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90화 (90/143)

90화. 되찾은 내공

2018.02.11.

진무량의 금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금마쌍장을 창시한 유월천뿐이었다.

유월천은 누구보다 진무량을 경계했기에, 자신의 딸인 유서하에게도 금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만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유서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무량의 금제를 해방시킬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유서하는 최근 무공 수준이 일취월장했다. 하여 진무량의 금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전혀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구결에 따라 일시적으로 진무량의 금제를 해방시키는 것이 전부였다면, 무공 수준이 상승해 감에 따라 금제가 발동되는 묘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금제의 창시자인 유월천과 같은 심법을 익힌 몸. 또한 일시적으로나마 진무량의 금제를 수없이 해방시켰다.

허나 이 모든 것들은 금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일 뿐. 진무량의 금제를 풀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서하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금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전수받은 건 아니에요. 그러니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요. 어쩌면…….”

“괜찮아. 지금은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야. 금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뭐든 시험해 봐.”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유서하는 묵묵히 다가가 진무량의 등에 양손을 갖다 댔다. 진무량 역시 자연스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유서하는 기감을 집중시켜 진무량의 몸속에 흐르는 내기의 흐름을 읽어 냈다.

준비를 마친 유서하는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제가 어떻게든 막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같은 거 안 해. 너야말로 너무 무리하지 마.”

단호한 결심을 마친 유서하는 천천히 진무량에게 내기를 흘려보냈다.

유서하의 기운은 막힘없이 진무량의 단전으로 향했다. 그동안 음(音)을 통해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유서하의 내력이 단전에 모여들자, 낯선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순백의 새하얀 그 기운은 유월천이 새겨 놓은 기운이었다. 그야말로 진무량의 마공을 억압하는 금제의 핵심.

‘이 기운을 없애야 돼.’

유서하는 단전으로 흘려보낸 자신의 내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연주를 통해 일시적으로 진무량의 금제를 해방시켰던 바로 그 움직임이었다.

차츰 옅어지는 유월천의 기운. 그에 맞춰 곧바로 진무량의 마공이 용솟음쳤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여태 해 왔던 것처럼 일시적으로 진무량이 내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금제 자체를 완전히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유서하는 흘려보낸 내력을 유월천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접근시켰다.

예상대로 유월천의 기운은 굉장히 친숙했다. 자신이 익힌 내공과 완전히 똑같은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유월천의 기운을 확인하자, 유서하는 자신의 가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유월천의 기운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지금까지 그 기운을 약하게 하여 진무량이 내공을 운용할 수 있게 하지 않았던가.

유서하는 즉시 유월천의 기운을 단전 밖으로 유도했다. 어떻게든 유월천의 기운이 단전만 벗어난다면 금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할 터.

다행히 유월천의 기운은 유서하의 의지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허나 그것도 잠시.

진무량의 단전을 벗어나려 하자 유월천의 기운이 거칠게 날뛰었다.

‘으윽!’

유서하는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그리고는 날뛰는 유월천의 기운을 바로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유월천의 기운이 이대로 계속해서 제멋대로 날뛴다면 진무량은 극심한 내상을 입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유서하는 자신의 내력으로 유월천의 기운을 모조리 막아 냈다.

주르르륵.

유서하의 입술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무리하게 내력을 흘려보낸 탓에 기혈이 잠시 뒤엉켰으나, 어떻게든 진무량에게 피해가 가는 것만은 막아 낼 수 있었다.

“후우…….”

유서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당황한 심정을 진정시켰다.

어느 정도의 위험은 예상했지만, 진무량의 단전을 벗어나려는 순간 유월천의 기운이 폭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금제를 푸는 것을 막기 위해 유월천이 미리 대비를 해 놓은 것이리라.

예상치 못한 난관에 빠진 유서하는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때 진무량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ㅡ문제가 뭐야?

유서하의 내력으로 유월천의 기운이 옅어졌기에, 진무량은 일시적으로나마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 또한 진무량이 자신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를 리 없었다.

유서하가 진무량의 전음에 답했다.

ㅡ단전을 벗어나기 직전에 아버지의 기운이 제멋대로 폭주해요. 그 기운이 너무 강대해서 제가 조절할 수가 없어요.

진무량은 잠시 동안의 고민을 마치고 전음을 보냈다.

ㅡ유월천의 기운을 약하게 하면 되잖아. 그럼 네 의지대로 그 기운을 조절할 수 있는 거야?

