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95화 (95/143)

95화. 새로운 힘

2018.03.01.

몸속 깊이 자리한 유월천의 내공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진무량은 곧바로 정심한 유월천의 기운을 따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진무량이 익힌 묵천심법과 유월천의 정심한 기운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성질이었다.

‘유월천의 기운을 통해 마공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무량은 스스로 세운 가정을 곧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그리고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유월천의 정심한 내공을 따로 운용하자, 의지를 벗어나 마구잡이로 폭주하던 마공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시도한 방법인 만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도 엿보였다.

스스로 심마의 빠지는 이유는 잠재된 마공을 끌어올리기 위함. 허나 유월천의 기운을 운용하면 아무래도 잠재된 마공이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라면 심마에 빠진 상태로도 의식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폭발적인 마공을 모두 운용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무공의 성취를 이뤄 냈음은 분명했다.

심마에 빠져 수십 배로 불어난 마공을 드디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또한 불완전함은 곧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

‘설마.’

그때 진무량의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까진 묵천심법과 유월천의 내공을 따로 운용해 왔다.

그렇다면 두 개의 기운을 합친다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도 역시 진무량은 망설이지 않았다.

스스스스스.

점차 불길한 묵색기운이 진부량의 몸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얗고 정심한 유월천의 기운.

“크으윽!”

인상을 잔뜩 찡그린 진무량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예상과 달리 마공과 유월천의 기운은 전혀 섞이지 않았다. 완전히 반대되는 성질의 기운을 동시에 운용하자 격렬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두 개의 기운은 서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온몸의 혈맥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

차마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느껴졌으나, 진무량은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끝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이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상반되는 두 개의 내력이 합쳐지면서 일시적으로 새로운 기운이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그 기운에서는 감히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쿵.

고통을 견디지 못한 진무량의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상반되는 두 개의 기운이 합쳐지면서 생긴 거부반응은 견딜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다.

“쿨럭!”

이윽고 진무량은 뜨거운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오라버니……!”

점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묵소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진무량은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적포신군 묵위현의 모습이었다.

묵위현은 아직 온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한 진무량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제 정신이 드는가?”

진무량은 간단하게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묵위현이 처음 안내해 준 자신의 방이었다.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이 끝나자 진무량이 대답했다.

“음. 아무래도 내가 도움을 받은 것 같군.”

뒤틀렸던 기혈들이 모두 정상인 것으로 보아 묵위현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도움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네. 과도하게 피로가 쌓인 것만 빼면 몸 상태도 문제는 없어 보이더군.”

묵위현은 넌지시 진무량을 향해 말을 이었다.

“노파심에 하나만 묻지. 자네에게선 전혀 다른 두 개의 기운이 느껴지던데, 그 사실은 알고 있는가?”

묵위현은 진무량의 상태를 살피면서 자연스레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그 기운들은 내게 해가 되는 것들이 아니야.”

정확히는 상반되는 두 개의 기운이 엄청난 호재로 작용했다.

당장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심마를 유지하면서 의지대로 초식을 펼칠 수 있게 될 터.

그리고 아직 실마리를 파악하진 못했으나, 무한한 힘의 편린을 찾아냈다.

정반대되는 두 개의 내공이 합쳐졌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힘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불완전한 힘은 곧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한층 더 고강한 경지로 오를 수 있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묵위현이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 허나 오늘 하루라도 휴식을 취하게. 여태 얼마나 몸을 혹사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더군.”

짧게 고개를 끄덕인 진무량이 묵위현을 향해 물었다.

“그보다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 중이겠지?”

“그렇다네. 곧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역시 목표는 흑진방이겠지?”

묵위현은 순간적으로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미 알고 있었군. 정확하네.”

영사문과 유일하게 비견될 수 있을 정도의 거대 세력인 흑진방.

강대한 힘을 지진 흑진방은 영사문이 사파를 일통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었다.

흑진방과 영사문의 전력은 그야말로 호각.

특히 흑진방주 오자원(烏自愿)은 사파의 정점이라 칭하는 삼군 중 한 명.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근소한 차이로 여태까지 두 세력은 서로에게 결코 시비를 걸지 않았다. 분란이 생겨 두 세력이 겨루면 서로 입을 피해가 얼마나 클지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사파를 일통하기 위해서 영사문은 반드시 흑진방을 제압해야 했다.

거대 세력인 흑진방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 크고 작은 사파 세력들을 규합하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묵위현을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서둘러 준비를 끝내 줘. 시간을 끌어서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어.”

“알고 있네. 말했다시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게야.”

묵위현은 어색한 헛기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으흠. 어쨌든 자네도 오늘 하루는 쉬어야 하네. 지친 몸으로 거사를 치를 수는 없지 않겠나.”

“어울리지 않게 웬 걱정이야? 내 일은 알아서 하지.”

“또 무리할 것이 뻔한데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지. 하여 내 특별히 준비해 둔 바가 있네.”

의문을 나타내던 진무량은 곧 묵위현의 의도를 알아챘다.

저 멀리서부터 익숙한 묵소정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묵위현은 재빨리 진무량의 말을 잘랐다.

“자네가 무사히 쉴 수 있도록 붙여 둔 감시원이라 생각하게. 그럼 난 할 일이 많아서 이만 가 보겠네.”

곧바로 등을 돌린 묵위현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묵소정이 진무량의 방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한껏 꾸민 묵소정은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탁자에 음식을 놓으면서 진무량에게 말을 걸었다.

“몸은 좀 괜찮아? 오라버니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진무량은 자신의 용건을 간략하게 전했다.

“난 괜찮으니까 이만 가봐. 굳이 네가 없어도 오늘은 쉴 생각이었어.”

