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구명
2018.01.04.
진무량은 수십 명의 수하들과 함께 급히 말을 달려, 부상당한 멸천대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철왕부와의 격전을 승리로 마무리 지을 때쯤 그에게 전해진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대원들의 시신. 발걸음을 옮길수록 격전을 치른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내 진무량은 곧 대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멈칫.
순간적으로 진무량의 신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에 유서하의 쓰러진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멈칫거린 시간은 잠시일 뿐, 진무량은 한걸음에 쓰러진 유서하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안아들었다.
맞닿은 유서하의 몸에서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무량이 신중하게 유서하의 상태를 살피던 중, 주위에 있던 대원이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정체모를 괴인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놈은 현재 도주 중으로, 이 조장께서 급히 쫓는 중입니다.”
“…….”
진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급하게 말을 달려 이곳을 찾으면서 수없이 고민했다.
어떤 놈이 감히 멸천대를 공격한 것인지, 부상당한 대원들의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등등.
그 모든 것들은 이런 만행을 저지른 자를 철저하게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쓰러진 유서하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런 생각들은 모두 흐릿해졌다.
당장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한 가지.
유서하를 살려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진무량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상태로 유서하의 맥박을 살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원이 말을 덧붙였다.
“그 소저께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 소저께서 이 조장을 돕지 않았다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면목이 없었기에 대원은 뒷말을 흐렸다.
묵묵히 유서하의 상태를 살피던 진무량은 곧 그녀에게서 미세하게 뛰는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 숨이 끊어진 건 아니지만,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호흡은 금방에라도 끊어질 듯 불규칙했고,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맥박 또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
‘무엇보다 몸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가장 큰 문제이다.’
유서하의 몸은 마치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가는 중이었다.
이는 분명 내상의 여파가 분명했다. 빙공과 비슷한 계열의 무공에 당했을 때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당장 내상을 치유하거나 한기를 억제하는 것이 시급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빙공에 대한 깊은 조예 없이 함부로 기혈을 바로잡으려 하는 건, 그야말로 명을 단축시키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이 상태라면 유서하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시간은 일각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
“……!”
유서하의 내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중, 순간적으로 진무량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이내 진무량은 앞섶에서 천으로 둘러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그 하얀 천을 풀어내자, 영약 특유의 청량한 향이 물씬 풍겨 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구체 모양의 영약.
바로 금정신단이었다.
황룡표국의 표물을 노리는 신투에게서부터 금정신단을 빼앗은 뒤, 진무량은 늘 품속에 금정신단을 간직해 왔다.
그만큼 금정신단을 소중하게 다뤘던 것이었다.
실제로 금정신단을 복용한 뒤, 진무량은 잠시나마 마공을 운용한 적도 있었다.
앞으로 금제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영험한 영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무량은 촌각도 고민하지 않았다.
유서하를 구하기 위해 금정신단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었다.
‘허락 없이 내 곁을 떠나지 마.’
하지만 유서하는 이미 의식을 잃어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는 상태.
진무량은 자신의 입에 금정신단을 넣고는, 그대로 유서하와 입을 맞췄다.
진무량은 맞닿은 유서하의 부드러운 입술을 살짝 밀어 올렸다.
그렇게 입술을 맞댄 채 진무량은 금정신단을 천천히 유서하에게 흘려보냈다.
금정신단을 삼키는 것까지 확인한 뒤, 진무량은 곧바로 다시 유서하의 맥박을 살폈다.
금정신단의 약효는 곧바로 나타났다.
차디찬 유서하의 체온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애초에 금정신단은 내상을 치유하는 데 있어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는 전설적인 영약.
게다가 극양의 기운이 담긴 금정신단은 한빙신장의 당한 유서하에게 있어, 그야말로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영약이었다.
“쿨럭! 쿨럭!”
그 순간, 유서하가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검붉은 피가 섞여 나왔다.
그녀의 기침이 사그라지자 진무량이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신이 든 거야? 나를 알아볼 수 있겠어?”
유서하는 간신히 고개를 진무량 쪽으로 돌렸다.
“네……. 헌데 여긴 어떻게……?”
말을 하는 유서하의 모습을 보고서야 진무량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불안했던 감정과 걱정스러움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와락.
진무량은 단숨에 유서하를 끌어안았다.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녀가 부서져 버릴 것 같았기에.