ㅡ……기운이 약해진다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ㅡ내가 하지. 유월천의 기운을 산삭조각 내 줄게.

이전에 금정신단을 복용했을 때, 진무량은 유월천의 기운과 맞선 경험이 있었다.

그때도 유월천의 기운을 몰아내는 데까진 성공했다. 다만 정심한 그 기운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문제였다.

제아무리 유월천의 기운이라도 산산조각 나 버린다면 그 힘을 잃을 터.

약해진 유월천의 기운을 유서하가 단전 밖으로 내몰 수만 있다면 금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ㅡ좋아요. 다시 한번 시도해 보죠.

스으으으.

진무량이 내공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그의 주변으로 묵색강기가 모여들었다.

진무량은 몸속의 모든 마공을 단전으로 집중시켰다.

‘흐읍!’

진무량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집중시킨 마공을 유월천의 기운을 향해 쏘아 보냈다.

묵색 기운과 순백의 기운은 뒤엉키며 서로 격렬하게 맞섰다.

팽팽하게 맞서는 것도 잠시. 점차 순백의 기운이 그 힘을 잃어 갔다.

이윽고 진무량의 묵색 기운이 유월천의 순백의 기운을 완전히 꿰뚫어 버렸다.

완전히 분쇄되어 버린 유월천의 기운. 허나 정심한 그 기운은 곧바로 하나로 뭉쳐 갔다.

‘지금이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유서하가 나섰다.

유서하는 흩어진 유월천의 기운을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다른 방향으로 흩어 놓았다.

그리고는 수없이 흩어진 유월천의 기운을 단숨에 단전 밖으로 몰아냈다.

완전히 흩어져 버린 유월천의 내공을 전부 단전 밖으로 몰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각기 날뛰는 유월천의 내공을 다스리기 위해선 극도로 섬세하게 내력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내력을 움직이는 여인은 다름 아닌 유서하.

헤아릴 수 없이 변하는 곡조에 맞춰 섬세하게 내력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특출한 능력이었다.

단전을 벗어나자 점차 거칠게 날뛰는 유월천의 기운.

허나 이미 산산조각 나 버린 유월천의 기운은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유서하는 진무량의 단전에 향했던 의식을 차츰 되돌렸다.

그녀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마에선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으며, 입술의 핏기도 옅어진 상태였다.

혹여나 진무량이 내상을 입을 것을 우려해, 유서하는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진무량에게 끊임없이 내공을 흘려보낸 것이다. 절정의 무인이라고 한들, 벌써 탈진하고도 남았을 지경.

지친 목소리로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몸에 이상은 없나요?”

“아무 문제없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유서하는 기장이 풀렸다. 앉아 있는 것도 버거운지, 그녀는 팔로 몸을 지탱했다.

“그렇다면 내공은…….”

진무량은 묵묵히 유서하를 향해 손을 내보였다.

화르르르륵.

이윽고 진무량의 손에서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흔히 말하는 삼매진화의 경지.

“내공 쪽도 이상 없어.”

지친 기색이 가득했던 유서하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그려졌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당분간은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올리시면 안 돼요. 우선 아버지의 기운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부터 살피세요.”

“……고맙다.”

진무량의 진심이 담긴 짧은 한마디였다.

유서하의 도움으로 내공을 되찾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비천검문과 앙숙관계인 자신의 금제를 푸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도 분명 고민거리였을 터.

허나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그녀는 전혀 망설임 없이 금제를 푸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아니에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금제에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요.”

“그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그저 지금까지 내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유서하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대답했다.

“어울리지 않게 왜 이래요? 그냥 평소처럼 대해 줘요.”

“평소에 내가 어떤데? 난 원래 내 사람 앞에서는 생각 같은 거 안 숨겨.”

진무량과 유서하는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진무량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그를 유서하가 재빨리 붙잡았다.

“잠시만 여기 있죠. 내공을 되찾았다고 해도 부상은 여전해요. 멸천대원들도 지금 모두 지친 상태예요.”

진무량은 물끄러미 유서하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어차피 나한텐 못 숨겨.”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오랜만에 둘만 있으니까 좋아서요.”

진무량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유서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런 곳에 있으니까 마교에 오기 전이 생각나네요. 그땐 거의 노숙만 했는데. 많이 힘들었죠?”

“별로. 그때 귀찮았던 건 툭하면 나서대는 쓸데없는 네 호위무사였지.”

“후후. 무겸도 생각나네요.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는데.”

