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94화 (94/143)

94화. 능력

2018.02.25.

묵위현은 진무량과 함께 영사문 내부의 정원으로 향했다.

그 정원은 묵위현의 허락 없인 출입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듣는 귀가 많아서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못 하는 법.

하여 묵위현은 영사문의 무인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진무량과 홀로 마주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 없이 운치 있게 가꿔진 정원을 거닐었다. 이윽고 묵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슬슬 나를 찾아온 용건에 대해서 말하는 게 어떤가?”

“벌써 잊은 건가. 영사문의 한번 방문해 달라고 했었잖아.”

“기억하고 있네. 허나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 테지.”

걸음을 멈추며 진무량이 묵위현을 바라보았다.

“용건을 말하기 전에 하나만 묻지. 구중련에 대한 원한은 여전한가?”

“물론이네.”

묵위현은 즉시 응답했다.

구중련은 첩자를 심은 것도 모자라, 오랜 시간 영사문을 지탱해 왔던 장로들을 살해했다. 특히 적무혁과 직접 대면했을 때 가슴에 새겨진 원한은 지금까지도 전혀 잊히지 않았다.

“은혜와 원한은 반드시 되갚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나와 영사문의 방식이고 앞으로도 걸어갈 길일세.”

“괜찮은 마음가짐이군. 그럼 하나만 묻지. 나와 손잡을 생각 없나?”

“영사문을 찾은 이유가 그 때문인가?”

진무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확실한 긍정을 나타냈다.

묵위현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돼야 손을 잡는 것이지. 과연 그대가 영사문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당장 진무량은 그야말로 혈혈단신인 상태. 게다가 그는 무림공적으로 낙인 찍혔으며, 이제는 마교에서도 쫓기는 신세였다.

그런 진무량과 손을 잡는 건 어쩌면 득보다 실이 더 클 가능성도 충분했다.

진무량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특유의 조소를 지었다.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군.”

“무슨 뜻인가?”

“당장 가진 것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선 안 돼지. 적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들어봐야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 둔 바가 있나 보군.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영사문이 자네의 손을 잡을지는 자네의 말을 듣고 정하지.”

진무량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사문의 힘만으로 마교를 차지한 구중련과 겨뤄서 이길 승산은 없어. 놈들을 완전히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무림맹이 움직여야 해.”

묵위현은 꺼림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무림맹에게 도움이라도 청하라는 건가?”

긴 시간 대립해 온 무림맹과 힘을 합치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파와 사파의 사소한 분쟁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헌데 먼저 무림맹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사파인이 정파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파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짓밟는 이와 같은 행위는 당연히 엄청난 반대에 부딪칠 것이다. 물론 그 뜻에 반대하고 나서는 이는 결코 적지 않을 터.

무작정 밀어붙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적과 겨루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뜻을 하나로 합치는 것.

뜻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으면 제아무리 강대한 세력이라도 금방 와해될 오합지졸이나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뜻을 합치자는 제안을 무림맹이 순순히 받아 줄지도 의문이었다. 늘 고개가 뻣뻣한 그들은 힘을 합치자는 의견에 쉽게 찬성할 위인들이 아니었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 진무량이 대답했다.

“무림맹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전혀 없어.”

“무림맹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맞아. 하지만 놈들이 먼저 우리와 힘을 합치자고 부탁하게 할 거야.”

“자네도 무림맹을 알지 않은가? 그들이 그리 쉽게 부탁을 하진 않을 걸세.”

진무량은 현재 천하의 정세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구중련의 목표는 천하일통. 놈들은 곧 무림 정벌을 나설 거야. 아니, 이미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그들의 힘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니야.”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군.”

“중요한 건 마교와 무림맹의 힘이 어느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지 않다는 거야. 즉, 엄청난 희생자가 나온다는 뜻이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설명은 그만 됐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정확해. 무림맹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입는지는 관심 없어.”

차가운 진무량의 안광이 번뜩였다.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사파를 완전히 일통하는 거야. 무림맹의 시선은 온전히 마교로 향해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기회인 셈이지.”

영사문은 분명 사파에서도 크게 위세를 떨치는 세력이지만, 그렇다고 사파 전체를 완전히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묵위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파를 일통한다니……. 말을 참 쉽게 하는군.”

“실제로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직접 도울 테니까.”

묵위현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굳어 갔다.

