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저력 (2)
2017.12.21.
귀곡신성의 중심부는 삼엄한 경계를 통해 오직 마교의 무인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특별한 공간이었다.
멸천대의 일조장 등가휘가 조사를 맡은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멸천대의 연공실에 자리 잡은 등가휘는 사방으로 멸천대원들을 풀어놓았다. 마교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서부터 받은 전서를 살피던 등가휘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흐음, 확실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등가휘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자는 승천마도 백철우였다.
진무량이 마교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가장 격분한 이가 바로 백철우였다. 또한 그가 사대신마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마교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하여 등가휘는 백철우를 중심으로 경계를 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백철우에게서 수상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은밀히 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장소는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철왕부의 내부.
그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나, 회의에 참석한 몇몇 사람들의 신원을 알아낼 수는 있었다.
독고혈랑 마철과 흑사령 단륵. 그들은 모두 마교에서 한 세력을 일군 수장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 평소 멸천대와 마찰이 잦았던 자들.
‘우선 이 사실들을 대주께 알려야 한다.’
등가휘는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들을 서신에 옮겨 적었다.
아직 백철우의 정확한 의도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정황만 놓고 보더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취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진무량에게 전할 서찰을 작성해 나가는데, 급하게 멸천대원 한 명이 등가휘를 찾아왔다.
“긴급한 보고입니다. 이 조장께서 보낸 서찰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다급해 보이는 멸천대원의 보고에 등가휘가 물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더냐?”
“철왕부 놈들이 추 소저를 납치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다행히 이 조장께서 구출하셨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도주 중이시랍니다.”
“이런!”
등가휘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백철우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처 철왕부의 움직임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추연희를 납치하는 건 평소의 백철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백철우는 머리를 쓰기보다는 투박한 무인의 전형. 그런 그가 이토록 비열한 수를 쓰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추연희를 납치하는 계획을 세운 자는 백철우가 아닌, 마교에 숨어든 구중련의 첩자 맹사였다.
이 사실을 예상치 못한 등가휘는 결국 백철우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등가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은 정확한 상황.
“연시우의 위치는 파악했느냐?”
“이 조장께서는 지금 귀곡신성을 빠져나가셨습니다. 보내온 서찰에 의하면 대주와 합류하기 위해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정확한 판단이구나.”
등가휘는 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연시우가 귀곡신성을 벗어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장 마교의 영역 내에 백철우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혔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연시우는 이미 마교에서 추방당한 몸. 그런 그가 귀곡신성 내에 숨었다면 분명 더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멸천대원을 향해 등가휘가 물었다.
“연시우가 보낸 서찰에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내용은 없었느냐?”
“그렇습니다.”
등가휘는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시우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면, 구태여 그를 도울 필요는 없다.’
오랜 시간 숱한 전장을 함께 겪어온 멸천사성은 서로에 대해 확실한 신뢰가 있었다.
시급한 상황이었다면 연락을 전하는 서찰에 반드시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즉, 연시우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뜻.
등가휘의 판단은 재빨랐다.
“지금 즉시 흩어진 멸천대원들을 모이게 하라.”
“이 조장의 구출은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 우리는 이제부터 백철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할 것이다.”
분명 백철우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랐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예측불허의 행동을 할지 모른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뿐이었다. 애초부터 귀곡신성 중심부로 향한 멸천대원들은 소수였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 왔다.
또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백철우는 오직 연시우를 쫓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터.
‘지금 같은 때 귀곡신성 내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호재이다.’
은밀히 움직인다면 충분히 백철우의 눈을 피해 그를 감시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교 내의 정황까지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등가휘는 방금까지 쓰던 서찰을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서찰의 내용은 더 자세해졌다. 추연희를 데리고 피신한 연시우의 상황과 예상치 못한 백철우의 행동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일필휘지로 서찰을 작성한 등가휘는 멸천대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서찰을 대주께 전하라. 아주 급한 일이다.”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 * *
고요한 침묵만이 내려앉은 야밤의 산길.
