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결사 (1)
2018.02.04.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던 격렬한 접전.
그 치열했던 승부에서 승리한 쪽은 구중련주 담무흔이었다.
“크윽.”
담무흔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그의 전신에는 천군위가 새긴 검상이 깊이 남아 있었다. 그로 인해 담무흔은 이미 제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담무흔에겐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
천하에 그 누구도 자신과 대적하지 못하리란 확신.
그는 역대 구중련주들이 이뤄내지 못했던 경지를 훌쩍 넘어섰다.
그야말로 수백 년 동안 음지에 숨어 암약해 왔던 구중련이 당당히 강호의 모습을 드러낼 계기가 되어 준 것이다.
허나 천군위와의 대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천군위의 강함은 실로 예상했던 바를 훨씬 뛰어넘었다. 몸 상태가 회복되려면 족히 반년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였다.
담무흔이 몸을 휘청이자, 적무혁이 재빨리 그를 향해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신경 쓰지 마.”
담무흔은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내 그는 천군위의 시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 지독한 놈이군.”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나 천군위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치 눈을 돌리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눈길로.
몽원양과 감천기, 호율은 모두 그 눈길을 피했다. 천군위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의식적으로 그의 생전 모습이 떠올라 절로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모두 주목.”
담무흔의 목소리는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마교를 세울 것이다.”
천군위가 쓰러지고 사대신마들 중 세 명이 넘어왔다. 이미 천군위가 군림했던 마교는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분명히 구중련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들이 존재할 터. 그에 따른 담무흔의 처사는 한 가지였다.
“우리의 뜻을 따르는 자들은 후대하되,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조리 죽여라. 빠른 시일 내로 마교 내부를 정리할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감천기와 몽원양, 호율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미 대세는 구중련 쪽으로 기울었다. 소수의 저항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터.
마교 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은 두 사람 정도였다.
그중 하나는 교주의 호위를 담당했던 파운신검 여도강.
유달리 천군위에게 충성했던 그는 결코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여도강이라면 교주의 호위를 맡았던 자들을 모두 움직일 수 있다.
물론 여도강이 나선다고 해서 당장 대세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위험 요소를 지닌 자인 만큼 철저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남은 한 명은 진무량.
가장 거슬리는 존재를 꼽자면 만장일치로 그를 뽑을 것이다. 진무량은 그야말로 후환이 될 만한 싹.
그를 경계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잠재력이다.
하루가 다르게 상승해 가는 그의 무공 수준은 실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진무량이 사대신마의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또한 그 잠재력이었으니까.
이외에도 진무량이 위협적인 존재인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에게선 언제나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몽원양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적무혁을 향해 물었다.
“진무량은 확실히 처리해 뒀겠지?”
“당연하지. 지금쯤 황천길로 들어섰을 게야.”
그때 희미한 바람 소리와 함께 소천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소천광은 그대로 적무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소천광을 보며 적무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냐?”
“……진무량을 놓쳤습니다.”
적무혁의 인상이 단번에 굳어졌다.
진무량을 죽이기 위해 수백 명의 정예 무인들을 배치해 두었다. 게다가 진무량은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들과 맞서야만 했다.
연주 소리로 인해 주변이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기는 하였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내공을 운용한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따져 봤을 때도 진무량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을 터.
적무혁이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놈을 놓칠 수 있단 말이냐!”
격분한 적무혁에게 담무흔이 불편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때 감천기가 적무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진무량을 놓쳤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콜록. 콜록. 더 이상 네 말을 믿을 수 없다. 이번엔 내가 나서지.”
몽원양과 호율 또한 직접 나서고 싶은 기색을 내비쳤다. 세 사람 모두 진무량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놓고 싶었던 것이다.
담무흔은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일은 적무혁이 맡는다. 나머지는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이제 곧 천군위가 죽었다는 사실이 마교의 퍼질 것이었다. 당연히 마교 내의 엄청난 혼란이 찾아올 터.
그렇다면 예상치 못했던 돌방행동을 하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감천기와 몽원양, 호율은 그런 일을 사전에 방지해야 했다.
불편한 몸을 움직이며 담무흔이 말을 이었다.