품속에 유서하를 안은 채 진무량이 말했다.
“이 바보야. 상대가 강하면 도망치든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억지로 무리하니까 이렇게 다친 거잖아.”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이번에야말로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걱정만 끼친 것 같아서요…….”
“…….”
굳이 말로 다 표현하지 않는 유서하의 속마음을, 진무량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멸천대를 돕기 위해 나서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쓴 채 나선 이유는, 모두 자신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이 저렸다.
“으윽.”
유서하는 통증이 느껴지는 복부를 움켜쥐었다. 맹사의 주먹이 직접 닿았던 복부에는 아직까지 깊은 통증이 배어 있었다.
끌어안고 있던 유서하를 놓아주며 진무량이 말했다.
“나머지 일들은 내가 전부 처리할 테니, 편히 쉬어도 돼.”
고통 때문인지,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유서하가 대답했다.
“그, 그래도 될까요? 지금 너무 힘들어서요…….”
진무량은 나직이 고개를 아래로 한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유서하는 진무량의 품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진무량은 즉시 유서하의 맥박을 살폈으나, 당장 큰 문제는 없었다.
내기의 흐름 역시 금정신단을 복용하기 전과 달리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황량한 벌판. 당연히 환자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유서하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안정이었다.
진무량은 곁에 있는 대원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즉시 귀곡신성 내에 있는 의방으로 서하를 데려가라. 내상이 심각하니 이동 중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귀곡신성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근에 다른 곳으로…….”
귀곡신성은 수없이 많은 마교의 세력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백철우처럼 멸천대를 견제하는 자들이 섞여 있을 터.
그들이 또 어떤 해코지를 하려 시도할지 모르는 게 현실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진무량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때 마침 다른 멸천대원이 말을 달려 진무량을 찾아왔다.
그는 귀곡신성 내에 있는 등가휘의 의사를 전달하는 전령이었다.
달리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전령은 곧바로 진무량에게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일 조장께서 대주님께 전언을 남겼습니다.”
“무엇이냐?”
“곧 현운각에서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사전에 백철우와 뜻을 모았고, 대주님을 배신자로 몰아갈 생각이라 합니다.”
귀곡신성 중심부에 숨어든 등가휘는 마교 내의 사정을 파악하여 진무량에게 전했다.
그로 인해 진무량은 마교 내의 실정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등가휘는 멸천대를 상대하기 위한 철왕부의 움직임까지 속속들이 파악했다.
이토록 철왕부를 완벽하게 깨부술 수 있었던 숨은 공신이 바로 등가휘의 존재였던 것이다.
진무량이 말했다.
“마침 잘됐구나. 내 그곳에 직접 참석하겠다고 등가휘에게 전하라.”
“존명.”
진무량은 품에 안은 유서하를 곁에 있던 대원에게 조심스럽게 맡겼다.
그리고 정체 모를 상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에 따른 대책을 전했다.
“내 이곳으로 주백기를 보낼 테니, 그와 함께 귀곡신성으로 가거라. 추격중인 연시우는 따로 행동하게 하되, 이곳에 귀곡신성으로 모이라는 표식만 남겨 두어라.”
* * *
맹사는 사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 부상당한 멸천대원들이 있는 장소에서 멀어져 갔다.
연시우의 추격은 끈질겼으나, 부상당한 몸으로 맹사를 붙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맹사는 쉬지 않고 경공을 펼쳤다.
그가 경계하는 상대는 연시우가 아닌, 진무량이었다.
‘제길, 설마 당장 내 뒤를 쫓진 않겠지.’
유서하를 상대하다 보니 도주 시점이 많이 늦어졌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존재로 인해, 애초에 마련해 두었던 계획이 모두 엉망이 된 것이었다.
맹사는 당장이라도 진무량이 뒤를 쫓아올 것을 가장 우려했다.
맹사가 이토록 진무량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가 예전부터 진무량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한때 맹사는 신분을 숨기고 멸천대의 잠입한 적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비어 있는 추일풍의 등에 일장을 날려 숨지게 한 것 또한 맹사였다.
진무량과 함께한 세월이 꽤나 길었기에, 맹사는 누구보다 그의 존재를 경계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맹사의 두 발이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부상당한 멸천대원들이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족히 오백 장은 떨어진 거리.
