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변화
2018.01.21.
유서하는 진무량과 함께 거리를 걸었다.
앞장서서 걷던 진무량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유서하의 주장으로 의방을 나서긴 했으나, 아직 그녀의 부상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진무량이 걸음을 늦추며 유서하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서하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말했다.
분명 심각했던 내상이었으나, 후유증은 전혀 남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금정신단의 효능 덕분이었다.
또한 금정신단의 극양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단전 깊숙이 남아 있었다.
“좀 더 의방에서 쉬어도 돼. 정말 괜찮겠어?”
“걱정하기 않으셔도 돼요. 혹시 이상이 생기면 그때 추 소저를 찾아갈게요.”
한동안 침상에 누워 있다 보니 점점 답답함을 느끼던 차였다.
게다가 꼼짝 못하는 상태로 진무량의 눈빛을 받아 내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쏘아지는 눈길은 역시 부담스러웠다.
초라한 상태로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다 보니 부끄럽기도 했고.
유서하는 오랜만에 느끼는 바깥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지독히 차가웠던 바람도 점차 그 기운이 약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눈이 녹은 자리에는 새싹이 돋아났다. 분명 봄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진무량을 따라 걷던 유서하의 머릿속에 문득 추연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추 소저에게는 저를 어떻게 소개한 건가요? 그런 식으로 소개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고 하던데.”
진무량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왜? 흉이라도 봤을까 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궁금해서요.”
유서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진무량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 소개했던 사람은 유서하가 처음이었으니까.
“소중한 사람.”
“네?”
“널 그렇게 소개했어.”
진무량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내게 있어서 넌 그런 존재야. 설령 언젠가 네가 나를 떠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고.”
유서하는 차마 진무량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진무량의 마음은 너무 고마웠다. 또한 자신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진무량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허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진무량과 함께 있을 수는 없다.
구중련에 관한 임무를 마치면 비천검문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천검문에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진무량과 함께 마교로 향했다. 견무겸을 통해 이유를 전하긴 했으나, 다들 지금쯤 많이 걱정하고 있을 터.
분명히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이유들로 진무량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 이상 마음을 주면 떠나는 순간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았기에.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 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점차 귀곡신성의 외곽으로 향했다.
어느새 번화한 거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부턴가 보이는 거라곤 길게 이어진 담장뿐이었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담장은 곧 문이 활짝 열린 대문으로 이어졌다.
진무량의 걸음은 정확히 그 대문 앞에 멈췄다.
“도착했어.”
유서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대궐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 보이는 게 전혀 없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어디긴. 내 집이지.”
유서하는 무의식적으로 대문 안에 모습을 살폈다.
외견과 어울리게 그 내부 또한 엄청나게 넓었다. 거대한 장원 너머에 보이는 가옥만 해도 수십 채가 넘었다.
유서하는 믿기지 않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잘못 찾아온 건 아니죠?”
“자기 집을 잘못 찾는 사람도 있냐?”
그 말을 끝으로 진무량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진무량은 익숙하게 장원 내부를 거닐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멸천대원부터 시작해서 장원을 관리하는 사람들까지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진무량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진무량의 뒤를 따라 걸으며 유서하가 물었다.
이내 진무량이 도착한 곳은 수십 개의 가옥 중 가장 넓은 곳이었다.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유서하를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넌 여길 쓰면 돼.”
“이렇게 좋은 곳에 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유서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까지 봐 왔던 가옥들 중에 진무량의 거처는 단연 최고로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놀라는 유서하의 모습이 재밌어진 진무량은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그럼 어디 살고 있을 것 같았는데?”
“……어쨌든 이런 곳은 아니었어요.”
고민하다가 대답하는 유서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무량은 가벼운 실소를 흘렸다.
“그럼 일단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고.”
진무량이 안내해 준 방에 도착한 유서하는 우선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하나둘씩 정리가 끝나갈 때쯤, 문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계시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는 연시우였다.
갑작스러운 연시우의 방문에 유서하가 의문을 나타냈다.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그렇소.”
연시우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맹사와 일전을 겨뤘을 때, 유서하에게 도움을 받았었다. 유서하가 아니었다면 수하들은 물론, 추연희의 목숨마저 지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증오하는 검선의 여식이라곤 하나, 그 정도의 도움을 받고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연시우는 결심이 선 듯, 망설이지 않고 유서하를 향해 짧게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는 정말 고마웠소.”
유서하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연시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움을 받은 건 분명 사실이나, 빚을 질 생각은 없소. 그러니 내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겠소.”
예상치 못한 연시우의 행동에 유서하가 서둘러 자신의 뜻을 밝혔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꼭 소저를 위해서만 보답하려는 것이 아니요. 도움을 받은 이상 그에 답하는 건 내 방식이기도 하오.”
연시우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지 말하시오. 내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내게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면 내 뜻대로 보답하겠소.”
유서하는 연시우의 결심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직감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보답하기 위해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이건 꼭 말해 두고 싶네요.”
“알겠소. 다만 빚은 반드시 갚겠소.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사실을 소저께서도 잊지 마시오.”
* * *
진무량은 가옥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생각이 복잡할 때 그가 자주 찾는 장소였다.
