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위로
2017.12.10.
진무량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귀곡신성으로 향했다.
부상으로 인해 추일풍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은 두 귀로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면서도 머릿속은 수십 개의 실타래가 엉킨 듯이 복잡했다.
대체 누가 추일풍에게 그런 심각한 부상을 입혔단 말인가.
멸천대가 따로 움직인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다만 상대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약소세력. 당연히 멸천대와 대적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비록 자신이 빠지기는 했으나, 추일풍의 옆에는 오랜 시간 멸천대를 지켜온 등가휘와 주백기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멸천대원들도 곁을 지켰을 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추일풍이 그렇게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모든 것이 잘못된 정보임을 바랐다.
진무량은 귀곡신성 내에 있는 의방을 찾았다. 그는 곧바로 추일풍이 있는 의방 문을 열어젖혔다.
덜컥!
간절한 바람과 달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단번에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추일풍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 침상에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등가휘와 주백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특히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전신에 상처를 입은 주백기의 모습은 격전의 상황을 짐작하기 충분했다.
“그래, 왔느냐?”
평소 잔소리를 해댈 때와 달리 가늘디가는 추일풍의 목소리. 마치 가는 실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치지 않은 대답이 진무량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저 추일풍의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말은 오직 한 가지였으니까.
“누구한테 당한 거요?”
추일풍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웃음을 지어보려는 노력이었으나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 복수라도 해주려는 것이냐?”
“허튼 소리 말고 대답이나 해.”
“이거 감격이군. 내가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진무량은 부서질 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추일풍에게는 많은 것을 받았다. 무공을 처음 알려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 외에도 언제나 자신을 혈육처럼 대해준 추일풍의 진심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쿨럭! 쿨럭!”
추일풍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진무량이 다가가려 하자, 그는 한손을 들어 올려 접근을 막았다.
실로 위독해보였으나 추일풍은 태연스러운 척 농담을 건넸다.
“됐다. 이게 다 네가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을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더냐.”
“곧 죽어도 말은…….”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지자 추일풍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흘흘, 그래 살막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아주 기특하구나.”
단순한 무공의 성취뿐만이 아닌, 타인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길 바랐다. 그리고 진무량은 자신의 바람을 완벽하게 이뤄주었다.
살막을 평정함으로서 멸천대를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해 보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늘 엇나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진무량은 언제나 기대에 보답해주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추일풍은 곁에 놓아둔 염옥창을 집었다. 그리고는 직접 염옥창을 진무량에게 건넸다.
“나의 뒤를 이을 멸천대의 대주는 너다. 진무량.”
“당장 죽을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마.”
추일풍은 꿋꿋이 진무량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굳이 나를 따라할 필요는 없다. 너는 너만의 방식대로 멸천대를 이끌면 되느니라. 그렇게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멸천대를 최강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한번 변화시켜 보거라.”
“…….”
추일풍은 등가휘에게 확고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등가휘, 그대가 증인이 되어주게.”
“……알겠습니다.”
등가휘가 잠시 대답을 망설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추일풍의 부상이 걱정되는 것과 더불어, 아직 진무량을 완벽히 신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추일풍은 다시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힘이 빠지는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연희를 보살펴다오.”
마지막 순간까지 눈에 밟히는 건 추연희의 존재였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주지도 못했거늘, 이렇게 떠난다면 그녀가 느낄 고통이 얼마나 클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진무량은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고 눈앞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했다.
추일풍은 곧 숨을 거둘 것이다. 절정을 뛰어넘는 경지의 무인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모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언급한 것들은 내가 확실하게 책임질 테니까.”
“그래, 그렇다고 무리해서는 안 된다. 항상 끼니는 거르지 말고. 그리고 또…….”
“하여간 잔소리는…….”
추일풍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젠 잔소리도 습관이 되어 버렸나 보다. 이토록 잔소리를 하는 이유가 정이 있어서임을 진무량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진정 속이 깊은 녀석이니까.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결여된 부분도 많은 녀석이다.
특히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지나치게 냉정해지는 성격과 타인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면모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앞으로도 그런 부분들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쉽사리 바뀔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고민 따윌 하겠는가.
좀 더 곁에서 돌봐주고 싶었으나, 이제 그럴 수는 없다.
나머지는 진무량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걱정은 하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지켜본 진무량은 천하를 모두 품고도 남을 그릇이었으니까.
“…….”
결국 힘이 다한 추일풍이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일그러지는 공간. 이내 꿈에서 깨어날 것을 알리듯이 새하얀 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 * *
“……대주, 안에 계십니까?”
밖에서부터 주백기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무량은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
주백기는 살짝 문을 열어 진무량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진무량은 주백기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날이 밝고서도 기척이 없으니, 걱정이 돼서 찾아온 것이리라.
문밖에 있는 주백기를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잠시 들어와.”
진무량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방 중앙에 놓인 다탁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주백기와 진무량이 다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진무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추일풍이 죽은 뒤로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구나.”
“…….”
무뚝뚝한 주백기의 인상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한시도 추일풍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멸천대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애초에 상대는 멸천대에게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아니었다.
완벽한 승리를 만끽하는 순간, 변화는 상대가 아닌 멸천대 내부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가장 믿었던 수하가 추일풍의 비어있는 등 뒤를 공격한 것이다.
