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흑막
2018.01.18.
모든 것을 시들게 하는 세월이라 하던가.
허나 늘 모든 것이 똑같지는 않다.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천년의 세월을 담은 교주전이 바로 그러했다.
마교의 시작과 함께한 그곳은 전혀 낡지 않았다. 조금도 해지지 않았으며 너절하지도 않았다.
세월의 흔적은 전부 고풍스러움으로 변했고,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위대함을 자아냈다.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마교에서도 최강으로 불리는 단 한 명의 무인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곳.
역대 최강의 무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교주전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마교의 현 교주 천군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교주전이 달리 보이는구나.”
천군위의 호위를 담당하는 여도강이 대답했다.
“수십 년을 머무르셨던 교주전이 달리 보이신다는 것입니까?”
“그래.”
사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 당연하듯 스쳐 갔던 것들이다.
유독 달리 보이는 이유는 관점이 변했기 때문이다.
최강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교주들은 모두 한 줌 흙으로 변했거늘, 교주전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죽은 뒤에도 이곳은 변함없이 한결같겠지.”
천군위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곁에 있던 여도강은 난처함을 드러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천군위는 나직이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진무량에겐 내 뜻을 전했느냐?”
“그렇습니다. 지금쯤 교주전으로 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 쿨럭! 쿨럭!”
평온하게 말을 잇던 천군위가 갑자기 기침을 쏟아냈다.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여도강은 즉시 천군위를 향해 다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만남은 취소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천군위는 익숙한 듯 각혈한 피를 닦아 내며 대답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거늘.”
태연한 천군위와 달리 여도강은 쉽게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마교의 혼란을 무력으로 평정한 천군위였다.
그야말로 현 마교를 지탱하는 기둥 같은 존재.
천군위의 위세만으로 수없이 많은 분란을 막아 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내외적으로 천군위의 병환을 알고 있음에도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시절 너무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인해 함부로 발톱을 드러내는 세력이 없을 뿐이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천군위의 병환이 깊어진다면 변심할 세력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여 당장은 천군위도 최대한 공식적인 자리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이번에는 왜…….’
천군위의 갑작스러운 진무량의 호출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따져 보면 천군위는 예전부터 진무량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은 맞다.
허나 자신의 눈에 비친 진무량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인물.
그렇기에 더욱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도강은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진무량을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너의 눈에 그리 보이느냐?”
“……그렇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천군위가 입을 열었다.
“놈을 보고 있으면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거든.”
절대자의 위치에 서면 수없이 많은 인간 군상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야말로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연상시킨 사람은 오직 진무량 뿐이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저 그렇게 느꼈을 뿐.
과거의 자신을 연상시킬 수 있는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특별했다.
처음에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허나 그 생각은 진무량과 검을 맞댄 순간 틀렸음을 직감했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마다 상대는 단순한 적이 아닌, 과거의 자신과 겨루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자신과 검을 겨루는 그 순간은, 평생토록 잊지 못한 각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더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갈지, 혹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것이지.
그렇다면 그에 따른 결과는 또 무엇일까?
그런 것들이 신경 쓰였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천군위가 넌지시 물었다.
“왜, 이해가 되지 않느냐?”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백철우를 비롯해 마교의 세력들이 진무량을 배신자로 몰아갔을 때, 그의 편에 섰던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천군위가 그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힘을 실어 준 것일 뿐. 열성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천군위가 말했다.
“굳이 나를 이해할 필요 없다. 너는 너의 길을 걸어가면 되느니라. 네 기량은 마교 내에 그 누구와 비견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천군위가 고개를 돌려 여도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대한 걱정이 있다면 딱 한 가지. 확고한 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호위무사로 살아서인지, 그런 면모는 확실히 부족해 보였다.
“인연을 만듦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거 너의 의지이다. 네게 충고해 주고 싶은 많은 이것뿐이구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교주전을 지키는 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진무량이 도착했습니다.”
* * *
거대한 공간에 교주전.
그곳에는 오직 거대한 다탁을 두고 마주한 진무량과 천군위만이 존재했다.
먼저 화두를 던진 건 진무량 쪽이었다.
“무슨 일로 부른 것이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려고 부른 게지.”
“…….”
진무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눈길로 천군위를 바라보았다.
천군위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내 노년에 얻은 취미가 너를 지켜보는 것이다.”
“꼭 다른 취미를 찾길 바라겠소.”
진무량은 자연스레 마주한 천군위를 살폈다.
진무량이 무인으로서 단 한 명 인정하는 상대. 그가 바로 천군위였다.
마지막으로 천군위와 검을 겨뤘을 때, 그의 위용은 가히 태산과 같았다.
천군위의 일격은 하나하나가 형언할 수 없을 무게를 지녔고, 현란한 움직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과거의 그 강맹했던 천군위의 기운이 지금은 확실히 옅어져 있었다.
천군위를 바라보며 진무량이 물었다.
“후계는 정하지 않을 생각이오?”
따로 자식이 없기도 했지만, 천군위는 따로 후계를 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천군위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마교는 가장 강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 내가 고른 이가 다음 교주로 승계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느니라.”
“그렇다면 다음 교주는…….”
“나를 꺾은 상대이겠지.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 마교를 통치하지 않겠느냐.”
천군위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왜, 교주의 자리에 관심 생긴 게냐?”
“권력에 관심 없소. 내게 간섭하려 든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천군위는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흘렸다.
