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대면
2017.11.30.
멸천대는 십만대산의 위치한 마교의 본성, 귀곡신성을 향해 나아갔다.
다만 진무량은 서둘러서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 마교로 보낸 등가휘와 연시우의 연락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지친 멸천대를 쉬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초저녁쯤 마을에 도착하자, 진무량은 멸천대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
주백기는 불만스러운 눈길로 위지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입속에 넣은 서너 가지 반찬을 동시에 삼키면서 위지운이 말했다.
“넌 왜 이렇게 안 먹어? 생긴 건 식탁도 씹어 먹게 생긴 놈이.”
“……너나 많이 먹어라.”
주백기는 혼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었으나, 진무량의 명령으로 인해 위지운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쌀쌀맞은 주백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지운은 음식을 먹어치웠다.
차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주백기는, 객잔의 입구에서 걸어들어오는 진무량의 모습을 확인했다.
짧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던 주백기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진무량을 따라 객잔에 들어온 유서하의 존재 때문이었다.
어느새 음식에서 손을 뗀 위지운 또한 유서하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정식으로 소개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함께 행동할 유서하의 존재를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질수록 멸천대나 유서하 모두 불편하기만 할 터.
유서하 또한 진무량의 의견에 찬성하여 위지운과 주백기 앞에 나선 것이었다.
유서하와 함께 다가온 진무량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지금쯤 한바탕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너희가 웬일로 조용한 것이냐?”
위지운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뭐 마음 넓은 제가 참고 있었던 거죠. 그보다…….”
위지운의 시선이 진무량의 옆에 앉은 유서하를 향했다.
“옆에 있는 아리따운 소저는 누구요?”
유서하가 대답하기 전에 진무량은 위지운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이놈 말은 다 무시해도 돼.”
언제나 그렇듯 위지운은 진무량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연락이 없던 이유가 다 있었어. 언제는 여인에겐 관심도 없다고 했으면서…….”
위지운은 유서하를 흘끗 쳐다보고 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외모가 중요했던 거네.”
위지운의 건방진 태도를 바라보던 주백기가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죽여도 괜찮겠습니까?”
“좀 더 거슬리게 하면 생각해보지.”
뒤이어 진무량은 유서하에게 위지운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놈의 이름은 위지운. 당장 죽이고 싶지만, 쓸모가 있어서 살려두는 놈이야.”
진무량의 시선이 주백기를 향했다.
“이쪽은 주백기. 관심 받는 것을 질색하니 소개는 이쯤하지.”
진무량의 소개가 끝나자 유서하가 인사를 건넸다.
“저는 유서하라고 합니다.”
진무량은 덤덤하게 유서하에 대한 설명을 보탰다.
“비천검문 소속으로 유월천의 여식이다. 앞으로 나를 도와줄 것이다.”
유월천의 이름이 나오자, 주백기의 인상이 급격하게 사나워졌다.
“…….”
진무량은 자신의 뜻을 두 사람 앞에서 확실하게 밝혔다.
“홀대하지는 마. 그렇다고 불편하게 특별 취급할 필요도 없다.”
위지운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난 검선의 여식이라 해도 별 상관없는데……. 그보다 대주의 의도가 궁금합니다만.”
진무량이 유월천의 여식에게 도움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즉, 위지운은 진무량을 향해 유서하를 곁에 두는 정확한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진무량은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금 나는 유월천에게 입은 내상으로 인해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다. 유서하는 그 금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다.”
주백기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뿐 아니라 이번에는 위지운마저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시종일관 방자한 태도를 보이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런 사실을 내게 알려줘서는 안 될 텐데…….”
나직한 혼잣말에 이어 위지운의 싸늘한 눈초리가 진무량을 향했다.
“내가 대주의 목숨을 노리는 걸 잊은 거요?”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무량은 단칼에 위지운의 말을 잘랐다.
“원한다면 언제든 덤벼도 상관없다. 다만 기회는 확실하게 노려. 저번처럼 실패한다면 반 년 정도 누워있는 걸로 안 끝날 테니까.”
진무량을 노려보던 위지운은 결국 먼저 시선을 피했다.
“쳇, 재미없군. 먼저 일어나겠소.”
“…….”
위지운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뒤이어 묵묵히 앉아있던 주백기도 밖으로 나갔다.
유서하는 괜스레 진무량에게 미안함 감정을 느꼈다.
진무량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먼저 말을 걸었다.
“네 탓이 아니니까 괜히 걱정할 필요 없어. 이런 상황은 늘 있는 일이기도 하고.”
“…….”
덤덤한 듯 건네는 진무량의 위로는 분명 효과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당장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무량이 말했다.
“넌 더 이상 놈들에게 관여하지 않아도 돼. 한동안 여기서 머무를 예정이니, 편히 쉬고 있어.”
