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부름
2018.01.14.
맹사의 추격에 실패한 연시우가 돌아오자, 진무량은 멸천사성을 한자리로 모았다.
멸천대 모두 마교에 무사히 입성했으니, 앞으로 행보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네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무량의 시선은 가장 먼저 연시우에게서 멈췄다.
연시우는 겉으로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진무량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철왕부와의 분쟁 과정에서 가장 힘든 부분들을 도맡았다.
추연희를 납치하려던 백철우의 계획을 깨부순 것도 바로 연시우이다. 그 계획은 백철우가 가장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었을 터.
연시우가 추연희를 구해 내지 못했다면 철왕부와의 분쟁이 더욱 어려워졌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연시우는 부상당한 채 맹사와 일전을 벌였고, 도망치는 놈을 추격까지 해야 했다.
비록 맹사를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진무량은 그가 얼마나 필사적이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일련의 과정에서 부상당한 상태로 계속 무리하게 움직였으니, 당연히 연시우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닐 터.
유심히 연시우를 살피던 진무량이 입을 열었다.
“넌 일단 몸을 추스르는 게 우선이다. 내상을 입었다면 연희에게 보이고 당분간 치료에만 전념해.”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마교의 입성한 것은 시작일 뿐, 앞으로 처리해 나가야 할 일들이 훨씬 많을 터.
이럴 때 부상을 핑계로 빠진다는 건 연시우에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무량은 연시우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나직이 대답했다.
“당장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은 없다. 또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네가 지금 같은 상태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야.”
“그렇지만…….”
“지금 당장 네가 취해야 하는 것은 휴식이다.”
진무량은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가 멸천사성을 불러 모으면서 연시우를 빼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확실하게 명령을 내려 연시우가 휴식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확고한 눈빛으로 연시우를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을 덧붙였다.
“알았으면 이만 나가 봐.”
“……알겠습니다.”
망설이던 연시우는 대답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연시우가 자리를 떠나자, 따분함을 참지 못한 위지운이 나섰다.
“귀찮은 환자는 내보냈으니 이제 본론을 말해 주쇼.”
“넌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인데…….”
딴청을 피우는 위지운의 태도에 진무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부터 넌 백철우의 뜻에 동조했던 놈들을 모조리 알아봐. 우선 딴소리를 지껄이지 못할 만큼 확실하게 가담한 놈들부터 찾아내.”
“찾아낸 뒤에는…….”
“그 뒤는 네놈에게 맡기지. 뒤는 내가 책임져 줄 테니 맘껏 날뛰어 봐.”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던 위지운의 태도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위지운이 말했다.
“후후후.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요.”
“헛소리하지 말고, 몸이 근질거리면 먼저 일어나.”
“하여간 대주께선 내 속마음을 너무 잘 안다니까.”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대답을 마친 위지운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백기는 가볍게 혀를 찼다.
“……미친놈.”
반면에 등가휘는 진무량을 향해 걱정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위지운을 저리 둬도 괜찮겠습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겉으로 행동은 분명 막무가내처럼 보이지만, 위지운은 굉장히 감각이 뛰어나다.
분명 백철우와 아무 관련도 없는 놈들까지 무작정 들쑤시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위지운이 난동을 피운다면, 그 상대는 분명 백철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자들이리라.
백철우와 뜻을 함께한 놈들에 대한 처분은 위지운만큼 잘 처리해 줄 사람도 없을 터.
단륵을 비롯한 백철우와 뜻을 함께한 놈들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미친놈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확신에 가득한 진무량의 태도를 보고 등가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접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등가휘의 질문에 진무량은 잠깐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맡길 임무가 가장 힘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내 조금 낮은 목소리가 진무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찾아야 할 놈들이 있어. 단서는 그들이 구중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뿐이다.”
“더 알고 계신 것은 없으십니까?”
“당장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다만 결코 만만히 봐선 안 돼. 놈들은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놈들이니, 꼬리를 잡기 쉽지는 않을 거다.”