진무량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근래에 스스로가 변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자각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는 피가 튀는 전장이 아니면 그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바라는 것 따윈 없었다. 하물며 살고 싶다는 의지 따윈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독한 허무에 끝에 쥐게 된 것이 검이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 사투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허나 승리에 취할 수 있는 건 잠시일 뿐.
채울 수 없는 허무는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가슴속 깊숙이 남았다.
허나 요새는 짙게 밴 그 허무함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일까.’
정확히 어떤 걸 바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한 가지. 유서하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허나 억지로 부정하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원하는 건 결국 스스로가 납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너무도 낯선 것임은 분명했기에, 그동안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려고만 했다. 허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했으니, 앞으로는 조금 다른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당장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앞으로 펼쳐질 길은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그 길을 걷다보면 수많은 고난과 마주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
뭐, 그렇다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생각 따윈 없다.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콰앙!
진무량이 생각을 정리해 나갈 때쯤, 돌연 둔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의문의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연무장 쪽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누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진무량은 가볍게 혀를 차며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콰앙!
거대한 쌍철극이 일자로 떨어지면서 연무장의 바닥과 충돌했다.
그 쌍철극의 주인은 주백기. 보통 사람이라면 들어 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운 쌍철극을 그는 자유롭게 휘둘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연무장으로 향한 진무량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주백기는 진무량이 다가오자 황급히 휘두르던 쌍철극의 움직임을 멈췄다.
급히 예를 취하는 주백기를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집을 다 때려 부수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내가 더 빨리 찾아오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사실 주백기가 진무량을 부르기 위해서 소란을 피운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진무량을 찾아온 것이었다. 헌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자, 연무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 생각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가볍게 몸을 풀 생각이었던 움직임이 점차 격해졌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진무량은 더 나무라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임무로 바쁠 텐데,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냐?”
“…….”
주백기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갑작스런 행동에는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을 터. 진무량은 주백기의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백철우를 혼자서 쓰러뜨리지 못한 사실이 분한 것이냐?”
위지운이 이끄는 멸천대의 삼 조원들에게 전해 들었기에, 주백기와 백철우와의 일전에 대해서는 확실히 꿰고 있었다.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주백기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구중련을 찾는 일은 철저하게 진행 중이었으나,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비단 백철우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야만 복수를 이뤄 낼 수 있다. 구중련의 뒤를 밟아 맹사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를 이기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비록 부상당한 몸이었다고는 하나, 맹사는 연시우를 제압하고 빠져나갔을 정도의 실력자.
지금 상태로 그와 겨룬다면 승리를 확실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남은 방법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단순한 가르침만으로 네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
주백기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진정으로 실력이 향상되는 건 끊임없는 노력으로 얻은 깨달음과 노력이다.
단순한 가르침만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왜 힘든 고생을 하겠는가.
그 사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답답한 마음이 너무 크기에, 진무량을 찾아온 것이었다.
결국 뜻을 접고 주백기가 돌아서려 할 때, 진무량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만 길을 알려 줄 수는 있겠지.”
“……무슨 뜻입니까?”
“네가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을 펼쳐 보거라.”
주백기는 군말하지 않고 곧바로 쌍철극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진무량이 허튼 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이번 역시 생각한 바가 있을 터.
긴 호선을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쌍철극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양손에 들린 쌍철극은 개별적인 검로로 움직였다. 허나 그것은 변화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쌍철극은 때때로 한곳으로 모였으며, 금세 다시 흩어졌다.
후우우욱!
양손에 들린 쌍철극이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파공음이 울렸다.
언뜻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쌍철극은 무수하게 변해갔다.
진무량은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놓칠세라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한 채 주백기를 살폈다.
당장 내공을 쓰지 못하는 몸이지만, 무공을 파악하는 능력만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주백기는 혼신의 힘을 담은 초식을 펼친 뒤, 천천히 쌍철극을 거두어들였다.
주백기의 움직임이 멈춘 뒤에도 한참동안 심사숙고하던 진무량이 입을 열었다.
“역시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 초식은 지나치게 속도와 변화에 치중되어 있어.”
“…….”
진무량의 발언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여태껏 용력으로 쌍철극을 받아 낸 상대는 없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 줬던 상대들은 늘 민첩하게 움직이는 자들이었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빠른 움직임이 최선이었다.
이번에 펼친 초식 또한 변화를 통한 속도에 중심을 둔 초식이었다.
진무량은 냉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가장 큰 강점은 힘. 즉, 지금의 너는 가장 큰 장점을 전부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힘에만 치중한다면…….”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조언일 뿐이야. 그렇기에 지금까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선택은 오직 너의 몫이다.”
“…….”
“어떤 선택을 하든 네 자유야. 다만 내가 본 너는 천하제일의 용력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은 결코 틀리지 않으니 믿어도 돼.”
진무량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어설프게 남을 따라 하기보다는 네가 가장 자신 있는 길을 가 봐.”
진무량의 언변은 확신한 힘을 지녔다.
언뜻 보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내뱉는 것처럼 보이나,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일수록 그의 말을 신뢰하게 된다.
그의 탁월한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허풍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현실로 바꾸는 진무량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일까.
사실 무슨 이유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대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결심했으니까. 그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 또한 믿고 따르기로.
‘천하제일의 용력이라…….’
대주께서 그리 판단했다면 자신은 그걸 이뤄 내야만 하는 것이다.
솥뚜껑만 한 주백기의 양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