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98화 (98/143)

98화. 서전 (3)

2018.03.11.

진무량의 주위로 흩날리던 묵색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마치 그를 중심으로 어둠이 퍼져 나가듯 일대 전체가 검게 물들어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한층 더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진무량에게 위협을 느낀 건 적무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강맹한 기운이라 한들, 먼저 쳐부수면 그만이다.’

적무혁은 반월도의 예리한 칼날을 진무량에게 향하게 했다. 그와 동시에 진무량을 향해 쏘아지는 적무혁의 신형.

얼핏 보면 무턱대고 달려든 것처럼 느껴지겠으나, 그의 움직임은 실로 신묘했다.

어느 정도 진무량과 거리를 좁힌 순간, 적무혁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형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잠시 동안 완벽하게 움직임을 멈춰 상대를 속이고, 단숨에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쳐 상대의 뒤를 잡는 보법.

찰나의 순간 동안 이뤄진 급격한 속도의 변화로 상대를 농락하는 보법. 적무혁의 절기 호적보(虎跡步)였다.

손쉽게 진무량의 뒤를 잡은 적무혁은 단숨에 반월도를 휘둘렀다. 휘어진 반월도의 궤적은 진무량의 허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캉!

적무혁의 반월도가 염옥창의 나무로 이뤄진 부분에 부딪쳤다.

진무량은 적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의 일격을 받아낸 것이다.

진무량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에 있는 적무혁을 흘겨보았다.

“한참 기분 좋았는데, 방해하지 마.”

심마에 빠진 상태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자,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감각들이 살아난 기분이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쫓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니, 그보다도 더 빠르다.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나아갈지 생각할 때부터 이미 그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

적무혁은 회심의 일격이 막혔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다음 공격으로 이어 나갔다. 다시 한번 펼쳐진 호접보.

더욱 빠른 속도로 근거리를 이동한 적무혁은 진무량의 어깨를 노리고 반월도를 내리찍었다.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이뤄진 공격이었으나, 진무량은 가볍게 상체를 비틀어 반월도를 흘려 보내버렸다.

“네 움직임이 뻔히 보여.”

진무량은 염옥창의 중간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위아래로 진동을 가하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위아래 흔들리기 시작한 기다란 염옥창은 점차 휘어졌다.

규칙적이지 않게 위 아래로 흔들리는 움직임은 지독한 환(幻).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수십 차례 적을 찌르는 움직임은 섬광 같은 쾌(快).

쾌 안에 환이 존재하니, 환은 곧 쾌가 되리라.

‘용형십삼식 구식 천예기환창(天藝奇幻槍)!’

위아래로 휘는 염옥창은 고스란히 적무혁을 향했다.

챙! 챙! 챙!

적무혁은 뒤로 물러나면서 반월도를 휘둘러 일일이 염옥창을 쳐냈다.

간간이 피해 내지 못한 일격들이 상처를 남기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생채기일 뿐. 적무혁은 완벽에 가깝게 진무량의 초식을 방어해 냈다.

허나 수없이 날아드는 염옥창을 언제까지고 방어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적무혁은 허공으로 몸을 띄운 채, 진무량과 거리를 벌렸다.

적무혁이 멀어지는 순간, 진무량의 입가에 불길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지금 스스로 거리를 벌려 준 건가?”

스스스스스!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진무량의 주위로 한층 더 짙어진 묵색 기운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묵색 기운은 점차 강기로 변해 갔고, 그 강기는 점차 용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윽고 선명한 비늘과 커다란 이빨을 지닌 묵색용이 진무량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었다.

“그 대가는 가볍지 않을 거야.”

똬리를 튼 묵색용은 염옥창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염옥창을 내뻗어졌을 때, 입을 쩍 벌린 묵색용이 쏘아졌다.

‘용형십삼식 팔식 묵룡출두!’

콰아아아아아!

쏘아진 묵룡은 주변 일대를 박살내면서 단번에 적무혁을 집어삼켜 버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곧 무시무시한 기세의 묵룡이 갈가리 찢어져 버렸다. 용의 형상을 띤 강기가 다시 흩날리는 묵색 기운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형체가 사라져 버린 묵룡이 있던 자리에서 적무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옷깃 정도만 찢어진 상태로 멀쩡한 모습 그대로였다.