심각한 진무량의 반응에 등가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쉽진 않겠지만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놈들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잡아야 해.”
구중련을 몰살시켜 준다는 것은 유서하를 마교로 데려오면서 했던 약속이었다.
그리고 진무량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단순히 그녀를 마교로 데려오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등가휘에게 향해 있던 진무량의 시선이 주백기를 향해 옮겨 갔다.
곧 진무량은 주백기를 향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연시우와 겨룬 놈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연시우를 몰아붙인 상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하여 멸천대원들에게 그 당시 상황을 묻게 된 것이다.
연시우와 겨룬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데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놈이 사용한 무공을 듣는 순간, 그의 정체를 직감했으니까.
여태껏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 없는 추일풍의 원수.
놈의 무공과 인상착의를 헷갈린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꽈악.
주백기는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복수를 위해 맹사를 찾아 해맨 지도 어느새 수년이 흘렀다. 허나 그동안 그에 대한 아주 작은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때로는 이미 그가 죽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맹사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춘 것이다.
허나 이번에 그는 아주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연시우와 부상당한 멸천대원들의 목숨을 노리는 상대로서.
그동안 버젓이 살아 있었던 맹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주백기는 울화가 치밀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미세하게 신형이 떨리는 주백기를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그놈도 구중련과 관계가 있는 놈일 확률이 높다.”
진무량은 자신의 가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갑작스러운 맹사의 공격은 분명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왜 미리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 해답은 아주 간단했다.
철왕부와 결전을 벌이기 전, 이미 등가휘를 통해 마교 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한 상태였다.
마교 내에선 수상한 움직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부상당한 대원들과 연시우를 따로 남겨 두고 떠난 것이다.
허나 맹사는 버젓이 부상당한 멸천대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맹사는 멸천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던 것이다.
마교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멸천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력.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세력은 구중련을 빼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적무혁을 비롯한 구중련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감춰진 힘은 충분히 경험했다. 하여 진무량은 맹사와 구중련이 관련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너희 두 명이 구중련에 대해서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진무량의 말을 모두 듣고 나니 등가휘는 구중련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끌어올렸다.
두 사람을 향해 진무량이 말을 덧붙였다.
“마교의 정보망을 모두 이용해도 좋다. 협조하지 않는 놈들이 있으면 보고해. 그때는 내가 나서 줄 테니까.”
등가휘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내 등가휘와 주백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진무량에게 예를 취한 뒤, 각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홀로 남은 진무량은 고요함 속에서 잠시 동안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마교를 움직여 구중련의 세력들을 찾아내려 한다는 건 명백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당연히 구중련도 그에 따른 반응을 보일 터.
상대의 반응을 보고 나서 움직이면 언제나 뒤처지는 법이다.
이미 진무량의 머릿속에는 구중련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수천 가지의 가정을 떠올랐다.
또한 그에 따른 대비책도 하나씩 그려지고 있었다.
다만 고요함 속에서의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밖에서부터 멸천대원의 보고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진무량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보고였다.
“대주님, 유 소저께서 의식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 * *
유서하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흐릿한 사람의 형체였다.
점차 의식이 또렷해진 그녀는 상대가 추연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서하는 우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그녀를 추연희가 제지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하니 조금 더 누워 있으세요.”
흐트러진 이불을 정돈해 준 뒤, 추연희는 문틈으로 멸천대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유서하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진무량에게 알리라는 신호였다.
침상에 누운 유서하가 추연희를 향해 물었다.
“여기는 어디죠?”
“제가 운영하는 의방이에요. 몸이 불편하신 곳은 없나요?”
점차 제정신을 찾은 유서하는 스스로 몸 상태를 살폈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을 때 특별히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유서하는 잠시 정신을 집중한 채 몸의 내부를 살폈다.
그러자 혈액의 흐름이나 내부의 기가 순환하는 것까지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도 문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생각도 잠시.
‘뭐지?’
유서하는 단전 깊숙한 곳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했다.