“거짓말. 그걸 어떻게 믿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건 가장 기본이야.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

물론 지금은 가만히 쉬는 것이 가장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분명히 앞으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휴식을 취해 둬야 했다.

묵소정은 가져온 음식들을 편기 편하도록 나열하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래도 상관없어. 내가 오라버니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여기 있을래.”

한숨을 내쉬는 진무량에게 묵소정은 먹음직스러운 동파육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잘 먹어야 아프지도 않는 법이랬어. 오라버니가 먹던 벽곡단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진무량은 동파육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묵소정이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어때? 맛있지?”

“벽곡단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묵소정은 의문스런 표정으로 진무량을 바라보다가 음식과 함께 가져온 술을 꺼내들었다.

“그럼 이거랑 같이 먹어봐. 절강에서 가장 유명한 술이야. 동파육과 함께 먹으면 천상의 맛이 따로 없대.”

“난 술 싫어해.”

묵소정은 술병을 치우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몰랐어.”

진무량은 곧바로 술병에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무슨 음식을 먹어도 그냥 생쌀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맛을 느끼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최소한의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뿐이니까.

술을 싫어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리게 된다. 여태까진 그 잠깐의 휴식이 좋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그리운 얼굴이 더 또렷해진다. 그 사실이 싫다.

언제나 시끄럽게 조잘대던 묵소정은 평소와 달리 묵묵히 진무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묵소정은 진지한 태도로 진무량을 향해 질문했다.

“오라버니의 계획은 할아버지께 대충 전해 들었어. 근데 오라버닌 뜻을 모두 이루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구중련 놈들이 지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라버닌 결국 마교를 치려는 거잖아. 그리고 무림맹에는 무림공적으로 낙인 찍혔고. 그러니까…….”

한층 더 떨리는 목소리로 묵소정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여기 있어 주면 안 될까? 그리고 나랑…….”

묵소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무량이 대답했다.

“영사문에 계속 머물 생각 없어. 그리고 너랑 같이할 생각은 더욱 없고.”

“나 지금 가볍게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나랑 함께하면 영사문을 가질 수도 있잖아.”

“영사문을 가질 생각 없어. 그리고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지만, 난 널 여자로 생각한 적 없어. 그건 앞으로도 평생 마찬가지야.”

너무도 냉정한 진무량의 태도에 묵소정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아.”

진무량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동시에 두 여인을 마음에 품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는 이미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여인이 있었다.

또렷한 어조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나에 대한 마음을 접지 않으면 평생 지금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할 거야. 그러니까 포기해.”

묵소정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눈물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너무해.”

결국 묵소정은 눈물을 훔치며 방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무량은 떠나는 묵소정의 뒷모습조차 바라보지 않았다.

상처를 받은 사람도 힘들겠지만 상처를 준 사람도 결코 편하지 않은 법이다.

허나 이런 미적지근한 관계를 계속 이어 갈 생각은 없다.

그건 오히려 상대를 더욱 힘들게 할 뿐.

이뤄질 수 없는 희망은 지독한 절망만을 부른다. 잔인하지만 희망을 없애 주는 것이 진무량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 * *

콰득.

거대한 반월도가 흑진방주 오자원의 가슴에 치명상을 남겼다.

사파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영사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는 흑진방. 그곳에 주인이자, 삼군으로 불리는 오자원은 한 사내와의 일대일 정면승부에서 패배했다.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은 오자원을 내려다보는 자는 구중련 소속 적무혁이었다.

가슴에 상처를 움켜쥐며 오자원이 입을 열었다.

“……실로 강하군. 자네만한 고수를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했어.”

방어를 도외시한 파괴적인 초식이야말로 오자원의 특기였다. 대적하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오자원의 철퇴를 받아 낸 자가 없기에, 그는 삼군이라 불리며 큰 명성을 떨친 것이었다.

허나 적무혁에겐 그 파괴적인 초식들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적무혁의 무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절대 방어.

수없이 철퇴를 휘둘러 봐도 적무혁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아무리 때려 부숴도 구멍은커녕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는 느낌.

적무혁은 자신의 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대답했다.

“그대 또한 삼군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실력자였소. 너무 원통해하지는 마시오. 곧 강호의 모든 문파가 무너질 테니.”

서걱.

적무혁의 마지막 일격이 오자원의 몸을 관통했다.

오자원이 완전히 숨이 끊어지자, 홀연히 적무혁의 뒤로 소천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훌륭하십니다.”

“쓸데없는 공치사는 됐다. 련에서 다른 연락은 없느냐?”

“련주님이 친히 친서를 보내셨습니다.”

“내용은?”

“무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셨습니다.”

적무혁은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소리 내어 웃었다.

“크흐흐흐. 드디어 대업을 이룰 날이 왔구나.”

오직 이 날을 기다리며 수천 년간 어둠속에서 활동해 왔던 구중련이다.

여태 빛을 보지 못한 채 쓰러져 간 선조들이 수없이 많았다.

긴 암흑기가 지나 자신의 대에서 마침내 구중련의 대업을 이룰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련주님께서 따로 남긴 명령은 없으시더냐?”

“계속해서 사파쪽을 담당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대신마들은 무림맹과 전면전을 펼친다고 하십니다.”

적무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목표는 영사문이겠구나.”

“그렇습니다.”

“악연으로 이어진 곳이구나. 내 직접 영사문으로 찾아가 놈들을 모조리 도륙할 것이다. 너는 이곳에 남아 흑진방의 잔당들을 소탕하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더 이상 숨어서 지낼 필요 없다. 당당한 우리의 존재를 알려라!”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적무혁이 호탕하게 외쳤다.

“천하가 두려움에 벌벌 떨 수 있도록 말이다! 크하하하하!”

이제야 비로소 구중련과 무림맹의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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