허나 안력을 집중한 맹사에게 그 정도 거리는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맹사는 두 눈으로 분명히 진무량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드는 의문.
‘왜 나를 쫓지 않는 거지?’
진무량의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멸천대를 공격한 자신을 살려 둘 리가 없었다.
분명 거리가 벌어졌다고는 하나, 진무량이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거리 또한 아니었다.
그는 무공에 있어서만은 초월적인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그가 전속력으로 쫓아온다고 가정하면, 뒤를 잡힐 가능성도 분명 존재했다.
걸음을 멈춘 맹사는 진무량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었다.
몇 년 사이에 그 지독한 성격이 바뀌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고작 이 정도 거리가 떨어졌다고 해서?’
분명 그 가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었으나, 당장 추측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그런 의구심을 품게 되자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적무혁은 진무량과 유월천 사이에 비밀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진무량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맹사의 눈썹이 음흉하게 휘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수확을 건진 걸지도 모르겠군.’
* * *
진무량은 앞서 철왕부를 깨부순 멸천대와 합류하여 귀곡신성으로 말을 달렸다.
격전을 치른 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벼운 휴식도 취하지 않은 채 곧바로 진무량의 뒤를 따라 나섰다.
멸천대의 행색은 그야말로 귀신의 형상이나 다름없었다.
흉악한 나찰가면을 비롯해 멸천대를 상징하는 흑색 갑주에는 모두 피가 흥건히 묻어 있는 상태.
그 피의 주인은 앞서 격전을 벌였던 철왕부 무인들의 것이었다.
섬뜩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멸천대의 앞길을 막아서는 자는 누구도 없었다.
쉽사리 귀곡신성 중심부로 진입한 진무량은 곧바로 회의가 열리는 현운각으로 향했다.
현운각 내부로 진입하려던 때, 입구를 지키던 마교의 무인이 진무량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미리 회의에 참석하기로 작성된 명단에 없는 분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발끈한 위지운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다시 한번…….”
콩!
정수리를 얻어맞은 탓에 위지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그의 머리를 후려칠 수 있는 사내는 진무량밖에 없었다.
“이들은 명령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괜히 시비 걸지 마.”
현운각의 입구를 지키던 무인들이 시선을 회피했다.
진무량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 또한 사대신마로 명성이 드높은 진무량의 출입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허나 현운각에서 회의가 열릴 때, 출입이 허가된 자들 이외에 인물을 막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자신들의 의지로 진무량만 예외로 둘 수는 없는 노릇.
경계를 서던 마교의 무인이 말했다.
“곧 회의가 끝날 것입니다. 전하실 뜻이 있다면 나중에 따로…….”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여기 모인 놈들에게 반드시 해 둬야 할 말이 있으니까.”
진무량이 고개를 돌려 위지운을 향해 말했다.
“챙겨 온 걸 가져와.”
정수리를 얻어맞은 위지운은 혼잣말로 툴툴대며 뒤에서 대기하던 멸천대원을 향해 다가갔다.
“쳇, 이럴 때 쓸 거였으면 미리 말해주면 좀 좋아?”
위지운이 가볍게 눈짓하자, 멸천대원은 곧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그러고는 챙겨온 거대한 반월 모양의 도를 위지운에게 건넸다.
육 척이 넘는 거대한 도. 생전에 백철우가 주로 사용했던 그 도는 마교의 무인이라면 쉽사리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거력도를 확인한 마교의 무인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이것은…….”
무뚝뚝한 어조로 진무량이 말했다.
“오늘 회의에 참석하기로 한 명단에 백철우는 있을 터. 나는 놈의 대리로 찾아온 것이다.”
“…….”
“놈은 이미 죽었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없지. 그 정도면 내게 길을 열어 줄 명분은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마.”
어쩔 줄 몰라 망설이고 있는 마교의 무인을 향해 위지운이 말을 덧붙였다.
“뭐해? 어서 비키지 않고.”
현운각 내부로 향하는 긴 복도.
그 길을 걸어가는 진무량의 귀에 열띤 토론 소리가 들려왔다.
뭐 토론의 내용이라고 해 봤자, 모두 자신을 모함하는 것들뿐이었지만.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진무량은 금세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도착했다.
끼이이이익!
마침내 현운각의 두꺼운 철문이 시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