“각자 맡은 바 임무는 확실하게 처리하라.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담무흔의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슬쩍 웃음 짓는 담무흔. 그의 눈빛에는 펄펄 끓는 야망이 감돌았다.
마침내 마교를 수중에 넣었다. 허나 이는 시작일 뿐.
‘이제부터 진정한 구중련의 천하가 펼쳐질 것이다.’
* * *
위지운과 유서하는 의식을 잃은 진무량을 부축한 채 집마전의 남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력을 다해 적을 상대하고 있는 등가휘와 주백기가 있었다.
위지운의 수하에게 위급한 상황을 전달받은 주백기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멸천대원들을 모두 이끌고 집마전으로 향했다.
연시우는 임무로 떨어져 있는 멸천대원들을 집결시키느라 아직 집마전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등가휘와 합류한 주백기는 곧바로 주변에 깔린 적들을 상대했다.
독룡각, 혈랑대, 철혈단의 무인들의 합공은 단숨에 멸천대를 위기에 빠뜨렸다. 허나 멸천대를 몰아붙이던 그들의 사나운 기세는 점차 약해졌다.
진무량을 죽이기 위해 너무 많은 인원을 소모한 탓이었다.
외부를 지켜야할 인원들까지 모두 진무량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으니, 당연히 포위망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등가휘는 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서하가 진무량을 구출해 내자, 등가휘는 곧바로 탈출을 감행했다. 주백기를 선두로 멸천대의 힘을 한 점에 집중시켰고, 마침내 멸천대는 집마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나 구중련의 집요한 추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집마전을 벗어난 등가휘와 주백기는 한자리에 모여 잠시 숨을 돌렸다.
그때 정찰 임무를 맡았던 멸천대원이 돌아와 두 사람에게 앞서 본 상황을 설명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근방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일일이 상대하기에는 상대의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멸천대의 진로를 막고 있는 상대는 그동안 마교에 숨어 있던 적무혁의 수하들이었다.
더 이상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어지자, 적무혁은 수하들을 모두 풀어 진무량의 추격에 나선 것이다.
등가휘가 신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놈들의 위치를 좀 더 자세하게 파악하라. 빈틈을 찾아 돌파할 것이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멸천대의 후미에서 위지운이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놈들의 위치를 일일이 파악할 시간이 없어. 집마전 쪽에서 우리를 쫓는 추격대가 접근 중이야.”
“놈들이 우리의 위치를 파악했나?”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거리상으로 봤을 때 곧 알게 되겠지.”
주백기는 답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길.”
집마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같은 시점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일단 상대의 정확한 의도와 목적을 알아야 그에 따른 대응책도 찾을 수 있는 법.
허나 당장 쫓기는 상태로 그런 것들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따져 봤을 때, 상대의 추격은 빈틈없이 완벽했다. 집마전 인근 전체를 둘러싸 진로를 차단하고, 뒤에서는 추격대를 보낸다.
즉, 적은 지금 완벽하게 합공을 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합공을 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허나 상대의 합공을 격파할 만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만이 감도는 장내에서 등가휘가 의견을 냈다.
“자네들은 대주님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게. 아직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서두른다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걸세.”
위지운이 대답했다.
“문제는 당장 뒤에 붙은 추격대야. 놈들이 우리의 위치를 알면 금세 포위망을 좁혀올 테니까.”
등가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운의 말은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러니까 내가 남아서 뒤를 쫓는 추격대를 따돌리겠네.”
주백기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등가휘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헛소리하지 마.”
등가휘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길게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적당히 추격을 따돌린 뒤에 나도 빠져나갈 테니.”
“……그럼 내가 남겠다.”
“자네들은 추격대를 따돌리고 빠져나갈 수 없어.”
등가휘는 결연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멸천대의 삼 조와 사 조는 장점이 분명한 만큼 약점도 뚜렷하다.
주백기는 추격대를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겠으나 도망치지는 못한다. 위지운과 수하들은 민첩하나 상대를 붙잡아 둘 힘이 모자라다.
“여기는 내게 맡기게. 대주께서 멸천대의 일조를 ‘전능’이라 칭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네.”