* * *
새벽녘에 객잔을 나선 위지운은 인적이 없는 공터를 찾아 나섰다.
적당히 몸을 풀 요량으로 길을 나섰으나 딱히 적합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풀 냄새가 짙게 나는 오솔길을 지날 때, 돌연 위지운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곧 위지운이 바라보고 있는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나무 뒤에서 유서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알고 있었네요.”
“내 뒤를 따라온 이유가 뭐야? 참고로 난 대주의 명령을 그리 잘 따르는 편이 아니야.”
위지운이 살기를 흩뿌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장 널 죽일 수도 있어.”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유서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저를 공격했겠죠. 이런 친절한 경고는 더더욱 할 필요가 없을 테고요.”
“그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위지운은 순순히 수긍했다. 잇따라 그를 감싸고 있던 살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날 쫓아온 이유가 뭐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난 별로 대답해 줄 생각 없는데.”
“부탁이 아니라 거래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예요.”
위지운은 유서하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다.
“계속 해봐.”
“거래는 간단해요. 서로 궁금한 걸 묻고 대답해 주는 거죠.”
유서하는 앞으로 함께 행동하게 될 멸천대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
그 생각을 거꾸로 뒤집자, 멸천대 역시 자신과 비슷하리란 결론이 나왔다.
또한 유서하가 이런 제안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지운의 첫인상 때문이었다.
그의 첫인상은 건방짐 그 자체였다. 허나 숨겨진 의도가 있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약간 껄끄러울 수는 있겠지만, 솔직하게 대화를 청한다면 위지운은 분명 수긍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유서하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재밌네. 좋아 거래에 응하지. 다만 질문은 내가 먼저 하는 걸로.”
“알겠어요.”
위지운은 처음 유서하를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너, 대주랑 무슨 관계야?”
“동료예요.”
“그런 거 말고. 예를 들어 같이 잤다던가…….”
더 들어볼 필요가 없었기에 유서하는 단번에 위지운의 말을 잘랐다.
“그쪽이 생각하는 관계는 아니에요. 질문은 두 개 하셨네요.”
“쳇, 철저하군. 그래, 네가 묻고 싶은 건 뭔데?”
“왜 진무량을 죽이려고 하는 거죠?”
위지운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대주를 뛰어넘고 싶으니까.”
위지운을 제외한 멸천사성은 모두 마교 소속이었다.
허나 위지운은 달랐다.
그는 마교에게 멸문당한 살막 소속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살수였다. 그리고 살막을 완전히 매장시킨 것이 바로 멸천대였다.
그렇게 멸천대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은 살막은 결국 마교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 뒤에 진무량은, 적으로 상대했을 때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위지운을 멸천대로 불러들였다.
위지운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딱히 복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살수로 길러졌을 뿐이기에, 살막에 대한 충성심 따윈 전혀 없었다.
수없이 멸천대와 겨루면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진무량을 넘어서는 것. 오직 그것만이 위지운의 목표였다.
“질문할 게 하나 더 남았잖아. 마저 해.”
“아니요. 궁금증은 다 풀려서, 하나 남은 질문은 나중에 할게요.”
위지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궁금증이 풀렸는데?”
“그쪽이 진무량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쪽의 목적은 진무량의 목숨이 아니라, 그를 뛰어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위지운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진무량을 암습할 리가 없다. 그저 목숨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그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지운이 원하는 것 또한 진정으로 진무량의 역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위지운의 생각을 알게 되니, 유서하는 그의 대한 경계심을 한층 덜 수 있었다.
유서하의 말을 돌이켜 생각하던 위지운이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거지?”
“그쪽이 진무량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위지운은 헛바람을 내뱉었다.
“하. 당돌하네.”
“저도 꽤 솔직한 편이라서 거짓말을 잘 못해요.”
“그건 나랑 비슷하군.”
“다른 점이 있다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 정도겠죠.”
“이봐, 지금 내 기분이 몹시 상했거든.”
천천히 위지운을 살펴본 뒤에 유서하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위지운은 나직이 웃음을 흘린 뒤,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같은 말을 듣더라도 누구에게 어디서 들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들릴 때가 있다.
위지운에게는 지금 유서하의 언행이 그랬다.
다른 사람이 그녀와 같은 말을 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허나 숨김없이 당당한 유서하의 모습이 위지운은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위지운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어제는 제대로 인사를 못했으니, 지금 하지. 난 멸천대 삼 조장 위지운이다.”
마주보지도 않은 채 힐끗 인사를 건네는 위지운과 달리 유서하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전 비천검문의 유서하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 * *
쿵. 쿵.
승천마도 백철우가 육중한 걸음걸이로 지면을 밟았다.
일전에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누구보다 흥분했던 이가 바로 백철우였다.
‘젠장, 진무량 이놈. 끝까지 내 앞길을 막는구나!’
