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저력 (1)
2017.12.17.
환자를 돌보던 추연희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휴우.”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갖가지 약재 향이 가득하던 의방 내부에서 나와 찬바람을 쐬니, 조금이나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추연희의 곁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멸천대 소속으로 추연희의 호위를 맡은 갈평(葛坪)이었다.
“진찰을 모두 끝내신 겁니까?”
“네. 방금 끝냈어요.”
갈평은 대답을 마친 추연희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점점 의방을 찾는 환자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귀곡신성 내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데다가 규모조차 아주 작은데도 이렇게나 많은 환자들이 찾는 이유는 모두 똑같았다.
추연희의 특출한 의술.
대개 중병에 걸린 환자들은 유명한 의원들을 찾는다. 허나 그런 의원들은 진료비가 엄청나게 비쌌다. 결국 진료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들은 속절없이 떠돌기 마련.
그러다가 우연히 찾게 된 곳이 바로 추연희의 의방이었다.
대다수의 의원들이 가망 없다고 진찰 내린 질병이라 할지라도, 추연희의 손을 거치면 거짓말처럼 나았다.
그런 결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그간 쌓아올린 방대한 의학지식도 있었겠으나, 추연희 특유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도 한몫했다.
그녀는 항상 진심을 다해 환자들을 한 명 한 명 보살폈다. 때로는 사나흘씩 밤을 새우면서까지 환자들의 곁을 지킨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늘 환자들의 특이한 질병을 끝없이 연구했다. 그녀의 그런 열의야말로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큰 이유였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그 날카로움을 감추지 못한다고 했던가. 결국 입소문이 퍼지면서 추연희의 의방을 찾는 환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갔다.
갈평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바쁘신 건 알지만, 그래도 항상 몸을 챙기셔야 합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숱한 환자들의 중병을 치유한 추연희였으나, 정작 그녀 자신의 몸 상태는 전혀 차도가 없었다.
그녀로서도 자신이 타고난 체질 태음맥(太陰脈)만은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태음맥의 체질을 타고나면 서른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떠도는 사실이었다.
추연희는 조심스럽게 갈평을 향해 물었다.
“혹시 무량에 관한 소식은 없었나요?”
“마교의 정식으로 귀환을 알렸다고 합니다. 아마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멸천대를 통해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퍼졌을 때 누구보다 슬퍼했던 이가 바로 추연희였다.
그때의 슬픔이 너무 커서였을까.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전부터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면 가장 앞서는 감정은 언제나 걱정이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못 본 사이에 몸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이 가장 앞섰다.
척.
그때 갑자기 갈평이 추연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는 담장을 향해 날카로운 창날을 겨누면서 추연희에게 주의를 줬다.
“제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갈평은 담장 밖에서부터 느껴지는 수상한 인기척을 정확히 감지했다.
비단 갈평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추연희의 호위를 맡은 열댓 명의 멸천대원들 또한 추연희를 보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누구냐!”
우렁찬 갈평의 외침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수십 명의 무인이 담장을 넘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들은 백철우의 직속 수하인 철왕부의 무인들이었다.
진무량을 붙잡기 위해 백철우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추연희를 납치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철왕부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를 선별했을 터.
당연히 백여 명에 가까운 철왕부원들 모두 특별히 엄선된 실력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학륜은 철왕부 내에서도 적수가 없다고 알려졌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방어 대형을 만든 멸천대원들을 바라보며 학륜이 말했다.
“호오. 우리의 기척을 알아차리다니, 제법이구나.”
이곳에 도착하기 전, 추연희를 호위하는 멸천대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해두었다. 조사에 따르면 딱히 경계해야 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자신들과 달리 이곳에 있는 멸천대원들은 엄선한 정예들이 아니었다. 진무량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 밑에 있는 멸천사성조차 없다면, 엄선된 철왕부원들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을 내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움직이는 철왕부의 움직임을 파악한 것은 칭찬해줄 만했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테지만.’
학륜은 스윽 왼손을 들어올렸다.
공격을 준비하라는 뜻. 이를 알아챈 철왕부원들은 각기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스릉!
여기저기서 들리는 검이 뽑히는 소리.
추연희의 호위를 맡은 갈평은 긴장된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미 사방이 포위된 상태. 단순히 철왕부와 인원만 보더라도 열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추연희를 지키는 것.
갈평은 주변 멸천대원들과 짧게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추연희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ㅡ저를 따라오십시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갈평의 전음을 들은 추연희는 상대방이 알아챌 수 없도록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평은 곧장 추연희와 함께 의방의 뒷문 쪽으로 달렸다.
멸천대원들은 각자 흩어져서 갈평의 뒤를 쫓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륜은 가소로운 조소를 지었다.
“끝까지 발악할 셈이구나.”
딱히 조급해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뒷문 쪽도 매복하고 있는 철왕부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도망친 놈들을 잡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
학륜은 여유롭게 자신을 따르는 철왕부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혹시 모르니 포위는 풀지 말고 적당히 상대해주어라. 나는 도망친 놈의 뒤를 쫓겠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철왕부원들은 서너 명씩 조를 짜서 공격했다.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멸천대원들 또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챙!