그 기운에 대해 자세한 것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내상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기운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서하는 조금 더 이질적인 기운을 살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극양의 기운. 하단전에 단단히 자리 잡은 그 기운은 본래의 내공과 잘 융합되어 있었다.
그 기운의 정체는 바로 금정신단의 효과였다.
희대의 영약이라고 알려진 금정신단은 유서하의 내상을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극양의 기운까지 유서하의 단전에 쌓여 있었다.
유서하는 금정신단을 복용한 사실을 몰랐기에, 그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금정신단의 기운을 더욱 자세히 살피려 할 때, 추연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이상이 있으신가요?”
유서하는 우선 금정신단의 기운을 살피는 것을 미루고 추연희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요. 특별한 문제는 없어요.”
정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유서하는 금정신단의 기운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음을 직감했다.
유서하 또한 일류에 다다른 무인. 스스로의 몸 상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추연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무량이 소저를 정말 많이 걱정했어요.”
실제로 유서하가 의식을 잃은 동안 진무량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다만 유서하가 의식을 잃고 지낸 시간이 꽤 길었기에, 언제까지 그 곁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여 진무량은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유서하가 의식을 되찾으면 곧바로 자신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을 추연희에게 남겨 두었다.
유서하는 추연희를 만나기 전부터 계속해서 신경 쓰이던 부분이 있었다.
잠시 동안 고민하던 유서하는 곧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은인이에요. 갚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빚을 진 은인.”
추연희는 숨김없이 유서하에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유서하를 향해 물었다.
“그러면 유 소저께선 무량과 어떤 관계이시죠?”
“……동료예요.”
유서하의 대답에 추연희는 의문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게 전부인가요?”
“그게 무슨 뜻이죠?”
“특별한 의미는 아니에요. 다만 무량이 제게 그런 식으로 소개한 사람은 유 소저가 처음이라……. 특별한 사이인 줄 알았어요.”
“저를 어떻게 소개했나요?”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가 조금 곤란하네요. 나중에 직접 물어보세요.”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진무량이었다.
유서하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진무량은 한걸음에 의방으로 향했다.
의식을 되찾은 유서하를 확인한 진무량은 곧바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진무량의 물음에 추연희가 대답했다.
“제가 이미 확인했는데, 특별한 이상은 없었어요. 그럼 전 이만 나가 볼게요.”
추연희는 긴급한 상황에 대비해 항상 휴대하는 침과 몇 가지 약재를 챙긴 뒤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정말 아무 이상 없는 거 맞아?”
갑작스럽게 이마에 손을 갖다 댄 탓에 유서하는 뒷말을 약간 흐렸다.
“네. 이제 괜찮아요.”
늘 갑작스러운 진무량의 행동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닿는 순간마다 항상 심장이 떨렸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진무량은 유서하의 입에서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직도 한빙신장에 당한 유서하를 안아 들었을 때 느꼈던 그 싸늘한 체온이 잊히지 않았다.
오직 유서하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금정신단까지 사용했다.
내공을 되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될 정도의 영약이었으나, 돌이켜 생각해도 조금의 후회도 일지 않는다.
이렇게 무사한 유서하의 모습을 확인하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진무량은 유서하의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무량을 향해 유서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하시려고요?”
“간호.”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무량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유서하는 이불을 얼굴 쪽으로 끌어올렸다.
진무량은 거침없이 이불을 내려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너무 더우면 열 올라. 그냥 얌전히 있어.”
“……정말 불편한데요.”
“얌전히 있으면 되는데 뭐가 불편해?”
속마음을 삼키면서 유서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불편하다고요!’
팔짱을 낀 채 진무량이 유서하를 살필 때, 밖에서부터 멸천대원의 보고가 들려왔다.
“대주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됐어. 나중에 다시 보고해.”
잠시 머뭇거리던 멸천대원은 문밖에서 보고를 이어 갔다.
“교주님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진무량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교주전으로 찾아오라는 교주님의 명령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