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태동
2017.11.23.
비천검문의 태상장로 장백령은 집무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서성거렸다.
갖은 방법을 모두 동원해봤지만, 도저히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역시 내가 직접 추격대에 합류했어야 했거늘.’
마음 같아서는 유서하를 구하기 위해 직접 추격대에 합류하고 싶었다. 허나 유월천이 없는 지금, 자신마저 비천검문을 떠날 수는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추격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집무실 밖을 서성이던 장백령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날렵한 인기척을 감지했다.
곧 그의 예상대로 익숙한 인상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앞서 진무량을 붙잡기 위해 파견한 추격대의 일원으로, 추격대의 정황을 비천검문에 전달하는 연락책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장백령이 다급하게 물었다.
“추격대는 지금 어디 있느냐? 멸천대를…… 아니, 그보다 서하에 대해 알아낸 것은 없느냐?”
연락책은 장백령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결국 멸천대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허면 운학문은…….”
장백령은 죄책감으로 인해 도저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멸천대를 붙잡기 위해 운학문에 도움을 청했다. 어려운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운학문주는 흔쾌히 부탁을 수락했다.
그렇다면 운학문은 전력으로 멸천대를 막기 위해 움직였을 터. 당연히 멸천대와 일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헌데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도착하기 전에 멸천대가 마교로 향했다.
즉, 운학문은 멸천대를 막지 못했다는 뜻.
‘그렇다면…….’
장백령의 머릿속에는 멸천대의 말발굽에 철저하게 짓밟히는 운학문의 모습이 그려졌다.
장백령의 끔찍한 상상을 깬 것은 연락책의 목소리였다.
“마교로 향하는 길에 운학문과 멸천대가 조우했으나, 양측 모두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보고에 장백령은 크게 놀랐다.
“뭐라, 정말 확실한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운학문주께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이구나.”
장백령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사실 운학문의 전멸을 예상했다. 그렇게 예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상대가 멸천대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멸천대는 적으로 삼은 상대를 결코 살려둔 적이 없었다. 설령 상대가 항복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멸천대는 한번 적이라고 여긴 상대는 끝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죽였다.
그런 멸천대와 맞서면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연락책은 상념에 빠져있는 장백령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장로님, 이제부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추격대는 멸천대를 놓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만…….”
“더 이상 멸천대를 쫓을 수는 없다. 추격대에게는 다시 비천검문으로 돌아오라 전하거라.”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연락책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서하 아가씨는…….”
“서하의 구출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구해낼 것이다.”
진무량과 멸천대가 정파의 영역을 벗어나기 전에 유서하를 되찾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헌데 이를 실패했으니 앞으로 유서하를 되찾는 일이 몇 배로 힘들어질 것이 자명했다.
허나 포기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마교로 쳐들어 갈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일단 내실을 가다듬어야 할 때였다.
죽은 줄 알았던 진무량의 등장과 유서하의 납치. 그 모든 사건들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당연히 그에 따른 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하여 속수무책으로 진무량을 놓쳤으나, 이제부터는 아니다.
‘방법부터 철저하게 다시 강구한 뒤에 확실하게 서하를 구해낼 것이다.’
진무량에게 납치된 유서하를 되찾을 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무림맹.
무림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히 유서하를 구해낼 수 있는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허나 무림맹이 과연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무림맹은 수많은 정파의 세력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거대한 집단.
무림맹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파의 세력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을 제시해야 했다.
허나 유서하를 구해냄으로 인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실리는 딱히 없었다.
심지어 상대해야 할 세력은 마교.
비록 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마교는 무림맹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거대 세력이다. 제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할지라도 마교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비천검문의 입장에서는 유서하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허나 무림맹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비천검문은 진무량이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 대가도 치러야 했다.
그런 부분들은 비천검문을 도울 뜻이 없는 문파들에게 아주 좋은 명분거리가 될 것이 자명했다.
여러모로 상황은 좋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비천검문을 돕기 위해 나서줄 문파가 얼마나 될까.
장백령이 두 눈을 질근 감았다.
‘쉽지는 않겠구나.’
장백령의 근심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때 정문을 지키고 있던 비천검문의 무인이 신속하게 장백령을 찾아왔다.
“장로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장백령은 당장 유서하에 대한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외의 것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에 그는 결국 적당한 핑계를 댔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니, 나를 찾는 손님이라면 정중히 돌려보내어라.”
“남궁세가에서 찾아오신 분들입니다만…….”
의외라는 듯 장백령이 되물었다.
“남궁세가?”
“그렇습니다.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지 소협이 찾아왔습니다.”
영문 모를 남궁지의 방문에 장백령은 미간을 좁혔다.
평소 비천검문이 남궁세가와 친분이 깊다고는 하나, 당장 남궁세가가 비천검문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비천검문을 방문하겠다는 사소한 언질도 없었고, 딱히 남궁세가와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지 못했던 남궁지의 방문에 장백령은 관심을 보였다. 그 사실을 알아챈 비천검문 무인은 보고를 이어갔다.
“남궁지 소협 홀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장백령은 남궁지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일원들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청색 무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남궁지가 장백령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히 맞이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장백령은 허허로이 웃으며 남궁지의 말을 받았다.
“간만에 이렇게 보게 되니 참으로 반갑구려. 헌데 세가의 사람들까지 이끌고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장백령의 시선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향했다.