귀곡신성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거리에는 평소와 달리 쉴 새 없이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철왕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경공을 펼치는 멸천대의 인기척이었다.
선두에서 추연희를 등에 업은 채 달리던 연시우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
멸천대원들은 멀쩡한 행색이 아니었다. 모두 조금씩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심한 중상을 입은 수하들도 꽤 보였다.
그만큼 철왕부의 추격은 매서웠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큰 이점은 인원이었다.
수백 명의 철왕부원들을 뚫고 귀곡신성을 빠져나오는 것은 제아무리 멸천대라고 해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나마 희생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철왕부를 통솔해야 할 학륜의 부재 덕이었다.
정확한 지휘가 없으면 움직임이 굼뜰 수밖에 없다.
이를 간파한 연시우가 위험을 감수하고 학륜을 미리 처치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철왕부원들을 따돌리긴 했으나, 당면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으윽. 읍.”
추연희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 게다가 선천적으로 약한 몸이기도 했다.
비록 업혀 있다고는 하나 연시우가 경공을 펼칠 때마다 전해지는 충격은 추연희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틀 동안 쉬지도 못하고 철왕부의 추격을 피해야 했다. 추연희의 체력으로는 분명 견디기 힘들었을 터.
추연희의 한계를 직감한 연시우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걸음을 멈추며 같이 도주 중이던 호현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작전을 변경한다. 너는 대원들을 모두 이끌고 철왕부의 시선을 끌어라. 그 상태로 곧바로 대주에게 가서 우리의 위치를 알려야 한다.”
“맡겨 주십시오.”
이어서 연시우는 추연희의 경호를 맡던 갈평을 바라보았다.
“너는 따로 수하들을 이끌고 이 주변을 경계하도록. 혹시 근처로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전음을 통해 내게 알려다오.”
“알겠습니다.”
연시우는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그 즉시 호현과 갈평은 명령에 따르기 위해 움직였다.
연시우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나마 쉬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수풀이 우거져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고 그나마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한 곳.
연시우가 그곳을 향해 움직일 때, 등 뒤에서 추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아직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 때문에 쉬어갈 필요 없어요.”
“추 소저 때문이 아니오. 아까부터 부상당한 몸이 욱신거려서 내가 움직일 수가 없소.”
연시우는 추연희를 내려놓은 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추연희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연시우는 힘들어하는 추연희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멸천대에 들어와서 처음 추연희를 만났을 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 붙잡으면 바스러질 것 같이 연약한 체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의기소침하지 않고 언제나 당차게 행동했다.
허나 연시우는 추연희의 그런 모습들이 억지로 자신의 약한 면을 감추려는 의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마다 늘 생각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고.
유월천의 비열한 계략에 빠졌을 때도 그랬다.
물론 진무량의 명령을 따른 것도 사실이다. 허나 결국 추연희를 구하기 위해 멸천대를 움직인 것은 자신이었다.
오직 진무량의 명령만 따른 것이었다면,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조금 덜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추연희를 구한 이유에는 분명 개인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정말 죽도록 괴로워했다.
다행히 다시 대주를 만나게 되었으나, 그때 했던 다짐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번 다시 추연희를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
허나 추연희를 마주하게 되니 굳은 다짐은 옅어져만 갔다. 머릿속에서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마주했을 때마다 느꼈던 생각만이 가득했다.
휘이이이잉.
유독 차게 느껴지는 바람.
마음 같아선 따뜻하게 모닥불이라도 피워주고 싶었으나, 당장 추격당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연시우는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서 추연희에게 건넸다.
“저는 괜찮아요.”
정중하게 거절하는 추연희를 향해 연시우가 대답했다.
“입고 있으시오. 내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어차피 벗으려던 차였소.”
연시우는 직접 추연희의 어깨에 자신의 웃옷을 걸쳐 주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며 그가 말했다.
“힘들더라도 지금은 일단 눈 좀 붙이시오.”
“연 소협께서는…….”
“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으니 괜찮소.”