“왜, 내가 너무 멀쩡해서 당황했느냐?”

적무혁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해서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스스로 연마한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듯이, 본좌 또한 평생을 갈고 닦은 무공에 자신이 있느니라.”

적무혁이 말을 마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산산이 흩어졌던 묵룡이 적무혁을 중심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진무량마저도 놀라움에 동공이 커졌다.

“자네가 익힌 절초를 스스로 한번 받아 보게.”

적무혁은 하늘을 향해 있던 손바닥을 진무량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묵색용이 진무량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진무량은 급하게 마공을 끌어올렸다.

‘피하기는 늦었다. 그렇다면 방어할 뿐.’

진무량은 끌어올린 마공을 몸 밖으로 둘렀다. 응집된 마공을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호신강기. 그것을 변형한 진무량의 독특한 방어법.

‘용형십삼식 사식 마신갑주(魔神甲冑).’

적무혁이 쏘아낸 묵룡은 진무량의 마신갑주를 꿰뚫지 못하고 비껴나갔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합을 겨루자,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렸다. 폭발의 여파로 여기저기 구덩이가 생겼고, 주변에 널려 있던 나무나 바위는 그 형체조차 없이 사라졌다.

적무혁은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백 장 밖으로 물러나 있거라.”

불귀대원들은 짧게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한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폭발의 연기 속에서 멀쩡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 진무량은 어깨의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번엔 나도 조금 놀랐어. 제법 신기한 재주를 지녔군.”

“네놈이 수백 번 되살아난다고 해도 익힐 수 없는 능력이니라.”

적무혁은 직접 창시해 낸 무공의 이름을 역린결(逆鱗訣)이라 불렀다.

역린결은 수백 년 동안 강호에 암약해 온 구중련의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긴 세월 동안 중원과 세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무공의 자료들을 모아, 그것들의 원리를 파악함으로서 시작된 무공.

각기 다른 방대한 무공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적무혁 또한 까마득한 선조들의 손을 거쳤기에 겨우 역린결을 익히게 된 것이었다.

역린결을 익힌 무인은 한번 본 무공을 그대로 재해석할 수 있으니, 그 어떤 무공이라 하더라도 똑같이 따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한번 본 상대의 초식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파악해 내니, 감히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게 되는 절대 방어의 무공.

적무혁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익힌 용형십식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아니, 그 어떤 무림의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야.”

“혀를 아주 제멋대로 굴리는군. 너무 큰소리치지는 마. 나중에 더 창피해질 테니까.”

찰나의 신경전을 마친 진무량과 적무혁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 시진이 넘도록 진무량과 적무혁은 치열한 승부를 벌였다.

서로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 수차례 오갔으나, 승패의 방향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진무량이 날린 천공포를 상쇄시키면서 튕겨나간 적무혁은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했다.

‘설마 이 정도로 이 몸을 애먹일 줄은 몰랐군.’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진무량은 교묘하게 피해 갔다. 또한 놈의 공격은 흘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의 뼈가 지끈거릴 정도로 큰 충격이 전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놈에게서 느껴졌던 불안감은 이유가 있었던 건가.’

처음 진무량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막연한 예감을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구중련의 대업을 방해할 가장 위협적인 자.

진무량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차고 넘쳤다. 수를 쫓아갈 수 없을 정도의 두뇌. 게다가 창을 쥐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정면에서 승부를 걸어온다.

그 어떤 누구라 한들, 이런 자와 대적하고 싶을까.

허나 진무량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존재임이 확실했다. 그렇기에 향후 가장 큰 골칫덩이가 될 진무량을 반드시 꺾어야만 하는 것이다.

진무량은 파상공세를 잠시 멈추고, 적무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네가 모시는 구중련주, 담무흔이라고 했던가? 그놈은 네놈보다 더 강한가?”

지쳐 있는 진무량의 목소리. 호흡을 가다듬은 적무혁이 그에 답했다.

“련주님께서는 감히 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시다.”

“그래? 그럼 나도 네깟 놈한테 고전해서는 안 되겠군. 담무흔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말이야.”

“헛소리. 너는 련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죽을 테니까.”

“그렇다면 구중련주를 죽이기 전에 네놈이 나를 막아 봐.”