검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멸천대와 철왕부의 격렬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 * *
학륜은 어렵지 않게 추연희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멸천대원들은 서너 명씩 달려드는 철왕부원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벅찼기에,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학륜까지 막아낼 여력은 없었다.
추연희를 호위하는 갈평을 바라보며 학륜은 여유롭게 말을 걸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진퇴양난의 빠진 갈평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딱히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학륜은 천천히 추연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지. 이제 발악은 그만하고 나를 따라와라.”
“…….”
추연희는 아무 대답 없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집은 것은 은밀히 숨겨둔 은장도였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는 없어.’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을 똑바로 직시했다.
정확한 상황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상대가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진무량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만한 무인들이 자신을 노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미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삼 년 전 진무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그때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딱히 겁이 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때의 고통을 다시 느끼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추연희는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은장도를 찔러갔다.
탁.
허나 추연희가 쥔 은장도는 심장에 닿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지 않도록 꽉 움켜쥔 커다란 손 때문이었다.
추연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을 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나찰의 가면을 쓴 사내였는데, 가면 밖으로도 냉기가 풀풀 흘렀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일까. 굳이 가면 속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도 충분히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흉악한 나찰 가면 속에서 연시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마시오.”
추연희의 손목을 움켜쥔 연시우의 손은 걱정스러움을 나타내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누구도 추 소저가 죽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연시우는 꽉 움켜쥐고 있던 추연희의 손목을 놓아주고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나타난 연시우는 주변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바로 옆에서 추연희를 지키고 있던 갈평은 물론, 철왕부원들과 함께 있던 학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당황한 눈초리로 연시우를 살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미세한 인기척을 느끼긴 했으나, 그에 따른 대처를 생각하기도 전에 연시우는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나 철왕부원들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의방 주변은 완전히 철왕부원들이 포위한 상태. 이렇게 버젓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면 밖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을 모두 처치했다는 뜻이 된다.
그나마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학륜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연시우를 향해 말했다.
“어쨌든 그 여인을 살려줘서 고맙군. 그녀를 산 채로 데려와야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연시우는 냉소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철우의 명령이냐? 돼지 같은 놈이 안 본 사이에 많이 비겁해졌구나.”
“…….”
학륜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적잖이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추연희를 납치하는 건 철왕부 내에서도 철저한 비밀이었다. 혹여나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이곳을 찾아오기 전에 철왕부를 상징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 상태였다.
헌데 어떻게 정확히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단 말인가.
연시우는 한눈에 학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리 고민할 필요 없어. 어차피 네놈들은 모두 여기서 죽게 될 테니까.”
학륜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어쨌든 상대는 한 명. 그에 비해 자신의 곁에는 수십 명의 철왕부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 의방을 중심으로 깔린 철왕부원들 까지 합치면 더욱 명확하게 전력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스스로 처한 상황도 모르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구나.”
학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뒤를 따르던 철왕부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나찰 가면 속에 연시우의 표정을 확인할 길은 없었으나, 그에게서 동요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추 소저를 지켜라. 여기는 내가 맡겠다.”
갈평에게 짧게 전언을 남긴 뒤 연시우는 앞으로 나섰다.
자연스레 좁혀지게 되는 철왕부원들과 연시우의 거리.
그로 인해 철왕부원들은 연시우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즉, 사방이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허나 그는 연시우가 바라는 바였다. 자신에게만 공격이 집중돼야 추연희가 공격받지 않을 테니까.
학륜은 그런 건방진 연시우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허나 일단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철왕부원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ㅡ놈을 공격하되, 섣불리 덤벼들지 말고 우선 실력을 파악하라.
철왕부원들은 전음에 즉각 반응했다. 그들은 충분한 경계를 취한 채 일제히 연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격. 연시우는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기본적으로 검을 회피하기 위한 몸놀림. 연시우는 유연하게 쇄도하는 검로 사이를 오갔다.
허나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을 모두 피해낼 수는 없었다.
챙! 챙! 챙!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검을 막아낸 것은 연시우의 창이었다. 그의 창은 거칠게 날아드는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교묘하게 흘려 넘겼다.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는 연시우의 모습을 바라보던 학륜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생각보다 별것도 아닌 놈이었잖아.’
분명 연시우의 방어 기술은 훌륭했다. 실제로 선별된 철왕부원 수십 명이 덤벼들어도 제대로 된 상처조차 내지 못했으니까.
허나 어디까지나 그뿐. 연시우는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했다.
결국 싸움은 상대의 목숨을 먼저 끊어놓는 자가 승자인 법. 방어일변도인 상대만큼 만만한 적은 없다.
스릉.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학륜은 유려한 검신이 번뜩이는 검을 뽑아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대의 등장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그렇기에 연시우를 공격하는 철왕부원에게도 은밀히 상대를 살피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허나 예상과 달리 상대는 전혀 특출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았으니,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백철우에게 받은 명령을 이뤄야 했기 때문이다.
ㅡ이제부터 더 이상 경계할 필요 없다. 전원 단숨에 놈의 목을 취한다.
