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신마회의 (1)
2018.01.25.
맡은 임무의 진행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등가휘가 진무량의 본가를 찾았다.
일전에 미리 등가휘는 전서구를 통해 방문 의사를 알렸고, 진무량은 그를 접견실로 불러들였다.
접견실에서 진무량을 마주한 등가휘는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를 향해 진무량은 눈짓으로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등가휘가 자리에 앉자, 진무량이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그렇습니다.”
듬성듬성 난 등가휘의 새치가 유독 진무량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한 지도 꽤나 긴 세월이 흘렀다.
자신이 멸천대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등가휘는 멸천대의 일 조를 맡아 통솔해 왔다. 그는 실제로 멸천대 내에서 가장 고참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멸천대를 가장 오래 지탱해 온 기둥 같은 존재. 다른 조장들도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등가휘를 많이 의지했다.
“따로 말하진 않겠지만, 항상 몸조리에 신경 쓰도록 해.”
퉁명스러운 진무량의 어조에 등가휘가 가볍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것입니까?”
“걱정은 무슨. 충고라고 생각해.”
“전 아직 팔팔하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등가휘가 눈썹을 둥글게 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근래에는 정말 근심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진무량이 멸천대주로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없을 때 멸천대는 사실상 와해되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결속력이 강한 조직이라도 구심점이 없으면 흩어지기 마련. 멸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각각 개성이 강한 대원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그들을 이끄는 멸천사성은 한자리에 모이지도 않았다.
구색만 남았을 뿐, 이미 멸천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허나 진무량이 돌아옴으로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를 중심으로 멸천대는 다시 하나로 뭉친 것이다.
그야말로 멸천대의 대주만이 이뤄 낼 수 있는 일을 진무량은 멋지게 해냈다.
진무량의 내상을 알았을 때, 다시 멸천대가 흩어지나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그 또한 기우였을 뿐. 진무량은 멸천대를 확실하게 휘어잡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적절한 임무의 분배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허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서로 간의 믿음이었던 것 같다.
각자 바라는 바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등가휘는 진무량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을 몸담은 멸천대를 누구보다 잘 이끌어 줄 것이라는 확신.
“요새만 같다면 앞으로 삼십 년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진무량은 가벼운 웃음을 흘린 뒤에 화제를 돌렸다.
“맡은 임무들은 잘 처리 중인 것이냐?”
“위지운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 있고, 예상외로 연시우도 잘 쉬고 있습니다.”
“그래?”
백철우와 관련된 세력들을 들쑤시고 있다는 위지운의 소식은 익히 전해 들었다.
다만 연시우의 소식은 약간 의외였다. 어찌 보면 그에게 가장 힘든 임무야말로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것이었다.
“연시우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특별한 행적은 없습니다. 다만 연희 소저의 의방에만 자주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이유였군.”
“그게 무슨……?”
“그럴 만한 일이 있다. 자식이 쉬라고 할 땐 그렇게 반발하더니.”
이내 진무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헛기침을 한번 내뱉었다.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신중한 목소리로 진무량이 물었다.
“구중련의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있느냐?”
“아직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처음 구중련에 대한 조사를 지시받았을 때만하더라도, 그들의 흔적을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허나 예상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사실 등가휘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암영대를 비롯한 마교 내의 모든 정보조직들이 구중련의 흔적을 찾고 있다.
헌데 사소한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이건 분명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마교 내에 존재하거늘, 어찌 사소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진무량의 목소리가 등가휘의 상념을 깼다.
“치밀한 놈들이라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어. 서두르지는 말되 집요하게 추적해.”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등가휘는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진무량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유월천의 금제를 풀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한 것입니까?”
“……그래.”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취해 두었다.
우선 추연희가 백방으로 내상을 치유할 방법을 찾고 있고, 그 외에도 금정신단과 비슷한 효능을 보이는 영약을 찾으라는 명령까지 내려 둔 상태였다.
확실한 어조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금제를 풀기에는 아직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해. 하지만 내공을 되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등가휘는 더 이상 진무량에게 내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내공을 되찾고 싶어 하는 건 진무량 본인일 터. 또한 그라면 반드시 금제를 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음이 분명했다.
보고를 모두 들은 진무량은 등가휘에게 가장 중요한 용건을 말했다.
“곧 신마회의가 열릴 것이다. 함께할 멸천대를 네가 직접 선별해 줘.”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군요.”
향후 마교의 진로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신마회의.