주백기와 위지운은 침묵을 지켰다. 등가휘를 위험에 빠뜨린 채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등가휘의 말은 모두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뜻을 정했다면 망설이지 말게.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지 않은가.”
주백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죽지 마.”
“물론이네.”
등가휘는 고개를 돌려 위지운을 향해 말을 이었다.
“대주를 꼭 살려야 하네. 대주께서만 살아 계신다면 멸천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네 걱정이나 해.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
등가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게. 곧 뒤따라가지.”
* * *
적무혁의 명령으로 멸천대의 추격을 일임 받은 자는 맹사였다.
한때 맹사는 멸천대의 일원이었던 자.
당연히 멸천대의 대해서 더 많은 것을 꿰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여 적무혁은 맹사로 하여금 추격대를 편성한 것이다.
“이 근처군.”
주변에 흔적들을 뒤지며 멸천대를 쫓던 맹사는 그들이 근처에 있음을 확신했다.
이내 맹사는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근방을 샅샅이 뒤져라. 수상한 흔적을 찾으면 즉시 날 부르거라.”
그때 저 멀리서 언덕에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는 겐가?”
맹사는 몸을 일으키며 의문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상대가 맹사는 상대가 등가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높이 솟은 언덕. 말에 탄 등가휘는 늠름한 자태로 맹사와 눈을 마주쳤다.
맹사는 등가휘를 확인하자마자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이것 참 오랜만이네. 우연히 만나서 그런가? 더 반가운 것 같아.”
“나 역시 네놈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뻔뻔한 낯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맹사는 얼굴에 길게 난 흉터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왜 혼자 있는 건가? 동료들에게 버림이라도 받았나 보지?”
등가휘는 바람에 흩날리는 흰 수염을 어루만졌다.
“짐승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다.”
맹사는 서둘러 손을 뻗은 채 휘휘 내저었다.
“왜 이렇게 공격적이실까? 내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이것만 들어봐.”
등가휘의 대답이 이어지기 전에 맹사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그러면 멸천대원들의 목숨은 내가 확실히 보장하지. 우리가 노리는 건 진무량의 목숨뿐이야.”
“…….”
“넌 언제나 멸천대가 가장 중요했잖아. 허니 진무량을 넘겨. 그럼 멸천대는 전혀 다치지 않을 거야. 뭐, 새로운 마교의 주역이 될 수도 있지.”
인내의 한계를 느낀 등가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열한 놈. 하긴 그런 썩은 생각이 바탕이 되어야 그 혓바닥도 움직이는 거겠지.”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
“가소롭구나. 네깟 놈 따위가 대원들의 목숨을 지켜 준다 했느냐?”
“네깟 놈……?”
“그렇다. 이 간사한 금수야. 확실히 기억해 두거라. 멸천대에서 대주의 목숨을 팔아 연명할 생각을 가진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순간 맹사의 표정이 구겨졌다.
“흥. 이런 좋은 제안을 차 버리다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맹사는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스릉.
곧 맹사의 곁에 있던 흑의를 입은 사내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들은 어느새 인근을 가득 메웠다.
맹사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꼭 힘을 써야 말이 통한다니까.”
“힘으로 생각이 바뀌는 것은 너 같은 금수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등가휘는 창을 비껴 들며 맹사에게 말했다.
“참된 의지는 힘이 아닌,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법이니라.”
등가휘를 따르는 멸천대원들 또한 창을 뽑아 들었다.
등가휘와 멸천대원들에게는 쥐고 있는 창 한 자루와 말 한 필밖에 없었다.
허나 수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전혀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대주와 동료들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뼛속 깊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렵지 않았다. 상대가 수백 명이 아닌, 수천수만 명이라고 하더라도.
등가휘와 수하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나찰의 가면을 썼다.
등가휘는 가장 먼저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갔다. 이윽고 이어지는 등가휘의 일갈.
“자 그럼 어디 한번 놀아보자꾸나!”
당당한 등가휘의 외침은 지축을 뒤흔들었다.
이윽고 등가휘를 따라서 멸천대원들 역시 눈앞의 적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