늑대가 덤빌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호랑이로 변모할 터.
묵위현의 입에서 멋쩍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흠흠. 아까부터 계속 말이 끊기는군. 지금 구중련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별로. 어느 문파가 됐든 홀로 구중련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없을 테니까.”
“필히 많은 희생이 따르겠구먼.”
“그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거잖아.”
묵위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그랬지……. 그럼 비천검문은 큰 곤욕을 치르겠군.”
“뭐?”
갑자기 정색한 표정으로 묻는 진무량을 향해 묵위현이 설명했다.
“지금 구중련이 목표하는 대상이 바로 비천검문일세.”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신경질적인 진무량의 반문에 묵위현은 어이가 없었다.
“자네와 인연이 있는 곳인 것 같아서 아까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됐어. 아무래도 난 잠깐 여기를 떠나야겠군. 어차피 이제부터 당분간 내 도움은 필요 없잖아.”
이제부터 묵위현은 구중련에게 무너진 흑진방을 비롯해 사파의 세력들을 규합해야 했다.
무림맹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구중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영사문은 충분한 힘을 보였다. 이제부터는 무조건 힘으로 억압하기보단 여러 세력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더 중요할 터.
이 과정에서 마교 소속이었던 진무량의 도움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묵위현은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뭔가? 설마 비천검문을 도울 생각인가?”
진무량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갑작스레 비천검문이 공격받는 사실을 알았기에, 여러 가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한 가지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가야 해.”
진무량은 확고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 모습을 확인한 묵위현은 등에 걸친 적포를 벗어 진무량에게 건넸다.
“자네의 뜻이 무엇인지 묻지 않겠네. 다만 이걸 가져가게.”
적포는 그야말로 묵위현의 상징. 결코 남에게 건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나, 묵위현은 따로 생각한 바가 있었다.
진무량이 의문을 나타냈다.
“이걸 왜?”
“혹여나 이제부터 정파 놈들이 시비를 걸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차마 그 꼴은 두고 보지 못하겠군. 이 적포는 자네를 해하려는 놈들에게 보내는 나의 경고일세.”
적포를 건넨 의미는 진무량을 돕겠다는 확실한 묵위현의 의지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즉, 누구라도 진무량을 해치려 한다면 영사문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
진무량은 노골적인 의심을 보이는 눈초리로 묵위현을 흘겨보았다.
“갑자기 왜 이래? 난 누가 잘해 주면 의심부터 하는 성격인데.”
묵위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은혜와 원수는 확실히 갚는다. 그게 바로 나 묵위현일세. 자네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진무량의 손에 적포를 쥐여 주며 묵위현이 말을 이었다.
“여기 일은 걱정 말고 자네의 뜻을 이루게. 그 후에 다시 만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