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92화 (92/143)

92화. 돌파

2018.02.18.

멸천대원들은 모두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였다.

오랜 시간동안 이어진 구중련의 추격에 맞서면서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몸.

이에 더해, 오랜 시간 함께했던 등가휘의 죽음은 마음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심지어 점점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들. 이제는 마교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로 인해 멸천대원들은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미래는 누구에게나 거대한 절망감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숱한 수라장을 겪어 온 멸천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땅을 쳐다보며 걷던 그때. 멸천대원들이 모인 곳으로 진무량이 찾아왔다.

진무량의 시선이 좌측 끝에 있는 연시우를 향했다.

“일각 안으로 떠날 준비를 마쳐라.”

“알겠습니다.

연시우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지운이 나섰다.

“당장 여길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지. 문제는…….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이오?”

“그 질문은 내가 하고 싶군.”

진무량은 모여 있는 멸천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이제부터 뭘 하고 싶은 것이냐? 모두 다 잊고 이대로 도망쳐서 평생 동안 숨어서 살고 싶으냐?”

“…….”

멸천대원들은 여전히 바닥을 향해 시선을 둘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현재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평생 도망치면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 생각이 추호도 없다.”

무척이나 담담한 진무량의 언변은 멸천대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니까 나는 싸울 것이다. 내 앞길을 방해하는 놈들을 모조리 무릎 꿇려서라도 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모여 있던 멸천대원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말하지 않았던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무릎 꿇리겠다고.”

“……마교와 겨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상대를 가려가며 싸웠지?”

진무량의 말에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상대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장내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 속에서 진무량의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의 뜻은 죽어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실추된 멸천대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또한 감히 우리에게 검을 겨눈 놈들을 모조리 쳐부수는 것이다!”

진무량은 멸천대원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장 떠나도 좋다. 나와 함께 지옥으로 뛰어들 각오를 마친 놈들만 이곳에 남거라.”

멸천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무량을 향해 모였다.

한없는 무력함만 감돌았던 그들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반짝이는 투기가 빛났다.

여태껏 지독한 현실로 인해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했다. 허나 아무리 지독한 어둠속에 빠져있더라도 대주님의 목소리만은 잊을 수 없었다.

헤어날 수 없는 절망에 빠졌을 때마다 늘 저 목소리를 듣고 일어서지 않았던가.

그 어떤 강대한 상대와 마주한다 하더라도 겁나지 않는다. 대주님을 따른다면 반드시 승리할 테니까.

멸천대원들을 대표하여 연시우가 말했다.

“우리는 멸천대. 언제나 대주님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진무량의 말을 듣던 주백기 또한 어느새 입가의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곁에 있던 위지운을 향해 말했다.

“……뭐하고 있어? 넌 빨리 가.”

“이 자식이! 내가 가긴 어딜 가?”

“……죽상을 짓고 있던 놈이 큰소리치긴.”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네놈이야말로 방금까지 겁먹은 곰 새끼마냥 쭈그리고 있었잖아.”

두 사람이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연시우가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정하셨습니까?”

“그래. 당장 우리의 힘만으로는 구중련 놈들을 상대할 수 없다.”

열의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뜻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사항은 냉철한 지성.

진무량은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하여 도출된 결론은 한걸음 후퇴였다.

“연시우. 너는 속히 이곳을 벗어나라. 그리고 마교 내에 남아 있는 대원들의 가족들을 보호해. 그들의 안전을 확실하게 확보한 뒤에 멸천대와 합류하라.”

“알겠습니다.”

진무량은 주백기와 위지운을 번갈아 보며 명령했다.

“너희는 대원들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 내 명령을 기다려라.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은 없다. 내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확실하게 무공을 연마해.”

“……존명.”

묵직한 주백기의 음성 뒤에 위지운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선 철혈단의 포위망을 뚫어야겠군.”

한동안 멸천대는 마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정보 수집에 몰두했다. 하여 마교의 정황을 파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추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적무혁은 등가휘로 인해 자신의 추격대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자, 몽원양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몽원양은 지원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늘 진무량을 눈엣가시로 여겨 온 몽원양은 몸소 수하들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정보력으로 따지자면 마교에서도 최고를 자랑하는 철혈단. 그들의 수장이자 사대신마 중 일인으로 불리는 몽원양의 추격은 실로 뛰어났다.