‘진무량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진무량은 사대신마로 불린 무인. 그가 직접 나선다면 영사문의 전력은 지금까지와 비할 수 없이 강해질 것이다. 심지어 그는 과거 사도맹을 멸문 직전까지 몰아가지 않았던가.

묵위현이 생각에 잠겼을 때 진무량은 묵묵히 설명을 이어 갔다.

“사파를 통일한다면 그 힘은 결코 얕볼 수 없지. 구중련과 전쟁을 치를 때 그 힘이 자신들을 노린다고 생각하면 뻣뻣한 고개가 절로 숙여질 거야.”

진무량의 뜻을 짐작한 묵위현이 조용히 읊조렸다.

“당장 구중련과 상대하기도 벅찬데 사파와 분쟁을 일으킬 순 없겠지.”

“눈앞에 닥친 위기 앞에선 과거의 적도 동료로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다면 도움을 청해 올 거야. 반드시.”

“음…… 가능성은 충분하군.”

“영사문은 무림맹의 도움을 주는 것이니, 나중에 보상도 잔뜩 받아 내. 사파의 위신도 세우고, 얻어 가는 것도 꽤나 많겠지.”

“허나 너무 위험한 건 사실이군.”

“천하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어. 이럴 때 혼자 안정을 찾는 이는 가장 먼저 쓰러지는 법이지.”

묵위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무량의 계획대로라면 영사문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얻게 된다. 사파를 일통할 수 있거늘, 굳이 다른 것들을 더 따져 볼 필요도 없다.

묵위현이 의문을 나타냈다.

“그렇다면 자네가 바라는 건 뭔가? 뜻대로만 된다면 영사문은 더없이 큰 영광을 누릴 걸세. 허나 자네가 얻는 건 없지 않은가?”

“내가 바라는 건 구중련을 짓밟는 것뿐이야.”

그 외에 원하는 건 없다. 지금 당장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이유도 오직 그뿐이니까.

묵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진무량을 떠봤다.

“만약 내가 자네의 손을 잡지 않는다면 어떡할 건가?”

진무량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곳을 찾아야지. 그 뒤에는 가장 먼저 내 생각을 알고 있는 상대를 칠 거야.”

묵위현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음 지었다.

“허허. 자네는 정말 가차 없구먼.”

“칭찬으로 듣지.”

“내가 자네와 헤어질 때 든 생각이 있지. 저 사내와는 절대로 적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네.”

확고한 결심을 다진 묵위현이 말을 이었다.

“나와 영사문은 자네와 손을 잡겠네. 어디 한번 자네의 뜻을 마음껏 펼쳐 보게.”

* * *

묵위현은 진무량이 편히 머무를 수 있도록 영사문 내에 거처를 내주었다.

진무량의 뜻대로 움직이기로 결심한 묵위현이지만, 당장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우선 영사문의 요인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야 했다. 또한 사파를 일통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묵위현이 정한 진무량의 거처는 영사문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사용하는 건물이었다. 앞으로 뜻을 함께할 진무량에 대한 묵위현의 작은 성의였다.

넓디넓은 실내에는 화려한 장식품들과 갖가지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한쪽에 놓인 커다란 침상은 네 사람이 누워도 남을 정도였다.

진무량은 마교에서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영사문으로 달려왔다. 오랜 여정에 지칠 법도 하건만, 그는 푹신한 침상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염옥창을 챙긴 진무량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도도.

“오라버니!”

귀청이 떨어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진무량을 찾아온 여인은 묵위현의 손녀 묵소정이었다.

아이들은 금방 큰다고 하던가. 다시 만난 묵소정은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젖살이 빠지면서 갸름한 턱 선이 드러났고, 한 뼘 이상 키가 커 몸매가 훨씬 늘씬해졌다. 마치 소녀가 여인으로 변함을 나타내듯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진무량은 벌써 골치가 아파오듯 이마를 눌렀다.

“너야말로 여긴 왜 온 거야?”

“나야 오라버니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지!”

묵소정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턱을 내리깔아 매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꿈 깨라.”

진무량은 휙 하고 묵소정을 지나쳐 걸어갔다. 묵소정은 멀어지는 진무량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디 가는데?”

진무량은 묵소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가던 길을 마저 갔다.