연시우를 공격하던 철왕부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음을 통해 들은 학륜의 명령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공격하던 철왕부원들의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미리 훈련받았던 움직임. 상대를 포위하고 동시에 일격을 날릴 준비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공격신호는 학륜이 직접 내렸다.
“지금이다!”
신호를 내림과 동시에 학륜은 스스로 연시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철왕부 전원은 각자 연시우를 향해 필살의 일격을 날렸다.
서걱!
이번 공격만은 연시우조차 모두 받아내지 못했다.
검이 몸에 닿기 직전에 간신히 치명상을 입을 만한 공격들을 쳐냈다. 허나 전신에 검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학륜은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을 때, 검에서부터 전해지는 느낌을 확실하게 느꼈다.
그는 연시우의 숨통을 끊어놓을 작정으로 두 번째 일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 창을 쥐고 있지 않은 연시우의 왼손이 움직였다.
연시우의 왼손은 학륜의 어깨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잡았다.”
콰과과과광!
그 순간 연시우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폭발. 철왕부원들은 그 폭발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각기 뒤로 날아갔다.
튕겨나간 그들은 각자 태세를 가다듬고 연시우를 살폈다.
어느새 연시우의 왼손은 어깨에서 손을 옮겨, 학륜의 머리통을 단단하게 움켜쥔 상태였다.
“아니……!”
“이런!”
철왕부원들은 마음은 다급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시우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학륜을 죽일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의아한 점은 학륜의 반응이었다.
최소한의 발악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연시우의 손에 붙들려있었다.
“크으윽!”
겉보기와 달리 학륜은 연시우에게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몸은 단단하게 결박된 마냥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세하게 버둥거리는 학륜을 바라보며 연시우가 말했다.
“흡마공을 사용하는 내게 이렇게 간단히 거리를 내주면 쓰나.”
머리채가 붙잡힌 학륜은 와락 표정을 구겼다.
“뭐, 뭐라!”
흡마공.
신체를 접촉함으로서 상대의 내기를 빨아들이는 지독한 마공.
연시우가 철왕부의 정체를 알고 있던 이유도 바로 흡마공 덕분이었다.
근처를 지키고 있던 철왕부원들의 내력을 빨아들이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다만 그 흡마공은 멸천대의 무공이 아니었다.
특이한 체질만이 익힐 수 있다는 흡마공은 마교 내에서도 오직 영월단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그제야 학륜은 자신과 상대하는 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한때 마교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영월단의 단주직을 버리고 멸천대로 들어간 사내.
“네놈은 연시우……!”
“그래, 네놈이 접근하는 걸 기다리느라 따분해 죽는 줄 알았다.”
흡마공은 신체를 접촉해야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기에, 우선 상대방과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여 연시우는 일부러 흡마공을 사용하지 않은 채 학륜을 유인했다.
먼저 흡마공을 사용했다면 학륜이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수많은 철왕부원들에게 숨은 그를 붙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연시우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학륜을 유인했다. 비록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철왕부를 이끄는 핵심인물인 학륜을 붙잡았기에.
“감히 멸천대를 얕잡아본 순간 정해진 것이다.”
연시우는 특유의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놈의 패배가.”
연시우는 학륜의 머리를 쥐고 있는 왼손을 통해 단번에 그의 내력을 빨아들였다.
스오오오오!
괴이한 소리와 함께 학륜의 내력이 연시우에게 빨려 들어갔다. 학륜은 온몸에 뼈가 잘게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에 몸을 버둥거렸으나, 굳게 쥔 연시우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시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왼손의 힘을 풀었다.
털썩.
바닥으로 떨어진 학륜은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내력이 모조리 빨려나간 그는 마치 오래된 시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눈앞에서 학륜의 죽음을 목격한 철왕부원들은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그 기세가 변했다.
“이 자식이 감히……!”
분명 연시우도 심한 부상을 입은 몸. 단번에 달려든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허나 그 또한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철왕부원의 앞을 가로막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방으로 오는 길에 헤어졌던 연시우의 수하들이었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던 멸천대원들은 연시우가 흡마공을 사용할 때 내뿜어지는 특유의 기운과 독특한 소리를 느꼈다.
하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연시우의 곁에 모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또한 연시우가 예상했던 바였다.
호현은 가장 먼저 부상을 당한 연시우에게 다가갔다.
“…….”
연시우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호현에게 말했다.
“뭘 또 그리 걱정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이 정도로 안 죽으니까.”
“걱정 안 했습니다.”
“속이 뻔히 보이는데 무슨……. 내가 걱정된다면 퇴로는 네가 맡아.”
호현은 주변에 있는 철왕부원들을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듯 성난 기세를 내보였으나, 딱히 움츠러들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분노가 그들보다 더 컸다.
연시우를 이렇게 다치게 한 놈들을 당장에라도 쓸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연시우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주변에 깔린 철왕부원들의 숫자는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우선 추연희를 지켜야 했다.
최우선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철왕부라 하더라도 추격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휘하는 자가 없으면 숫자가 많은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기에.
연시우는 침착한 목소리로 호현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그럼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