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서전 (1)
2018.03.04.
임무를 위해 각지로 파견됐던 문도들은 묵위현의 명령을 받고 속속들이 영사문으로 모여들었다.
착실하게 힘을 모으며 흑진방을 공격할 준비를 하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 영사문에 전해졌다.
묵위현은 진무량을 찾아가 자신이 들은 소식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구중련의 손에 흑진방이 무너졌다고 하네. 뿐만 아니라 마교까지 움직이고 있는 실정일세.”
진무량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교와 무림맹의 전쟁은 예상대로잖아. 변수가 있다면 구중련이 흑진방을 먼저 친 정도군.”
구중련은 무림맹과의 전쟁에 집중하지 않고 사파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런 구중련의 행위는 명백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정과 사를 동시에 공격해도 승리할 수 있다는 절대적 자신감.
결과를 떠나서 생각했을 때, 구중련의 첫 번째 선택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위험성에 비해 성공했을 때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너무 크다.
시간이 지연된다면 구중련은 점차 기세가 꺾일 것이다.
마교의 무인들이 마음으로 구중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현재 강한 힘에 굴복할 상태일 뿐.
이런 상태로 지지부진하게 시일이 늘어진다면 딴 마음을 품는 세력들이 늘어나는 건 자명한 이치.
하여 개전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여 연전연승을 거둘 생각인 것이다.
승리를 이어 나간다면 마교 무인들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을 터.
게다가 무림맹은 결속력이 뛰어난 집단. 세력이 기울기 시작하면 그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무림맹의 강점을 무마시키고 구중련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최선의 수.
그것이 기선제압인 것이다.
진무량이 말했다.
“시작부터 강하게 밀어붙인다. 구중련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임은 확실하군.”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가?”
“이쪽도 물러서지 않아. 역으로 되받아쳐서 상대가 내민 최선의 수를 자충수로 바꿔 버려야지.”
큰 성과를 내는 방법일수록 실패했을 때 대가가 돌아가는 법.
“흑진방을 무너뜨린 놈은 누구지?”
진무량의 물음에 묵위현이 대답했다.
“얼마 전에 사대신마의 위에 오른 적무혁이라고 하네.”
묵위현은 적무혁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수하들을 영사문에 잠입시켜 수없이 흉계를 꾸몄던 적무혁. 기세에 눌려 그를 눈앞에 두고서도 놓아 줘야만 했던 그 무력감은 아직까지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투지를 내보이듯 주먹을 움켜쥔 채 묵위현이 말을 이었다.
“놈을 내보낸 걸 보면 구중련 놈들이 꽤나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묵위현의 예상은 정확했다.
무림맹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구중련도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즉, 사파를 공략하기 위해 지속적인 지원을 할 여력이 없다는 뜻.
하여 구중련주 담무흔은 사파를 멸망시키기 위해 가장 신뢰하는 수하인 적무혁을 선택한 것이었다.
진무량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표를 흑진방에서 적무혁으로 바꿔야겠어.”
흑진방은 이미 적무혁과 구중련 일당들에게 와해되어 그 힘을 잃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들과 맞서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흑진방을 멸문시킨 적무혁을 처단한다면 힘을 잃은 흑진방은 물론, 나머지 사파의 세력들을 규합시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즉, 당장 쳐야 할 상대는 명백히 적무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때 진 빚을 갚을 수 있겠군.”
묵위현은 적무혁을 떠올리자 한층 더 투지를 불태웠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적무혁의 행적을 조사해 보니 이미 수백의 수하들을 이끌고 영사문을 치러 오고 있다더군.”
“영사문은 아직 움직이기에 준비가 부족한가?”
“아니, 우리도 준비를 끝마쳤네. 내일 당장 놈들과 결전을 치른다 해도 아무 문제없어.”
진무량의 말을 듣고 일찍부터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한 보람이 있었다.
적무혁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전투를 준비했다면, 영사문은 온전히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묵위현은 미리 생각했던 바를 진무량에게 전했다.
“자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타격대를 준비해 두겠네. 영사문 전력의 반을 자네에게 내주지. 자네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게.”
“필요 없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묵위현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 많은 인원들을 내가 지휘한다면 분명 불만이 생길 거야. 난 혼자서 따로 움직이겠어.”
잠시 걱정스런 생각이 든 묵위현이었으나, 곧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진무량은 결코 빈말이나 허언을 하지 않는다. 그가 혼자서 움직이는 게 이롭다고 판단했다면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을 터.