철혈단은 이미 멸천대의 턱밑까지 접근한 상태. 마교의 영역을 벗어나려면 그들의 추격망을 따돌려야만 했다.

주백기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놈들은 내가 직접 상대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여길 벗어나는 것만 집중하면 된다.”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연시우가 물었다.

“내공을 되찾으신 겁니까?”

진무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철혈단은 내가 따돌릴 것이다. 그 후에 나는 따로 들러야 할 곳이 있으니,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거라.”

주백기가 살짝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연락을 취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꼬리가 잡힐 가능성만 커질 뿐이니, 서로 간에 연락은 일절 하지 않을 것이다.”

위지운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뒤,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연락할 방법이 없으면 다시 모일 때를 어떻게 전할 생각이오?”

“천하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소문으로 퍼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보내는 신호다. 그 소문을 조사하다 보면 나와 연락이 닿을 것이다.”

진무량은 세 명의 부관과 한 명씩 눈을 맞췄다.

“각자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려라. 우리가 다시 모일 때 구중련을 확실하게 밟아 버릴 수 있도록.”

* * *

슥슥슥슥.

옷자락이 수풀을 스치는 소리. 복장을 맞춘 일련의 무리가 수풀을 뒤지면서 주위를 수색해 나갔다.

그들의 정체는 철혈단. 몽원양의 명령에 따라 멸천대의 뒤를 추격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인근에 있는 철혈단의 지휘를 맡은 자는 우문관(宇文冠)이었다.

뚫어져라 주변을 훑어보던 우문관은 바닥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일반인이 보면 자연스레 생긴 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흔적. 허나 우문관은 그 흔적이 지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임을 직감했다.

“이 근처에 숨어 있던 거군.”

자신감에 찬 우문관은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희미하게 찍혀 있던 발자국. 허나 그 흔적을 따라갈수록 발자국은 점점 선명한 모양으로 변해 갔다.

흔적을 쫓던 우문관은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우뚝 솟은 소나무뿐.

자연스레 우문관의 시선이 소나무로 향했다. 굵은 밑동을 타고 올라가던 그의 시선은 여러 갈래로 뻗은 나뭇가지에서 멈췄다.

그 순간 우문관의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온 거냐? 대놓고 흔적을 남겨 준 것치곤 도착이 느리군.”

목소리의 주인은 진무량. 그는 나뭇가지에 올라 우문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우문관은 서둘러 진무량과 거리를 벌렸다. 그의 수하들 역시 곧바로 경계태세를 취하며 소나무를 둥글게 포위했다.

우문관은 황급히 검을 뽑아 들며 곁에 있는 수하를 향해 말했다.

“즉시 부주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부원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하라.”

우문관은 진무량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폈다. 이곳으로 철혈부원들을 이곳으로 불렀음에도 그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드는 의문. 허나 곧 진무량이 나서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인이 멸천대주를 뵙소.”

우문관은 진무량을 향해 건성으로 예를 취했다.

사대신마였던 진무량에 대한 예의가 아닌, 단순한 조롱이었다.

“헌데 어찌 그리 얌전한게요?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다고 들었소만,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가 보오.”

피식.

진무량은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지을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우문관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진무량은 유서하의 연주가 있어야만 내공을 운용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그녀를 먼저 공격해서 연주를 못하게 막아야 했다. 또한 진무량을 지키기 위해 숨어 있을 멸천대의 위치도 파악해 둘 생각이었다.

허나 주변에서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소로운 조소를 짓던 진무량이 우문관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나를 눈앞에 두고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냐?”

“흥. 자신만만한 걸 보니 주변에 멸천대를 숨겨 둔 모양이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이 근처에 멸천대는 한 명도 없으니까.”

우문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주변에서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혼자 있는 거지?’

진무량은 우문관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 냈다.

“얼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혼자 있는 이유가 궁금한가 보군.”

스스스스스스.

진무량을 중심으로 휘날리는 묵색 기운. 불길한 기운에 몸서리치듯 초목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이유는 간단해. 너희를 몰아넣고 한 번에 끝장내기 위함이지.”

휘이이이잉!

진무량을 향해 모여든 묵색기운은 점차 형태를 띤 강기로 변해 갔다.