오직 마교의 교주와 사대신마로 이루어진 회의는 외부의 출입을 완전히 차단한다.
집마전 근처에 있을 수 있는 건 오직 사대신마의 직속 수하들뿐.
그들이 집마전을 철통처럼 경계한다. 이건 오랜 시간 행해진 신마회의의 규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교에서도 가장 직위가 높다 할 수 있는 사대신마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서로의 힘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계기가 될 터.
적자생존의 마교에서 얕보이는 행위는 약점을 보란 듯이 내보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로 선별해 두겠습니다.”
* * *
신마회의 당일.
회의가 열리는 집마전으로 통하는 곳은 총 네 곳이었다. 동서남북에 하나씩 위치한 문을 통해서만 집마전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네 개의 문 중 서문에 독특한 행색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모두 뒤덮는 죽립을 쓰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두터운 장갑까지 착용한 행색이었다.
무리의 선두에 선 사내의 이름은 감천기(甘天奇).
그는 사대신마의 일인으로 독룡각(毒龍閣)의 주인이었다.
독룡각은 흔히 사천당가와 비교되곤 했다. 두 세력 모두 독과 암기가 가장 큰 무기였기 때문이다.
독은 무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것 중에 하나로,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이다.
독은 그 쓰임새가 수없이 많다. 단순히 상대를 중독시켜 죽이는 방법만 하더라도 수천수만 가지에 달할 정도이다.
뛰어난 독은 절정을 뛰어넘는 무인을 간단히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 다만 그런 독은 누구나 쉽게 배합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독공을 익히는 것 또한 마찬가지.
그런 독에 있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
그가 바로 독룡각주 감천기였다.
뒤를 따르는 독룡각원들을 서문에 배치시키고, 감천기가 집마전 내부로 들어갔다.
회의실로 향하던 감천기는 곧 익숙한 인기척을 느꼈다.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
“여어,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가?”
감천기에게 말을 건 상대는 혈랑대주(血狼隊主)의 호율(昊律)이었다.
마교 내의 타격대 중 유일하게 멸천대와 비견될 만한 혈랑대였다.
멸천대와 혈랑대는 서로 활약하는 장소가 달랐다.
멸천대가 무림맹을 비롯한 마교 외부에 적을 척결하는 존재라면, 혈랑대는 반대로 마교 내에서 활약했다.
주로 분란을 일으키거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는 마교의 세력들이 혈랑대의 상대였다.
귀곡신성 내의 모든 세력이 혈랑대의 눈치를 살필 정도로, 그들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호율은 반가움의 표시로 감천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호율의 팔에 찬 팔찌에서 독특한 소리가 울렸다.
짤랑짤랑.
“…….”
감천기는 호율의 모습을 못 본 체하며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그러자 호율이 잽싸게 감천기를 향해 다가가 말했다.
“에이, 인사의 대답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감천기는 목에 맨 천을 입까지 끌어올리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쳇, 알겠네. 귀찮게 굴지 않으면 될 거 아닌가.”
감천기는 미세하게 죽립 사이로 보이는 눈으로 효율을 흘끗 쳐다본 뒤에 마저 가던 길을 걸어갔다.
호율은 불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감천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내 두 사람은 신마회의가 열릴 회의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두 사람 다 왜 이렇게 늦은 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감천기와 호율을 꾸짖는 노인.
그의 정체는 철혈단(鐵血團)의 단주 몽원양(蒙願洋)이었다.
철혈단은 사실상 마교 내의 모든 정보조직을 하나로 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교 내에 모든 정보는 철혈단에서부터 나온다는 풍문이 떠돌 정도였으니까.
암영대를 비롯한 거대한 정보조직부터 아주 방파까지 모두 철혈단에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니 속설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드넓은 강호에서 가장 필요한 힘 중 하나인 정보. 그것을 뜻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가 바로 몽원양이었다.
“노친네 성깔은 여전하네.”
머리를 긁적이는 호율을 향해 몽원양의 일침이 떨어졌다.
“왔으면 빨리 자리에 앉아야지. 뭣들 하는 게야?”
호율은 피곤한 한숨을 내쉴 뿐, 별다른 대꾸 없이 몽원양의 말에 따랐다. 천으로 얼굴을 가린 감천기 또한 묵묵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 감천기는 목에 둘둘 맨 천을 풀었다. 그리고는 거친 기침소리를 냈다.
“콜록. 콜록.”
기침소리가 나자마자 몽원양의 이마에 성난 주름이 잡혔다.