또한 진무량의 무공을 따져 봤을 때도 걱정은 전혀 필요 없다. 그는 이미 혼자서도 일개 문파 하나 정도는 손쉽게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지녔다.
헌데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진무량이 말했다.
“내일 영사문이 출발한다면 적당히 뒤를 따라 움직이지.”
“그럼 미리 인사를 해 둬야겠군. 무운을 빌겠네.”
“운은 필요 없잖아. 실력으로 이길 테니까.”
진무량과 묵위현의 입가에, 동시에 작은 웃음이 그려졌다.
* * *
만반의 준비를 마친 영사문의 무인들이 일제히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드넓기로 유명한 영사문의 연무장이었으나 몰려든 수백 명의 인파로 인해 공간이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투지를 내뿜고 있는 영사문 무인들의 눈에 묵위현의 모습이 보였다.
묵위현은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보이는 단상에 올랐다. 그러고는 중후한 내력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 다들 잘 지냈는가?”
연무장에 집결한 수많은 영사문의 무인들은 일제히 포권을 쥐어 묵위현의 인사에 답했다.
내공이 실린 묵위현의 목소리는 수백 명의 무인들에게 일일이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여기 모인 자네들과 달리, 음모에 얽혀 억울하게 죽어 간 나의 형제들이 있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는 그들을 아버지라 부른 자도 있겠지. 나의 형제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조부였느니라.”
친근하게 들렸던 묵위현의 목소리가 점차 격정적으로 변해 갔다.
“영사문에 숨어들어 뒤에서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심지어 장로들을 해친 놈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죄책감 없이 살고 있으리라.”
“……!”
묵위현의 목소리를 듣는 영사문의 무인들에게서 진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놈들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대들은 이런 꼴을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인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군중 속에서 감정이 복받친 무인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차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나의 형제들을 해치고, 여기 모인 나의 자식들에게까지 손대려 하는 놈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묵위현은 매서운 눈길로 군중들을 쏘아보며 외쳤다.
“모두 나의 뜻에 동의하는가!”
묵위현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우렛소리 같은 함성이 뒤를 이었다.
“우와아아아!”
“당장 놈들을 쳐 죽이자!”
펄럭!
묵위현은 단상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등에 맨 적포가 거칠게 흩날렸다.
“그렇다면 모두 나를 따르라. 놈들을 직접 응징할 기회를 주겠다.”
사기가 절정에 다다른 영사문의 무인들은 순차적으로 묵위현의 뒤를 따라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진무량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법이군.”
묵위현은 단숨에 영사문 무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코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영사문의 무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을 향해 달려들 터.
즉, 그들은 평소보다 수십 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런 자들이 수백 명이 모여 있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검을 섞기도 전에 묵위현은 영사문의 전력을 수백 배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야말로 뛰어난 통솔력을 증명해 보인 바.
연무장의 무인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 진무량은 영사문의 대문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던 진무량은 곧 대문에 서있는 묵소정을 발견했다.
묵소정이 먼저 진무량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너무 억울한 것 같아서 찾아왔어.”
“뭐가 억울한데?”
“지난번에는 내가 뇌옥에서도 꺼내 주고, 이번에는 쓰러진 오라버니를 제일 먼저 발견해서 할아버지께 데려가 줬잖아. 근데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보는 사이가 돼 버리는 건 불공평해.”
진무량은 가만히 묵소정의 말을 기다렸다. 곧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계속 오라버니로 지내 줘. 나도 더 이상은 안 바랄 테니까.”
진무량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 좋아. 그 정도는 해 주지.”
진무량은 잔뜩 긴장한 묵소정의 머리를 헝클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부탁이 있으면 내게 말해. 뭐든 들어주마.”
그제야 묵소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평소의 어조로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다 들어줘서 부탁 같은 건 없어.”
“그래도 가끔 말 못할 부탁들이 있을 거 아니야?”
“음……. 근데 지금 떠오르는 건 다 나쁜 생각들뿐인데.”
“상관없어. 어떻게 올바르게만 살아? 가끔은 적당한 일탈도 즐겨야지. 안 그래?”
이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묵소정이 대답했다.
“맞아. 할아버지는 꽉 막혀서 그런 걸 모른다니까.”
“그래.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둬.”
“잔뜩 생각해 놓을게.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꼭 이겨서 무사히 돌아와.”