그에 질세라 묵소정은 재빨리 진무량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렵사리 그를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쉽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어딜 가든 끝가지 따라가 주겠어!’

* * *

“오라버니. 이젠 좀 쉬는 게 어때?”

퀭한 눈으로 진무량을 바라보며 묵소정이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진무량은 집중한 상태로 염옥창을 휘두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로 진무량을 따라 다닌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진무량의 일상은 변함없이 한결같았다.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창술을 연마하는 것의 반복.

심지어 잠을 자는 걸 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잠시 쉬는 시간이 있다면 하루에 한 번 벽곡단을 먹을 때뿐이었다.

“그러다가 몸 상해!”

묵소정은 다시 한번 진무량을 향해 말을 걸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다시 만나게 되니 진무량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변했다.

까칠한 점은 여전했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온종일 날카로운 신경에다가 살벌한 눈빛을 마주할 때면 가끔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말을 걸었을 때 대답해 준 것도 처음 만난 순간뿐. 그 다음부터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문득 진무량이 두고 간 벽곡단이 묵소정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벽곡단 끝부분을 살짝 떼서 입에 넣었다.

‘우웩. 맛없어.’

벽곡단의 맛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도저히 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식감에, 심지어 썩은 냄새까지 났다.

“…….”

처음에는 단순히 진무량을 보고 싶어서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를 보다 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괴로움.

그는 마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묵소정은 걱정 섞인 눈길로 한참 동안 진무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후욱! 훅! 후우욱!

진무량의 내공을 삼키고 검게 불타오르는 염옥창이 연신 허공을 갈랐다.

잠시라도 쉬면 지켜 내지 못한 것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딱히 몸을 혹사시킨다고 나아지는 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뿐이다.

휘이이익!

염옥창이 흐르는 궤적에 따라 점차 잔상이 생겨났다. 이윽고 수백수천 개로 늘어진 잔상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헤아릴 수 없는 변화를 품은 초식. 마영수라가 펼쳐졌다.

무력한 감정을 수없이 베고, 찌르고, 갈랐으나 조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쾅!

진무량이 거칠게 염옥창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쩌저적 소리와 함께 갈리지는 연무장 바닥이 갈라졌다.

“후우.”

진무량은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했다.

몸을 혹사시킴으로 얻는 것도 있었다.

금제를 풀고 처음 마공을 운용했을 때는 몸이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다. 헌데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을 휘두르다 보니, 이제는 완벽히 의지대로 마공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힘을 온전히 되찾은 것이다.

허나 이대로는 모자랐다.

계획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뜻을 이룰 힘이 없으면 단순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법.

구중련을 철저하게 짓밟기 위해서는 더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무공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노력밖에 없다. 끝없는 노력과 숱한 경험이야말로 최강의 무를 이루는 법.

스스스스스.

진무량은 마공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이윽고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마공은 기경팔맥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넘쳤다.

우선 미완성된 자신의 무공을 바로잡아야 했다.

심마에 빠져 본능에만 의지해선 안 된다. 이제부터 맞설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본능에 더한 냉철한 이성이 같이 필요했다.

이성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용형십삽식의 마지막 삼 초식을 펼쳐 내는 것 또한 가능할 터.

“크으윽!”

한계 이상으로 내력을 끌어올리자 마공이 제어되지 않았다. 점차 의지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한 마공.

마공의 흐름에 몸을 맡기되, 의식을 잃어선 안 됐다. 허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내재된 파괴본능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모든 걸 쳐부수라고 외쳐 댔다.

점차 의식이 옅어져 갈 때,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질적인 기운이 끼어들었다.

그 기운은 금제를 위해 심어진 유월천의 기운이었다.

분명 굳건히 단전을 지키던 유월천의 기운은 산산조각 나서 몸속으로 흩어졌는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건가.’

몸속에서 마공이 폭주하자 유월천의 기운까지 함께 요동쳤다.

너무나 이질적인 기운이라 여태 느끼지 못했을 뿐. 유월천의 기운은 몸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금제에 당했을 때와 달리, 유월천의 내공은 몸속에 흐르는 마공을 제어하지 않았다.

‘설마, 그렇다면…….’

진무량은 몸속에 유월천의 기운을 다스렸다.

꿈틀.

새하얗고 정심한 유월천의 기운이 진무량의 의지에 반응했다.

그러고는 점차 진무량의 의지대로 유월천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