“그 버릇은 아직도 못 고친 겐가?”
“버릇이란 게 무섭더군. 지금까지 참는 것도 힘들었어.”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호율은 탁자에 팔을 괜 채 얼굴을 갖다 댔다.
짤랑짤랑.
그러자 그의 팔에 찬 팔찌가 다시 독특한 소리를 냈다. 그 상태로 호율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진무량은 어떻게 된 거야? 암실에서 모인 뒤로 적무혁한테 연락이 없네.”
뜻 모를 호율의 발언.
허나 감천기와 몽원양은 전혀 놀라거나 의문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구중련의 은신처에서 세 사람은 이미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기침소리.
금팔찌를 한 사내.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
그들은 각각 감천기와 호율 그리고 몽원양이었다.
즉, 진무량을 제외한 사대신마는 모두 구중련의 사람인 것이다.
호율의 물음에 감천기와 몽원양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콜록. 콜록. 나도 모르지. 그토록 자신 있어 했으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대업에 바치는 제물이라고까지 했으니.”
“하여간, 진작 처리했으면 좋았을 것을.”
구중련의 대업. 그때는 바로 신마회의 당일이었다.
사실 이 순간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맹사를 이용해 사대신마의 후보로 거론되었던 백철우를 포섭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맹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정도로 백철우를 현혹시키기도 했다.
갑자기 진무량이 나타나서 그를 해치우지만 않았다면 이 자리에 불안요소 따윈 없었을 것이다.
짤랑짤랑.
호율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뭐, 이렇게 된 이상 적무혁을 믿어야지. 우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지 않은가.”
“흐음……!”
“콜록. 콜록.”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회의실 문을 향했다.
조금 있으면 마교의 교주 천군위가 그 문을 통해 들어올 터.
그 순간,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중련의 대업이 시작될 것이었다.
* * *
감천기와 호율 몽원양이 회의실에 모이기 얼마 전.
진무량은 멸천대를 이끌고 집마전 남문으로 향했다. 말을 탄 멸천대원 오십여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을 몰면서 위지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마전이라……. 생각해 보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네.”
등가휘는 넌지시 위지운을 향해 주의를 줬다.
“특히나 행동을 조심해 주게. 사소한 말다툼이 큰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네.”
“뭐, 그럼 상대가 알아서 조심하겠지.”
“흐음, 맞는 말이긴 하네만…….”
등가휘는 가볍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위지운의 거친 행동은 분명 걱정거리였다. 허나 주백기는 구중련의 조사를 이어 가야 했기에, 이곳에 데려올 수 없었다. 게다가 완쾌되지 않은 연시우를 빼니 남은 사람은 위지운뿐이었다.
등가휘는 미세하게 머리를 흔들며 긴장된 마음을 풀었다.
사실 자신들은 집마전 밖에서 대기하는 것일 뿐. 그렇게 노심초사할 문제는 아니었다.
괜스레 긴장이 되는 이유는 역시 사대신마들이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안고 말을 달리다 보니, 진무량과 멸천대원들은 곧 집마전 남문에 도착했다.
진무량은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등가휘를 향해 말했다.
“그럼 갔다 오도록 하지.”
집마전의 남문을 통과하는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대신마뿐. 즉, 더 이상은 함께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믿음직한 등가휘의 대답을 듣고 진무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는 홀로 집마전 남문으로 들어갔다.
일각(15분) 후.
등가휘는 진무량과 헤어졌을 때와 같은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때 의문스런 기척이 느껴졌다.
등가휘는 곧바로 안력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접근해 오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독룡각, 혈랑대, 철혈단. 자주 왕래는 없었으나 워낙에 널리 알려진 자들이었다. 하여 그들을 알아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왜 여기를 찾아온 거지?’
사대신마의 수하들의 임무는 각자 맡은 문을 지키는 것뿐이다. 이렇게 자리를 이탈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위지운 또한 등가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공을 일으키며 위지운이 주변을 경계했다.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더니, 이놈들은 다 뭐야?”
독룡각의 무인들은 뒤로, 혈랑대와 철혈단의 무인들은 좌우로 넓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포위를 하려는 심산. 이내 그들에게선 명백한 적의까지 느껴졌다.
“다들 경계 태세를 갖추어라!”
멸천대원들은 즉시 등가휘의 명령에 따랐다.
주변을 살피던 등가휘의 머릿속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뒤늦게 번뜩였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나 상대는 멸천대에게 명백한 적의를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면…….
‘대주님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