‘무로서 정점을 원하지만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
진무량을 보며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는 이유는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천군위 또한 진무량에게 의문이 생겼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진무량을 감싸는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 있던 탓이다.
마치 바짝 날이 선 검처럼 투기를 뿜어 대던 진무량이다.
헌데 지금은 밖으로 내뿜던 투기는 사라졌고, 그만큼 두 눈에서 생기가 감돌았다.
이는 결코 작은 변화라 할 수 없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하게 되는 이유는…….
“여인이라도 생긴 게냐?”
“……그게 무슨 소리이오?”
“평소보다 대답이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착각이오.”
진무량과 천군위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묘한 신경전을 펼쳤다.
이내 진무량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가 봐도 되겠소?”
“아직 할 말이 남았느니라.”
“그게 무엇이오?”
“곧 신마회의가 열리니라. 거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느니라.”
신마회의.
마교의 나아갈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회의로서 참석하는 인원은 마교의 교주와 사대신마가 전부이다.
그 사실상 마교에서 가장 큰 결정권을 갖는 회의. 오 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회의이기 때문에 진무량 또한 한 번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진무량은 신마회의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근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딱히 그에 대해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진무량이 말했다.
“거긴 빠질 수 없지. 내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겠소.”
“그래, 알고 있었다면 됐다. 이만 가 보거라.”
진무량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천군위를 바라보았다.
“그게 용건이었던 것이오?”
“아니, 용건은 내 취미였다.”
진무량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그 취미는 다른 걸로 꼭 바꾸길 바라겠소.”
* * *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실.
지하에 위치한 그곳은 구중련의 은밀한 회동장소였다.
다만 그곳을 아는 자는 극소수. 구중련 내에서도 서열이 가장 높은 몇 명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긴 나선형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다가왔다.
묵직한 걸음 소리의 주인은 바로 적무혁이었다.
적무혁은 암실 내에 기척을 느끼고는 감탄 섞인 목소리를 냈다.
“호오. 다들 생각보다 빨리 왔구먼.”
“…….”
적무혁은 인기척을 통해 암실에 세 명의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적무혁은 익숙한 듯 어둠속을 걸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콜록, 콜록.”
그때 적무혁의 옆에서 의문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기침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며 적무혁이 말했다.
“자네 그 버릇은 아직도 못 고친 겐가?”
어둠 속에서 울리는 적무혁의 질문에 기침을 했던 사내의 대답이 이어졌다.
“재미가 들려서 말이지. 신경 쓰지 말게.”
“하여간 자네는 여전히 별나군.”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흠흠, 둘 다 시끄러워.”
얼핏 들어도 꼬장꼬장한 노인의 목소리.
“자자,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당면한 문제의 대한 토의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중재를 나선 말끝에서는 독특한 금속음이 울렸다. 그 사내가 찬 독특한 문양의 금팔찌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적무혁은 안력을 집중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모인 이들의 신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침하는 사내. 노인의 목소리. 금팔찌를 찬 사내.
그들은 모두 구중련 내에서 최고의 간부들로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금팔찌를 찬 사내가 먼저 안건을 꺼냈다.
“현재 가장 거슬리는 건 진무량의 존재이네. 놈이 본격적으로 마교를 들쑤시기 시작했어.”
“콜록. 콜록. 우리의 흔적 따윈 찾을 수 없겠지만, 괜히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지.”
기침하는 사내의 말을 이어 꼬장꼬장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놈은 영사문에서 처리해야 했어. 괜히 살려 두니까 일이 귀찮아진 게 아닌가.”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고로 자네가 책임지게. 조용히 처리하는 게 핵심이야. 대업을 앞두고 있다는 걸 명심하게.”
적무혁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구태여 지금 문제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껏 짜증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결정적으로 놈은 우리의 대업을 방해할 수 있을 만한 놈이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미리 처리를 해 둬야지.”
“쯧쯧,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서야.”
적무혁의 목소리에는 한층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진무량이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선의 여식과 떨어뜨려 놓기만 한다면 진무량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
적무혁이 말했다.
“진무량의 대한 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그러니까 구태여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게.”
금팔찌를 한 사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놈은 언제 처리할 생각인가?”
“구중련의 대업이 이뤄지는 날.”
“쿨럭 쿨럭. 재미있군. 놈을 제물로 쓰기라도 할 생각인가?”
기침하는 사내의 질문에 적무혁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해도 괜찮겠군. 어쨌든 내게 맡겨 두게.”
그때였다.
저벅 저벅.
암실을 울리는 인기척. 그리고 뒤이어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여기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다른 새로운 목소리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맞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적무혁을 비롯한 구중련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네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베일에 감춰졌던 구중련의 련주.
그가 바로 젊은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하던 회의를 이어 하지.”
구중련의 련주가 말을 이었다.
“진무량의 대한 처리는 확실히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지?”
평소 찾아볼 수 없었던 깍듯한 자세로 적무혁이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뒤이어 금팔찌를 한 사내가 얼른 적무혁의 말을 덧붙였다.
“진무량을 제외하면 다른 변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모두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구중련의 련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수백 년을 준비한 대업임을 잊지들 말게. 실패는 용납되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인과 기침하는 사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련주는 칙칙한 지하 암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까지 이런 컴컴한 데서 회의를 할 순 없지. 다음 회의는 귀곡신성의 교주전에서 하는 걸로 하지.”
“존명!”
네 사람을 한 번씩 둘러보던 련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짧게 말했다.
“그럼 각자 만전을 기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