“다른 건 몰라도 놈의 생명력 하나는 바퀴벌레 수준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웬만한 놈은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일 걸.”

“굳이 벌레와 비교할 필요는 없잖아요. 셋이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 황룡표국의 표행에 참석했던 것도 기억하나요?”

“당연하지. 내 기억력이 어떤지 알잖아.”

“참, 그때 신투가 출현했던 장소들을 순식간에 외워 버렸죠.”

그 당시 상황이 떠오른 유서하는 왠지 모르게 감회에 젖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그때 사실 남 표두가 신투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그래서 놈이 물건을 훔치게 놔두고 금정신단은 내가 챙겼지.”

유서하는 화들짝 놀라며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뭐라고요? 금정신단은 왜……?”

“유월천의 금제를 금정신단으로 풀 생각이었어. 거기에 대해선 너무 파고들지 마. 너도 공범이 됐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두 개의 금정신단 중 하나를 네가 먹었거든.”

영문을 몰라 하던 유서하는 곧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맹사에게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을 때. 분명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내상이었으나, 후유증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유됐다.

진무량에게 자세히 캐묻진 않았지만 분명 의심스러운 구석은 남아 있었다.

유서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은 낭자가 표행을 도와준 답례도 보낸다고 했는데…….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 먹은 걸 어쩌라고.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표물들도 다 도둑맞았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냥 마음 편하게…….”

유서하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진무량은 급히 뒷말을 바꿨다.

“생각할 수 없겠지. 황룡표국의 피해는 언젠가 내가 변상하지. 그럼 되잖아.”

“당신만의 책임은 아니죠. 저도 금정신단을 먹은 만큼 책임이 있어요.”

“그럼 반반씩 변상해. 이런 걸 굳이 고민할 필요 없잖아.”

유서하가 슬쩍 진무량을 흘겨봤다.

“마음이 편해서 참 좋겠네요.”

진무량은 먼 곳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표행이 끝난 다음에는 영사문에 갔었지. 더럽게 귀찮게 굴던 꼬맹이가 생각나네.”

“하긴, 당신을 참 많이 따랐죠.”

“정확하게는 귀찮게 군 거지. 예상치 못했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됐어.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진무량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를 따라 마교로 온 건 후회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때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던 거예요?”

“네 믿음을 배신한 건 사실이니까.”

유서하는 진심이 담긴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을 따라온 거 후회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괜한 일에 마음 쓰지 말아요.”

진무량은 시선을 돌리며 농담을 건넸다.

“특별히 신경 쓰고 있던 건 아니야. 그냥 생각나서 물어봤어.”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진무량의 배려를 유서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본가에서 지낼 때는 늘 시종들이 깨끗한 옷을 갖다 주었으며, 음식도 언제나 익숙한 것들로만 차려 주었다.

모두 진무량이 신경 써 주지 않았다면 불편함을 겪었을 것들.

사실 옷이나 음식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배려해 준다는 그 사실이 가장 고마운 것이었다.

유서하는 진무량에 대해 생각할수록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감추고 있던 본론을 꺼냈다.

“꼭 해야 할 말이…….”

“하지 마.”

진작에 유서하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진무량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유서하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전 이제 다시 비천검문으로 돌아갈 거예요.”

“가지 마. 널 마교로 데려오면서 했던 약속들도 아직 지키지 못했어.”

“지금 비천검문이 움직이고 있어요. 제가 여기 있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거예요.”

한껏 날카로워진 음성으로 진무량이 물었다.

“이러려고 금제를 풀어 준 건가? 이제 금제도 풀어 줬으니 나는 필요 없지 않느냐, 이제부턴 착하게 살아라. 뭐 그런 의미야?”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금제를 풀어 준 건 당신이 살았으면 하는 이유 말곤 없어요.”

진무량은 이제 마교로 돌아갈 수 없다. 천군위가 죽은 이상 마교에서 활개 치는 구중련을 막을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마교를 떠난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유서하를 되찾으려는 비천검문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비천검문은 시작일 뿐, 유서하를 되찾지 못한다면 남궁세가를 비롯한 정파의 세력들도 나서기 시작할 터.

만약 그들과 겨뤄 희생자가 생긴다면 무림맹은 이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유서하는 결심을 내린 것이다.

진무량을 떠나 그를 쫓는 비천검문을 막아 내기로.

“아무에게도 잡히지 마세요.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요.”

유서하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당신이 죽지 않아야만 저도 살 수 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