결속력이 강할수록 내부의 적에게 취약한 법.
예상치 못하게 등 뒤에 일장을 적중당한 것이 추일풍의 사인이었다.
게다가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추일풍의 원수를 붙잡지도 못했다.
진무량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없는 동안 놈에 대해 따로 알아낸 것은 있느냐?”
“……없습니다.”
자신의 수하로 있는 동안 가명을 썼을 확률이 높으니, 이름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놈의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인상착의.
죽을 각오로 싸워 전신에 부상을 입는 동안, 단 한 번 자신의 검이 놈에게 닿았다.
그 부위는 얼굴. 분명 놈의 얼굴에는 긴 흉터가 남았을 것이었다.
그 점에 집중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탐문하였으나, 아직 작은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진무량이 말했다.
“그놈에 대한 추적은 네가 계속 맡아줘.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알겠습니다.”
제대로 된 조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귀곡신성에 도착해야 했다.
허나 아직 앞서 보내둔 등가휘와 연시우에게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연락은 없었습니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연락이 오는 대로 마교로 돌아갈 예정이니, 지금은 잠시 쉬고 있어.”
* * *
진무량은 객잔 밖으로 나와 인근 공터로 향했다.
과거의 꿈을 꾸면서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답답한 심정을 조금 풀어보고자 무작정 밖으로 나왔으나,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돌이켜보니 과거의 꿈을 꾸고 난 뒤에 기분이 딱히 유쾌했던 적이 없었다.
즐거웠던 추억이 없어서일까.
진무량은 곧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지웠다.
‘나답지 않게 궁상이군.’
오늘따라 보이는 주변 풍경도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인해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평소에 거슬리기 짝이 없던 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지금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술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아쉽게도 객잔에서 나오면서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
다시 객잔으로 돌아갈 생각할 때쯤, 익숙한 인기척을 내며 유서하가 다가왔다.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유서하는 진무량이 걱정되어 뒤를 따라오게 된 것이었다.
우연히 객잔에서 스쳐간 진무량은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진무량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바람이나 좀 쐬고 싶어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거 없어.”
유서하는 미리 챙겨온 술병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 딱히 술은 필요하지 않겠네요.”
잠시 유서하의 손에 들린 술병을 바라보던 진무량은 무뚝뚝하던 조금 전과 달리 유창한 말솜씨를 뽐냈다.
“고민은 없는데 술은 필요해. 그러니까 그거 나한테 줘.”
유서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진무량에게 술병을 건넸다. 어차피 진무량에게 건넬 생각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진무량은 단숨에 술병을 들어 올려 술을 마신 뒤, 유서하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훔친 건 아니지?”
“제가 당신인 줄 알아요?”
“뭐 훔쳤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이내 진무량은 등 뒤에 있는 나무의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뭐 하고 있어? 이제 그만 들어가.”
“저도 잠시 바람이나 쐬려고요.”
그 뒤로는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다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어느새 그저 말없이 같이 있어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은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진무량은 잠깐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유서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생각이 복잡한 순간에 누군가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막연히 생각했을 적에는 이럴 때 누군가 곁에 있으면 불편할 것이라 여겼다. 괜히 신경만 쓰일 것 같고 그런 점이 방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나 생각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괜스레 울적한 순간에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더없이 큰 위로가 돼 주었다.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말할 수 없는 고민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
어떻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유서하는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해서는 그리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말없이 서로 통하는 사이가 유서하임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진무량은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객잔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유서하게 말했다.
“고민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야. 이만 돌아가지.”
“좀 더 밖에 있어도 되는데…….”
“날씨가 춥잖아. 그러니까 너도 들어와.”
* * *
감히 끝을 올려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뻗은 성벽. 그 성벽은 사방으로 길게 뻗어있었다.
실로 견고한 외견만 보더라도 누구나 같은 말을 떠올릴 것이다.
난공불락.
실제로 단 한 번도 침공 받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교의 본성. 그 성의 이름은 귀곡신성이었다.
멀리서 귀곡신성의 외벽이 보이는 위치쯤에서 연시우는 등가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마교에서 추방당한 몸. 진무량의 귀환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괜한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일부로 귀곡신성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반나절 정도 기다렸을 쯤, 몇몇의 멸천대원들과 함께 등가휘가 연시우를 찾아왔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등가휘를 향해 연시우가 물었다.
“갔던 일은 잘 처리했나?”
“교주님을 직접 만나 뵙진 못했지만, 대주께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전했네.”
등가휘는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만 수상한 움직임을 파악했네. 대주가 돌아오는 것을 가장 반대했던 백철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게다가 그를 따르는 세력들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네.”
연시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어떻게 보면 별다른 문제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섣불리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각자의 세력을 따로 놓고 본다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들이 뜻을 하나로 합친다면 결코 만만하게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수상하군.”
연시우의 말에 등가휘가 동조했다.
“그렇다고 당장 대주에게 연락을 취할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보네.”
당장 백철우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진무량이 멸천사성 중 두 명을 마교로 보낸 이유는, 마교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현 상태에서 진무량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확실하게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진무량이라도 정확한 결정을 내리기 힘들 것이었다.
“일단 우리끼리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네.”
등가휘의 말에 연시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