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최후
2018.02.01.
스스스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언제나 들렸던 바람소리.
누구도 그 소리 속에 은밀한 인기척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걱.
은색 실처럼 빛나는 검영은 그대로 혈랑대 무인의 목을 꿰뚫었다. 그는 제대로 된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때 실이 풀린 인형처럼 쓰러진 사내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멸천대의 삼 조장 위지운이었다.
“…….”
위지운은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기감을 끌어올렸다.
과거 위지운이 몸담았던 살막에서도 최고의 살수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인 암혼인(暗魂引).
암혼인의 경지는 오감을 극한까지 상승시킨다. 청각은 미세한 벌레의 걸음 소리를 듣고, 촉각은 주변에 모든 움직임을 감지해 낸다.
위지운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변한 그의 시야에는 감춰진 수많은 것들이 보였다.
저 멀리 수풀 속에서 경계를 펴고 있는 독룡각의 고수들부터, 떼를 지어 길목을 막고 있는 철혈부의 무인까지.
그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한 위지운은 집마전 내부로 향하는 최적의 경로를 계산했다.
그때 위지운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인기척이 접근해 왔다.
위지운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의 속도는 결코 예사로운 수준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휘몰아치는 바람.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유서하였다.
긴 머리가 흩날리는 유서하를 바라보며 위지운이 말했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유서하의 무공 수준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멸천대 내에서도 작정하고 경공을 펼치는 자신의 뒤를 따라올 수 있는 자는 대주를 제외하곤 없다.
애초에 유서하는 업고 달릴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 자신을 자력으로 쫓아왔다.
물론 그녀가 따라오는 동안 경계를 서던 몇몇의 무인들을 해치운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일 뿐이었다.
당장 유서하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만 봐도, 첫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유서하 또한 온몸에서 느껴지는 미지의 기운을 확실하게 자각했다.
다만 갑작스러운 변화의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 변화의 시발점은 금정신단. 온전히 흡수된 금정신단은 유서하에게 엄청난 내력 증진을 일으킨 것이다.
허나 금정신단의 효과는 단순한 내력의 증진일 뿐.
진정으로 유서하의 무공이 일취월장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은 바로 경험이었다.
수많은 무공을 접목시켜 본인만의 음공으로 변화시킬 정도로 유서하는 기를 다루는 재능이 있었다.
다만 치명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실전 경험.
허나 진무량과 함께하면서 유서하는 수없이 많은 강자들과 대면했다.
평생토록 한 번 스쳐 지나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고수들. 그들과의 승부는 모두 유서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수없이 패배의 쓴맛을 겪었다. 그로 인해 한없이 무력함을 느꼈으며, 누구보다 무공의 증진에 노력해 왔다.
수없는 패배에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했던 노력.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거기에 금정신단으로 내력이 증진되자, 유서하는 평소 자신이 구상해 왔던 것들을 모두 실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서하가 위지운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집마전까지는 얼마나 남았죠?”
“거의 다 왔어.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야.”
집마전은 마교 내에서 가장 내부가 넓은 곳 중 하나이다. 암혼인을 통해 주변을 수색한다 해도 진무량의 위치를 찾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주변의 경계도 외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할 터. 당연히 지금처럼 뜻대로 활보할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유서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요.”
진무량은 당장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는 몸. 그가 위기에 빠졌다면 촌각의 시간조차 낭비해서는 안 됐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당장 확실한 대책이 없잖아.”
위지운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어. 일단…….”
“제게 방법이 있어요.”
위지운은 유서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방법?”
“일단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야 해요.”
집마전의 도착한 유서하와 위지운은 근처에 높이 솟은 담벼락으로 향했다.
다만 시간이 없었기에 모든 적들을 일일이 처리면서 올 수는 없었다. 당연히 두 사람의 움직임은 발각될 수밖에 없었고, 곧 벌떼처럼 무인들이 몰려왔다.
“쯧, 더럽게 많이도 몰려들었네.”
담벼락 아래로 보이는 수십 명의 고수들을 보며 위지운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여기서 대주의 금제를 풀 수 있는 건 확실한 거야?”
사실 유서하에게도 확신은 없었다.
