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흉계
2017.12.14.
맹사의 지시대로 백철우는 마교 내에서 진무량을 견제하는 세력의 수장들을 한자리로 불러 모았다.
작은 창조차 나지 않은 어두운 실내. 백철우가 은밀히 마련한 비밀장소에 마교의 고수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된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이 모두 착석하자, 백철우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 줘서 고맙소.”
“승천마도 백철우 대협의 부름이라면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 헌데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무엇이오?”
서글서글한 목소리. 백철우의 인사에 대답한 이는 강호에서 독고혈랑(獨孤血狼)이라 불리는 마철이었다.
마철을 비롯해 한자리에 모인 스무 명의 시선이 일제히 백철우를 향했다.
이런 은밀한 장소로 불렀을 때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렇다고 딱히 사전에 언질 받은 것도 없었기에 모두 백철우의 용건을 궁금해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진무량이 마교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오.”
백철우는 본격적으로 본론을 꺼내기 전, 상대의 반응을 살필 생각이었다.
“크흠.”
“흠흠.”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꺼림칙한 헛기침소리.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백철우는 예상했던 반응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일부러 좌중을 선동하기 위해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놈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소. 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이렇게 갑작스레 돌아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던 마교의 고수들은 백철우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쯧, 언제나 제멋대로인 놈이었으니…….”
“놈의 시건방진 태도를 다시 볼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소.”
한마디씩 거들자 자연스레 웅성거리는 장내. 그 속에는 거친 욕도 섞여 있었다.
거칠어지는 반응을 살피던 백철우는 그제야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꼈다.
“귀혈악인, 그자는 마교의 골칫거리에 불과하오. 그러니 더 속을 썩이기 전에 제거해야 하지 않겠소?”
시끄럽던 장내는 순식간에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마교의 고수들이 조용해진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 또한 마음으로는 백철우의 발언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허나 진무량과 결전을 벌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 누구도 사대신마라 불리는 진무량과의 정면 승부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철은 지나치게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백철우를 달랬다.
“너무 감정이 격해지신 것 같소. 일단 조금 진정하시고…….”
단칼에 마철의 말을 자르면서 백철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은 변하지 않소. 그대들은 앞으로도 진무량의 눈치만 살필 생각이오?”
“…….”
“…….”
분명히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을 만한 발언이었으나, 그럼에도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만큼 진무량과 멸천대는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장내에서 확신에 찬 백철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직 마교로 돌아오기 직전인 지금이야말로, 진무량을 죽일 수 있는 적기요.”
군중 속에서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흑사령(黑邪靈) 단륵이 의문을 던졌다.
“계획해둔 묘안이라도 있으신 게요?”
백철우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렇다고 딱히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오. 진무량에 관련된 것들은 모두 나, 백철우가 처리하겠소.”
좌중들은 모두 백철우의 발언을 반신반의했다. 그들을 대표해서 다시 한번 마철이 나섰다.
“정말 우리의 도움은 일절 필요하지 않은 것이오?”
“그렇소. 다만 진무량이 죽은 뒤, 그 뒤처리를 부탁하고 싶소.”
마교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사대신마. 그 중 한 명인 진무량을, 고작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서 해칠 수는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
약육강식이라 불리는 마교에서도 최소한의 명분은 필요했다.
백철우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모인 분들이 힘써 주신다면,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마철과 단륵을 비롯한 마교의 고수들은 백철우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지 정확히 알아챘다.
그의 말대로 분명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진무량의 행적을 약간만 조작하더라도, 얼마든지 그를 배신자로 몰아갈 수 있다.
멸천대 또한 마교의 명령 없이 움직였기에 이런저런 누명을 씌울 수 있을 터.
이런 점들을 잘 이용한다면, 마교에서 백철우의 평가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
사리사욕을 위해 사대신마를 죽인 탐욕스러운 살인마에서 악독한 배신자를 죽인 영웅으로.
마철이 말했다.
“진무량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 뒤의 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내 책임지고 대협을 도우리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진무량을 옹호하는 세력도 마교 내에 존재한다.
허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진무량이 죽은 뒤에 몇몇 놈들이 떠들어봤자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백철우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속에는 감출 수 없는 야심이 엿보였다.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저의 뜻을 따라주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소?”
“물론이오.”
몇몇 마교의 고수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진무량을 제거하는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자신들이 다칠 일도 없었다.
한자리에 모인 마교의 고수들은 백철우를 돕기로 확실하게 뜻을 굳혔다.
“곧 현운각에서 큰 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그때 내가 하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주시오.”
백철우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아마도 그쯤이면 우리들의 골칫거리가 사라졌을 것이오.”
적당한 인사치레와 함께 모였던 마교의 고수들은 각자 자리를 떠났다. 돌아가는 그들의 입가에는 모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텅 비어 버린 실내로 백철우의 수하, 철왕부(鐵王府)의 대원이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백철우에게 정중히 예를 취했다.
“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추연희의 위치는 파악했느냐?”
“명령만 내려주시면 언제든지 납치할 수 있도록 초치해 두었습니다. 이곳의 일은 잘 처리된 것입니까?”
“예상대로였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눈치 보는 것뿐인 놈들이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게다.”
진무량을 처리한 뒤에 대비는 끝마쳤다. 이제부터는 그를 본격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어야 했다.
백철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철왕부를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시켜 두고, 지금 즉시 추연희를 납치해 오거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백철우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명상에 잠겼다.