백철우는 진무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진무량이 마교에 있었을 적, 백철우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진무량과 비교하면 그의 공적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가끔 뛰어난 공을 세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진무량은 백철우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백철우에게 진무량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존재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의 존재는 가끔 태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평생 백철우는 빛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허나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눈엣가시 같던 진무량이 죽었다는 소식이 마교에 전해진 것이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거칠 게 없었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렸고, 비약적인 무공의 성취까지 이뤄냈다.
그리하여 결국 새로운 사대신마로 거론될 정도였다.
최고의 명예를 얻기까지 앞으로 한 걸음 남았거늘,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진무량이 마교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진무량이 돌아온다면 다시 침울했던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 자명했다. 언제나 진무량에게 뒤처졌던 그 순간으로.
이제 겨우 인생의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다시 비참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백철우는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안개가 잔뜩 낀 묘지였다.
“거기 아무도 없소!”
쩌렁쩌렁한 백철우의 목소리가 드넓은 묘지를 울렸다.
그가 찾고 있는 이는 우연히 만난 도인이었다.
스스로를 맹사라 칭한 그 도인은, 진무량이 죽었다고 알려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백철우도 도인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맹사라는 도인이 건넨 말이 모두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맹사는 백철우가 무공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줬다. 그가 비약적인 무공의 성취를 이룰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맹사의 도움이었다.
당연히 백철우는 누구보다 맹사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여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면 백철우는 언제나 맹사와 만났던 묘지를 찾았다.
백철우가 다시 한번 외쳤다.
“아무도 없는 게요!”
곧 시끄러운 백철우의 음성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인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것입니까?”
스산한 음성과 함께 등장한 맹사는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도드라지는 특징은 얼굴 전체를 가로지는 흉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백철우는 걸걸하다 못해 탁한 음성을 내뱉었다.
“내 고민이 있어 찾아왔소.”
백철우가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맹사가 선수를 쳤다.
“얼굴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흠…… 증오하는 상대가 찾아오고 있는 것이군요.”
백철우가 감탄했다.
“바로 그렇소. 상대는 진무량이라는 놈이오. 놈이 마교로 돌아오기 전에 숨통을 끊어놔야겠소. 좋은 방법이 없겠소?”
백철우는 확신을 세운 상태였다.
마교로 돌아오는 진무량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여생에 가장 큰 골칫거리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맹사는 교묘한 언변으로 백철우의 애간장을 태웠다.
“흐음……. 불길한 기운이 충만한 자이군요. 쉽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를 처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오?”
맹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순간 빛났다.
“그를 처치할 방법이 하나 보이는군요. 다만 그가 마교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어서 말해보시오.”
“우선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십시오. 그래야 놈을 처리하고 나서도 탈이 없을 것입니다.”
엉뚱한 대답에 백철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소. 당장 진무량을 죽일 수 있는 계획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에 대한 방법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죠.”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백철우를 향해 맹사가 말을 이었다.
“과거에 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순간을 그대로 재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깨달은 것이 있는 듯 백철우가 눈을 번뜩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유월천은 진무량을 정면으로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유월천은 진무량에게 빠져나올 수 없을 덫을 놓았다. 그리고 그 덫의 미끼이자 핵심은 바로 추연희라는 존재였다.
맹사가 말했다.
“귀인께서 찾으시는 분은 아마도 귀곡신성 내부에 있을 것입니다.”
이내 백철우의 머릿속에는 진무량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이 차근차근 세워졌다. 이내 백철우가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하하하! 내 언제나 그대에게 도움만 받는구려.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내 반드시 근사한 보답을 하리다!”
얼마나 유쾌한지 백철우는 떠나는 동안에도 연신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주변을 시끄럽게 울리던 백철우의 웃음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맹사는 마치 가면이 벗겨지듯 표정이 싹 변했다.
“돼지 같은 놈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쉽지 않군.”
백철우 같은 족속들은 조금만 떠받들어주면 상대를 본인의 아래로 여긴다. 자연스레 으스대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간단한 의심조차 하지 않게 된다.
본인의 처지가 실에 묶인 인형과 같거늘, 그 사실을 스스로만 모르는 것이다.
이내 백철우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맹사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맹사가 말했다.
“련에서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노군의 뜻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적무혁의 전언에 맹사는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말해보아라.”
“진무량과 유월천 사이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진무량과 함께 있는 검선의 여식을 붙잡으라는 전언입니다.”
맹사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멸천대와는 다시 마주하기가 좀 꺼려지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우선은 알겠다고 전하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맹사는 익히 알고 있는 멸천대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주백기였다.
평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주백기가 그토록 절규하는 모습을 본 자는 아마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막상 그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을 하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독한 희열로 인한 떨림이었다.
“설마 벌써 나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맹사는 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끼며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