진무량에게 내공을 전할 방법은 생각해 두었으나, 실제로 이렇게 떨어진 채로 금제를 풀었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허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네. 확실해요.”
유서하는 그 누구보다 진무량을 구하고 싶었다.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온몸의 피가 전부 마르는 것만 같았으니까.
진무량을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의 방법이 불가능하다면 그 사실을 바꿔야 한다.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니까.
“시작할게요.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도 제 근처에 접근시키면 안 돼요.”
“그건 나한테 맡겨.”
유서하는 칠현금을 어루만지며 정신을 집중했다.
현을 지그시 누른 손을 떼면서 유서하가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다리리링―!
내력이 담긴 유서하의 연주는 집마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유서하는 거기서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울려 퍼지는 음을 통해 진무량의 위치를 찾아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음을 변형시키는 것이 음공의 기본. 유서하는 자신의 음을 기감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음이 닿는 범위라면 그 어떤 상대라도 찾아낼 수 있을 터.
유서하는 곧 자신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음을 통해 진무량의 기운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허나 가장 큰 고비가 남아 있었다.
음을 통해 진무량의 단전에 있는 유월천의 내공을 움직이는 건 극도의 세밀함을 요한다. 하여 진무량의 금제를 해방시킨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헌데 이번에는 진무량이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금제를 풀어내야 했다.
순간 유서하의 손끝이 떨렸으나 잠시일 뿐이었다.
어느샌가 당연해져 버린 진무량과 함께하는 일상. 이젠 그가 없는 자신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내공이 부족하다면 진기를 다 써서라도, 설령 목숨이 끊어진대도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진무량을 구할 수만 있다면.
디링―! 디리리링―!
아름다운 유서하의 곡조가 점차 변해 갔다.
그녀에게서 손끝에서 펼쳐지는 곡조는 어둡고 음침했다.
이윽고 마치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듯 음산한 곡조가 이어졌다.
* * *
진무량의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수십 명의 고수들.
그들은 각각 사대신마의 직속 수하들이자, 마교 내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무인들이었다.
게다가 포위당한 진무량은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에 중상을 입은 상태.
어떻게 봐도 마교의 고수들이 유리해 보이는 상황. 허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진무량을 둘러싼 수십 명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공포밖에 남지 않았다.
그토록 맹공을 펼쳤음에도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진무량을 죽이지 못했다. 벌써 희생당한 동료들만 해도 절반가량.
헌데 그런 그가 이제 내공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유서하의 연주와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그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당장 진무량에게서 숨이 막힐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으니까.
스윽.
진무량이 가볍게 염옥창을 움직이자, 주변에 모든 무인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나마 가장 먼저 이성을 찾은 자는 소천광이었다.
‘사대신마들이 왜 그토록 진무량을 경계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그들은 한 번 겨뤄 본 자신보다 진무량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을 이제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인간이 아니다.’
소천광은 재빨리 곁에 있는 철혈부의 무인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집마전 내에 무인들을 불러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진무량의 금제가 풀린 것은 분명 예상치 못했으나,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무량은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숨이 끊어졌을 정도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어떻게든 그 기회를 살려 여기서 쓰러뜨려야만 했다.
만약에 사태를 대비해 집마전 내에는 수십 명의 무인들을 대기시켜 두었다. 또한 외부를 지키는 자들까지 합친다면 당장 수백 명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모일 터.
스스스스스스.
그때 진무량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검은 광풍이 몰아쳤다.
“각오해. 감히 이딴 짓을 벌인 대가는 혹독할 테니까.”
이윽고 검게 타오르는 염옥창. 진무량의 내공에 반응한 염옥창의 기운은 한없이 커져갔다.
* * *
“……이거 정말 엄청나군.”
난자된 수백 명의 시체를 확인한 위지운이 작게 중얼거렸다.
최대한 빨리 추격을 뿌리치고 도착했으나 이미 상황은 정리된 뒤였다.
그 사실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백 구의 시체들 사이로 서있는 사람은 오직 진무량뿐이었으니까.
그는 온몸이 피로 칠갑된 상태로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위지운은 곧바로 진무량의 상태를 눈치챘다. 그는 지금 심마에 빠진 상태. 즉,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다.