진무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묵소정을 지나쳐 걸어갔다.
* * *
묵위현의 지휘하에 출발한 영사문 일행은 적무혁과 그 수하들의 위치를 수색해 가며 신중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수일이 지난 후, 마침내 앞서 보낸 수색조가 적무혁의 위치를 파악했다.
적무혁의 목표 역시 영사문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에, 두 세력은 어렵지 않게 서로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묵위현과 적무혁은 함부로 움직이는 쪽이 더 큰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다수가 어우러진 전투에선 수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일례로 무리하게 나서다가는 내력이 바닥나 상대에게 허무하게 패배할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다수가 펼친 합격진에 당해 부상을 입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하여 두 세력은 움직임을 멈춘 채 양의산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허나 그 시간이 길지 않을 것임은 두 사람 모두 느끼는 바였다.
묵위현은 결전의 때를 대비하여 영사문 무인들을 넓게 배치했다.
수백 명이 한군데에서 어우러져 싸우면 피해가 커짐은 자명한 사실.
하여 묵위현은 영사문의 무인들을 소수로 나눠 국지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상대를 넓게 포위해서 효율적으로 섬멸하고,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린 적무혁을 처단하는 것이 바로 묵위현이 세운 작전이었다.
영사문 무인들의 배치가 끝날 때쯤, 진무량이 묵위현을 찾아왔다.
진무량은 손에 잔뜩 쥔 돌멩이를 내려놓으며 땅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묵위현이 진무량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지금 뭘 하는 겐가?”
“일단 이리 와서 앉아.”
묵위현은 진무량의 행동이 선뜻 이해되진 않았으나, 우선 그의 말에 따랐다.
유심히 진무량의 행동을 지켜보던 묵위현은 곧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을 그리고 있는 건가?”
“맞아.”
진무량은 근방에 지형을 알기 쉽게 그려 냈다. 또한 오르막이 심한 곳은 흙을 쌓아 올렸으며, 나무가 우거진 사각지대는 뽑은 풀을 놓아서 나타냈다.
그렇게 진무량은 인근 지형의 축소판을 만들었다.
주된 요충지가 확실히 표현되었기에 묵위현 역시 인근 지형을 연상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주변 지형에 축소판을 완성시킨 진무량은 곧 챙겨 온 돌멩이를 그곳에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지금 영사문 무인들의 위치는 이렇더군.”
진무량은 방금 놓은 돌과 달리 일(一) 자로 표식을 새긴 돌멩이들을 반대쪽에 두었다.
“이건 구중련의 포진. 내 짐작대로 둔 거야.”
묵위현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어쩔 생각이지?”
“이 돌로 모의전을 해 보자고. 먼저 내가 영사문의 돌을 움직이지.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한번 생각해 봐.”
진무량은 마지막으로 바닥에 깔린 돌들과 달리 주먹만 한 크기에 돌을 따로 두었다.
주먹만 한 돌은 총 세 개. 그것들을 가리키며 진무량이 말했다.
“이건 그쪽과 적무혁, 그리고 나야.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한다.”
진무량은 가장 외곽에 있는 돌을 움직였다. 묵위현은 망설이지 않고 돌을 집어 들었다.
진무량의 방식에 흥미가 생긴 묵위현은 곧 집은 돌을 진무량이 옮긴 돌 앞에 두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수를 교환했다. 수없이 돌멩이를 처음으로 되돌려 가며 갖가지 방법을 강구해 냈다.
두 시진 이상 묵묵히 돌을 옮기던 진무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본 최선의 수는 이거야.”
진무량은 구중련의 돌과 영사문의 돌을 머릿속에 그린 대로 옮겼다.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묵위현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안 돼.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하네.”
“내가 둔 방법보다 더 좋은 수는 없어. 다른 의견이 있으면 보여 줘 봐.”
“허나…….”
진무량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결정된 걸로 알지. 적도 만만한 놈들이 아니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선 준비와 시간이 필요해. 그 부분은 부탁하지.”
“음……. 알겠네. 내가 확실하게 책임지겠네.”
다음 날. 이제 막 잠에서 깬 산짐승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른 시각, 묵위현은 급히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미리 배치해 둔 영사문의 무인들과, 교류를 위해 남겨 둔 연락책들이었다.
모여 있는 무인들을 향해 묵위현의 명령이 내려졌다.
“좌측 끝에 있는 타격대부터 움직일 것이다. 모두 내 명령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여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