바라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앞으로 단 한 걸음. 그곳에는 거대한 태산과도 같은 존재인 진무량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에는 늘 그에게서 도망치기만 했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아니다.
‘더 이상 네놈이 알던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번만은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무릎을 꿇게 해주마.’
* * *
멸천대에 섞여 귀곡신성 내부로 들어온 연시우는 곧장 마교의 외곽으로 향했다.
마교의 외곽은 번화한 마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널찍한 대로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널린 상가에서는 장사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연시우에게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실제로 마교의 중심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연시우의 뒤를 따르던 호현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는 감상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거리를 다시 걷게 되다니, 왠지 기분이 묘합니다.”
연시우는 고개를 돌려 흘깃 호현을 쳐다봤다.
“내 명령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절대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
“진짜입니다! 그냥 오랜만에 익숙한 거리를 보니 감회에 젖어서…….”
억울한 듯 호현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연시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냥 농담 한번 해 본 거야.”
“허…….”
능청스러운 연시우의 반응에 호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연시우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불평을 털어놓았다.
‘농담을 그렇게 진지한 말투로 하면 어떡합니까!’
호현의 속마음을 연시우는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너 지금 속으로 투덜댔지?”
“안 그랬습니다.”
“그런 것 같은데?”
“진짜 아닙니다.”
더 이상 문답이 이어졌다가는 이마에서 차디찬 땀이 흘러내릴 것 같았기에, 호현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미리 경계해둬야 할 만한 곳을 파악하고 있다.”
마교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들을 조사하기 위해 등가휘와 연시우는 각자 구역을 나눴다.
등가휘가 조사를 맡은 곳은 귀곡신성의 중심부.
지금 거니는 외곽과 달리 귀곡신성의 중심부는 오직 마교의 무인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외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수상한 세력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곳은 귀곡신성의 중심부였다.
허나 연시우는 마교에서 추방당한 몸이기에 귀곡신성의 중심부까지 출입할 수는 없었다.
하여 귀곡신성의 외곽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했으나, 예상대로 순탄치가 않았다.
우선 조사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서른 명 남짓한 인원으로 귀곡신성의 외부를 조사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우선 연시우는 급히 귀곡신성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경로를 파악해둘 생각이었다.
결국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들이라면 언제가 되었든 귀곡신성 외부로 빠져나갈 확률이 매우 높았다.
누구나 아는 평범한 길에는 이미 멸천대원들을 배치한 상태였고, 은밀히 움직였을 때 이용할 만한 경로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인원이 움직인다고 가정했을 때 이동기 적합한 경로와 더불어 이런저런 조건들을 꼼꼼하게 따졌다. 그렇게 선별된 최적의 장소에 연시우는 멸천대원들을 배치시킬 생각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연시우의 시선이 순간 흔들렸다.
‘이곳은 분명…….’
걸음을 멈추며 연시우는 뒤를 따르는 멸천대원들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들를 곳이 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평소답지 않은 연시우의 행동에 호현은 의문을 나타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연시우는 결코 임무 중에 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허나 이번만은 분명 임무가 아닌,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시우는 또 다시 호현에게 농담을 건넸다.
“너 지금 내가 놀러가는 거라고 생각했지?”
물론 듣는 호현에게는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음.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진심인 것 같군.”
어차피 생각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호현은 대놓고 생각을 말했다.
“……독심술이라도 익히신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금방 돌아올 테니 잠시 여기 있어라.”
* * *
멸천대와 헤어진 연시우는 주변에 보이는 나무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높은 곳을 찾아 오르던 연시우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에서 몸을 멈췄다.
먼지 섞인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쳤으나, 고정된 연시우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안력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저 멀리 떨어진 의방이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엿볼 수 없었다. 주변 건물에 비하면 의방의 규모 또한 크지 않았다.
허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건물의 외관 따위가 아니었다.
‘멀리서 잠깐 얼굴이나 보고 가려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연시우는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추연희였다.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이 정해진 삶. 게다가 갑작스러운 추일풍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피폐하게 했다.
그럼에도 추연희는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의술은 나약했던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병을 더 정확하게 진찰하기 위해 시작한 의술이었다.
그렇게 점점 학식이 쌓인 추연희는 어느새 웬만한 의원은 발끝조차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의술을 익혔다.
어느 누구보다 병마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알았기에 이룰 수 있는 성취였다.
연시우는 지붕에서 내려와 추연희가 자주 방문하는 의방을 향해 다가갔다.
어느새 담장 근처까지 도착한 연시우는 곧 그 너머에서 추연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의원님께서 돌봐주지 않았다면 내 자식은 지금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추연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의방 내에 추연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연시우는 문득 그녀를 만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허나 그는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낯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
추연희와 함께 있는 매순간 진무량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복수를 이루기 위해, 추연희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비천검문으로 떠났다.
헌데 대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마자 뻔뻔하게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멈칫거리던 연시우는 결국 의방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목소리를 듣고 잠시 흔들렸던 건 사실이지만, 연시우는 확실히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에 비천검문으로 떠나면서 추연희와는 두 번 다시 마주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서서히 의방과 멀어지던 연시우는 한순간 아주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살기.’
연시우는 즉시 미약한 살기가 느껴지는 장소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짝 엎드린 채 나무의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숨어 있는 인원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흩어진 채 추연희가 있는 의방을 철저하게 포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