당장 한시가 급하지만, 우선은 진무량이 스스로 진정되길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때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걸어갔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위지운이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떨어져!”
위지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서하는 한 걸음씩 진무량을 향해 다가갔다.
진무량은 곧 염옥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에게 다가간 유서하는 묵묵히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쉬이이익!
그대로 유서하를 향해 떨어지는 염옥창.
멈칫.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져 내리던 염옥창은 유서하에게 닿기 직전에 멈췄다.
이내 천천히 진무량의 초점이 돌아왔다.
“뭐야, 너였냐?”
“미안해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돕지 못해서.”
“그런 표정 짓지 마. 아 정도는 늘 겪는 일이니까.”
“알겠어요. 그럼 일단…….”
그 순간 진무량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유서하는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진무량은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한 몸. 마지막 긴장까지 풀리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유서하는 안쓰러운 듯 다친 진무량을 꼭 껴안았다.
“잠깐이라도 쉬세요. 이제부터는 제가 맡을게요.”
* * *
완전히 초토화된 공터. 주변은 조각조각 난 건물의 잔재들로 가득했다.
천군위와 구중련주의 격렬한 일전으로 인해 집마전 내의 회의실은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투지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콰와아아앙!
연이어 터져 나오는 폭발. 허나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단순한 천군위의 검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묘리가 녹아 있었다. 그런 천군위의 검을 구중련주는 모두 받아냈다.
주변을 지키던 적무혁과 사대신마조차 두 사람의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있어선 굉장히 낯선 경험이었다.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무인의 격전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들에게 비슷한 경지의 상대는커녕, 적수가 될 만한 상대도 찾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주 가끔 비슷한 경지의 상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스스로가 모자라다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었다.
그 자부심은 수없이 많은 강자를 꺾으면서 내면에 굳어 버린 것이었다.
허나 두 사람의 격전을 보고 있자니, 반평생 동안 굳어 있던 자부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군위와 구중련주는 확실히 자신들보다 더 높은 경지였다.
그 생각은 두 사람의 일전을 바라보는 모두의 머릿속에 든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 인정할 만큼 천군위와 구중련주의 격전은 특별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움직임을 멈춘 채 거리를 벌렸다.
천군위가 말했다.
“역시 강호는 넓군. 자네만 한 인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니.”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실로 마교 제일이란 말이 어울릴 만한 솜씨였네.”
천군위는 스스로 직감했다.
지금까지는 상대와 호각으로 겨룰 수 있었으나, 더 이상은 무리라는 사실을.
역시 가장 큰 원인은 노쇠해진 몸이었다. 더 이상은 병약한 신체를 감출 수 없었다.
죽음을 직감한 천군위는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검을 잡고 일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소싯적에는 그야말로 천하를 호령하며 다녔다. 그러면서 수없이 많은 인연을 만나고, 또 헤어졌다.
언젠가 자신의 최후를 그렸을 때, 가장 원했던 바는 격전 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한 명의 무인으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노후에 찾은 취미를 이어 가지 못한다는 것 정도일까.
“자네의 이름이 뭔가?”
“담무흔(澹無痕).”
구중련주 담무흔이 복면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마교는 내가 갖겠네.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이루지 못한 무림일통을 이뤄낼 테니까.”
“꽤나 원대한 꿈을 가졌군. 허나 진정으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자네가 아니야.”
담무흔은 가벼운 조소를 흘렸다.
“그 말의 의미가 궁금하군. 숨겨 둔 제자라도 있는 건가?”
“글쎄……. 다만 확실한 건 자네의 천하는 그리 길지 않을 게야.”
강호에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힘이 출현했다. 강맹한 힘을 지닌 그들은 능히 천하를 어지럽힐 능력을 지녔다.
허나 그와 맞서는 것은 자신의 천명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남겨진 자들의 몫.
자신의 의지는 전해 두었으니, 어떻게 성장하게 될지는 그들의 선택이었다.
다만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다음 시대를 이끌어 나갈 자는 충분히 믿음직스러우니까.
조용히 생각을 마친 천군위는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하지. 내 생에 마지막 검이니 만큼 가볍지는 않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