“아까는 부상당한 몸이 욱신거려서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뒤늦게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난 연시우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늘 냉정한 분위기에 연시우가 이렇듯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는 것을 참으며 추연희가 말했다.
“여전히 거짓말을 잘 못하시네요.”
“……미안하오.”
추연희는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미소 지었다.
가볍게 던진 농담에 보이는 연시우의 태도는 너무 진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시우는 민망한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흐흠, 어쨌든 지금은 푹 쉬어 두시오. 내일부터는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오.”
귀곡신성을 빠져나오면서 등가휘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세히 알렸다. 등가휘라면 어떻게든 진무량에게 연락을 취했을 터.
백철우의 만행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 진무량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철왕부와 멸천대의 일전은 이제 피할 수 없다.
* * *
후우욱!
양손에 쥔 주백기의 창이 움직이자 공포에 질린 듯 주변 공기가 요동쳤다.
먼저 귀곡신성으로 향한 멸천대에게서는 아직 이렇다 할 연락이 오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기에 주백기는 그 시간을 자신의 무공을 정진하는 데 사용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의를 완전히 벗은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을 여실이 드러낸 채 주백기는 묵묵히 수련에 몰두했다
그는 보통 사람의 덩치에 두 배에 달하는 거한. 그만큼 주백기가 사용하는 창 또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어 올릴 수도 없을 정도에 무게의 창을, 주백기는 한 손에 하나씩 쥐고 휘둘렀다.
두 자루가 한 쌍인 그 창의 이름은 쌍철극. 오랜 시간 주백기가 애용한 독문병기였다.
“……흐읍!”
짧은 기합과 함께 주백기가 쌍철극을 휘둘렀다. 그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거대한 크기의 고목.
콰지지직!
주백기의 쌍철극은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을 정도에 고목을 단숨에 동강내버렸다.
“아따 그것 참 시끄럽네.”
근처에 있던 위지운이 주백기를 향해 투덜거렸다.
“뭐가 이렇게 요란해? 이참에 나무꾼이라도 될 생각인 거냐?”
주백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반문했다.
“……넌 뭐하는 거냐?”
“수련 중이시다. 난 무식하게 움직이는 네놈과 달리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그럼 저리 꺼져.”
뻔뻔한 주백기의 대답. 위지운은 화를 삭이기 위해 양쪽 눈을 질끈 감았다.
“이봐, 여긴 내가 발견한 장소라고. 먼저 온 것도 나야.”
“……알게 뭐냐.”
분노가 한계를 넘어서면 웃음이 난다고 하던가. 지금 위지운이 딱 그랬다.
“하, 하하하.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에게 쓸데없이 내가 대꾸를 해 줬네.”
“……덤빌 테면 덤벼.”
“오냐.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당장에라도 치고받을 듯한 두 사람의 기세. 허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서부터 진무량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곧 두 사람 앞에 진무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주를 뵙습니다.”
“여긴 무슨 일이오?”
주백기와 위지운은 각자의 방식으로 진무량에게 인사를 건넸다.
진무량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두 놈 모두 여길 떠날 준비를 해라. 지금 즉시 귀곡신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평소와 달리 미묘하게 격앙된 진무량의 목소리. 이를 가장 먼저 알아챈 위지운이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
진무량은 손에 쥐고 있는 구겨진 서찰을 위지운에게 건네며 말했다.
“손봐줘야 할 놈이 생겼다.”
위지운과 주백기는 진무량에게 받은 서찰을 재빨리 훑었다. 그 서찰은 등가휘가 작성한 것으로, 귀곡신성 내의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대충 서찰을 훑어본 위지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돼지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보군.”
위지운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분노를 느끼는 건 주백기도 마찬가지였다.
“……즉시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진무량은 백철우를 떠올리며 아주 짧게 조소를 흘렸다. 잠시 드러났던 그의 비웃음 속에는 짙은 살의가 배어 있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나에 대해 잊어버렸다면, 다시 기억나게 해줘야겠지.”
귀곡신성이 있는 방면을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