천하제일의 명검에 필적하는 강기의 날카로움. 진무량의 주변을 흩날리는 강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묵색 강기의 닿는 나뭇잎은 모조리 바스러졌고, 어느새 딛고 있던 나뭇가지도 부서졌다.

고고한 자태의 학이 지면을 향하듯, 진무량의 신형이 천천히 서서히 떨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 내공을 완전 개방하자, 진무량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몸속에 흐르는 마공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유월천의 금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자 그동안 억제됐던 기운들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진무량은 검게 불타는 염옥창을 가로로 길게 그었다.

‘용형십삼식 육식 오성마참.’

그 움직임에 따라 새겨진 검은 궤적. 그 속에서 순식간에 다섯 개의 강기가 쏘아졌다!

콰과과과광!

묵색강기가 쓸고 간 곳은 철혈부원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진무량의 기운은 감히 일개 철혈부원이 받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폭발의 여파에서 벗어난 우문관은 억척스레 외쳤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진형을 유지하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철혈부원들은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허나 누구도 무영섬전보를 밟는 진무량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시야는 물론, 무인의 감각까지 총동원했음에도 잠시 진무량의 신형을 놓친 것이다.

콰직!

순식간에 복부를 관통하는 염옥창.

동료들의 희생을 통해 간신히 진무량의 위치를 포착한 철혈부원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어서 온 힘을 다한 일격이 진무량을 향해 쏟아졌다. 허나 진무량이 가볍게 휘두른 염옥창은 그 일격을 가볍게 튕겨 냈다.

채쟁!

아니, 단순히 튕겨 낸 정도가 아니었다. 진무량을 향해 달려들었던 무인들의 검이 완전히 두 동강 나 버렸으니까.

쉐엑!

놀랄 틈도 없이 그들은 염옥창의 제물이 되었다.

“오랜만에 힘을 쓰다 보니 조절이 안 되는군.”

진무량이 움직임을 멈춘 찰나의 순간,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철혈부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진무량은 몸을 회전시켰다.

‘용형십삽식 이식 등마회륜참.’

챙! 챙! 챙! 챙 챙!

팔방에서 달려들었던 철혈부원들은 회전의 묘가 실린 염옥창을 뚫어 내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동료들이 당하자 우문관은 즉시 뒤로 몸을 날렸다.

“우선 물러나라!”

철혈부원들은 서서히 진무량을 중심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진무량이 가만히 그 꼴을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럴 수는 없지.”

순간 염옥창의 흑염이 거세게 타올랐다. 점차 흑염이 모이는 곳은 창날의 반대편 끝부분, 창근으로 모였다.

‘용형십삼식 칠식 노룡단천지(怒龍斷天地)’

창근은 그대로 땅바닥을 꿰뚫었다. 그러자 뒤흔들리는 천지. 마치 분노한 용이 땅을 기어 다니듯 대지가 쩍쩍 갈라졌다.

수십 명의 철혈부원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쿠르르르릉!

고목들이 쓰러지고 집채만 한 바위가 으깨졌다. 그야말로 천지가 요동쳤으나 진무량은 홀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지 마. 일일이 쫓아다니기 귀찮으니까.”

우문관은 다가오는 진무량을 바라보면서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망할!”

떨려 오는 대지 위에 있자니 공중으로 신형을 날릴 수도 없었다. 간신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진무량은 그대로 꼼짝달싹 못하는 우문관의 목을 그었다.

낭자하는 선혈. 그 속에서도 진무량의 시선은 다음 상대를 쫓고 있었다.

만년설처럼 차가운 그 시선을 마주한 철혈부원들은 절로 몸이 떨려 왔다.

몽원양은 곧 몇몇의 수하들과 함께 진무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주변 광경을 확인하는 순간 몽원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얼굴 전체를 뒤덮은 주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여기저기 난자된 시신들과 흥건한 핏자국.

굳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철혈부의 전멸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참담한 풍경 속에서 홀로 우뚝 서있는 진무량. 몽원양의 시선이 정확히 그를 향했다.

“진무량……!”

부들부들 떨리는 몽원양의 어조에는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몽원양과 마주한 진무량의 시선 역시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대신마라 불린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자 자연스레 공기가 무거워졌다.

진무량이 창을 비껴들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기다리고 있었다.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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