결심을 확고히 굳힌 진무량은 천천히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는 정심한 정파의 기운과 거칠게 폭주하는 마공을 동시에 운용하기 시작했다.

상반되는 두 기운을 무리하게 운용하면 저번처럼 몸이 버텨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진무량은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정심한 내공을 소량만 운용했다. 그 상태로 서두르지 않고 들끓는 마공과 합쳐 나갔다.

스스스스스!

적무혁은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변한 진무량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에게선 지금까지 흩날리던 묵색 기운과 더불어 새하얀 기운이 넘쳐흘렀다.

이윽고 점차 두 기운이 합쳐지더니 황금빛으로 변해갔다. 뿜어지는 그 황금빛은 어찌나 찬란한지 감히 두 눈으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적무혁은 진무량이 내뿜는 기운을 모방할 수 없었다.

당황한 적무혁이 언성을 높였다.

“놈!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인 게냐! 이런 무공은 여태까지 강호에 존재하지 않던 것인데…….”

“네놈이 경험하지 못했음은 당연하지. 이 자리에서 내가 처음 창시해 낸 무공이니까.”

찬란한 금색 기운 속에 휩싸인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또한, 흘러간 과거에만 집착하는 네놈의 좁아터진 소견으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진무량에게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감히 맞서 싸우고자 하는 생각 자체를 꺾어 버릴 정도로 강대했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심정이 이러할까.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고, 시야를 가득 메운 천혜의 경관에 감탄밖에 할 수 없는 감정.

그만큼 진무량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은 초월적인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적무혁은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다잡고 십성의 내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잘난 척하지 말거라! 이 몸에게 네놈의 절기를 깨뜨릴 방법 따윈 얼마든지 있으니.”

역린결을 익히면서 수많은 무공의 원류를 파악한 적무혁. 그중에서도 그가 최강으로 꼽은 절기.

적무혁은 십성의 기운이 담긴 반월도를 대지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막대한 기운이 연속적으로 폭발해 나갔다.

“멸황파성포(滅皇破星砲)!”

콰과과과과광!

그야말로 천지가 요동쳤으나, 진무량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 염옥창을 쥐고 있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검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경지. 진무량은 완전한 신검합일에 경지를 이뤄 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알려 주지. 용형십식은 구식(舊式)이야. 내가 변형시킨 초식의 이름은 용형십삼식이다.”

‘용형십삼식 십일식 금린탈혼창(金鱗奪魂槍)!’

진무량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황금빛이 더욱 더 찬란해졌다. 이윽고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그 황금빛에 덮여 버렸다.

만물을 뒤덮은 황금빛이 사라지자, 척박한 황무지가 되어 버린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풀, 나무, 바위,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우뚝 서 있던 적무혁은 점차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련주님, 부디 천년대업을 이루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적무혁은 바닥에 두 무릎을 꿇으면서 쓰러졌다.

“크윽!”

힘이 풀려 버린 진무량은 염옥창에 의지해 간신히 섰다. 사력을 다한 그 역시, 이미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기운이 남지 않았다.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진무량 주위로 점차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적무혁의 명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던 불귀대원들이었다.

“노군!”

“네 이놈이……!”

숨이 끊어진 적무혁을 확인한 불귀대원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결국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진무량을 죽여 노군의 넋을 달래 드리자!”

성난 외침에 불귀대원들이 동조했다. 곧 수십 명의 불귀대원들이 진무량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펄럭!

그때 피처럼 붉은 망토가 바람에 흩날렸다.

“크악!”

“으아악!”

진무량을 향해 쇄도하던 불귀대원들은 묵위현이 흩뿌린 예기에 적중당해 모조리 숨이 끊어졌다.

진무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묵위현이 말했다.

“미안하군. 주변을 포위한 놈들을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어.”

“늦기는 무슨……. 예정된 시간에 도착한 거야.”

“훗. 여유로운 말투치곤 제법 고전한 것 같은데.”

“뭐, 어느 정도는.”

묵위현은 진무량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직 여기저기서 모습을 감추고 있는 불귀대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네는 이만 쉬게. 뒷일은 내가 맡겠네.”

진무량은 쌓인 피로를 뿜어내듯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

“그러지.”

묵위현은 자신을 따르는 영사문 무인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놈들은 수장을 잃은 떨거지들일 뿐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섬멸하라!”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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