다부진 골격과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세. 얼핏 봐도 평범한 무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남궁세가에서도 선별된 고수들이겠군.’
특유의 젊은 패기가 느껴지는 어조로 남궁지가 말했다.
“약조를 지키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약조라 하면……?”
“과거 유 소저께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 소저께서 남궁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찾아가겠노라 약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궁지는 창문을 통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고수들을 쭉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 가장 신뢰하는 세가의 고수들입니다. 유 소저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아직 많은 인원을 데려오지는 못했습니다.”
포권을 쥔 양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남궁지가 말을 이었다.
“비천검문에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남궁세가는 유 소저를 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허락이라 할 것이 뭐가 있겠소. 남궁세가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요.”
한참 나이가 어린 남궁지였으나, 장백령은 진심을 다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정파 무림에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런 남궁세가가 앞장서서 비천검문을 돕는다면. 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단순하게 따져봤을 때도, 당장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합류하면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 그뿐 아니라, 남궁세가와 우호적인 세력들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겸손한 자세를 취하면서 남궁지가 말했다.
“먼저 도움을 받은 건 저희 쪽입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서하에게 힘이 되어주겠다는 약조와 더불어, 남궁지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약조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오래 전에 했던 말이지만, 아직까지도 그 순간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ㅡ유 소저의 말을 듣고 그대를 모른 척했으나, 나도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겠지. 그대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 내 가장 먼저 찾아가겠소.
무인으로서 처음으로 호승심을 느끼게 해준 상대와의 약조.
‘그대와의 약조 또한 잊지 않았소. 진무량.’
* * *
쉴 새 없이 매서운 강풍이 나부끼는 철악산. 그 중턱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것처럼 보이는 작은 초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초가 내부에는 무언가 잔뜩 적힌 문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 붙은 종이부터 시작해서, 바닥은 문서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의 문서들을 차분하게 살피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천기자라 불리는 초진양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으나, 초진양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손에 들린 문서들을 꼼꼼히 살폈다.
방대한 양의 문서들에는 각기 다른 암어들이 적혀있었다.
그 문서들은 모두 유월천이 구해온 자료들로서, 초진양은 그것들을 일일이 구중련의 암어와 비교했다.
“역시.”
초진양의 목소리에서는 확신에 찬 자신감이 묻어났다. 구중련의 암어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대한 자료를 조사한 성과였다.
구중련의 암어는 수십 가지의 암어를 섞어놓은 형태였으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배열이었다.
‘그렇다면…….’
핵심을 파악했으니 암어를 풀어내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초진양은 거침없이 붓을 집어 들었다. 초진양의 손에 쥐어진 붓이 종이를 스쳐갔고, 그때마다 유려한 글씨가 종이 위에 쓰였다. 방대한 자료들과 구중련의 암어를 비교하면서 초진양은 쉬지 않고 글을 써내려갔다.
마지막 문단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 돌연 초진양의 방문이 열렸다.
덜컹.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이는 검선 유월천이었다.
유월천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초진양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네를 찾아가려 했는데…….”
덤덤한 반응을 보이던 초진양은 유월천의 모습을 확인하고 급히 말을 멈췄다.
평소의 유월천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유월천은 지금 굉장히 다급해보였다.
여태껏 철악산에서 함께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왔다. 그동안 유월천이 이토록 조급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유월천을 본 이래, 이렇게까지 급박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유난히 처진 눈꼬리 때문인지 그는 늘 웃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다급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유월천은 결코 겉으로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속을 알 수 없어 능구렁이라는 별명까지 생겼겠는가.
낯선 유월천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확실히 유월천에게서 평소의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월천이 대답했다.
“급히 비천검문에 갈 일이 생겼네. 문파로 돌아가면 이곳에 사람을 보낼 테니, 암어에 대한 조사를 계속 해주게.”
“굳이 그럴 필요 없네. 마침 암어를 모두 해독한 참이었네.”
“그런가.”
그토록 바라던 구중련의 암어를 해독했으나, 유월천의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그 이유는 견무겸에게서 받은 서찰 때문이었다.
진무량에게 납치된 유서하. 그 소식을 알게 된 순간, 유월천의 머릿속은 백지로 변해버렸다.
지금 당장은 구중련에 대한 조사보다도 유서하의 안위가 훨씬 더 걱정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이리 조급해 보이는 건 처음이구먼.”
초진양은 유월천에게 구중련의 암어를 해독한 종이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서찰에 적힌 암어를 해독한 것일세.”
“…….”
유월천은 일단 초진양이 내미는 서찰을 받아들었다.
초진양이 말했다.
“급한 일이 생긴 듯하니, 먼저 돌아가게. 난 이곳을 정리하고 자네를 찾아가겠네.”
“허나 자네는…….”
“내 이미 자네를 돕기로 결심했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유월천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초진양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내 그럼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네.”
길을 떠나려는 유월천을 향해 초진양이 말했다.
“일단 서찰의 내용을 확인해보게. 내 자네를 돕기 위해 결심한 이유도 그곳에 있네.”
사실 유월천에게 들은 것만으로 구중련의 존재를 모두 파악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하여 초진양은 암어를 해독하는 것으로 유월천과의 관계를 끝내려 했다.
허나 암어를 풀고 서찰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 이상, 또 다시 은거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만큼 구중련의 서찰의 쓰인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유월천의 시선이 자연스레 초진양에게 건네받은 서찰로 향했다.
“…….”
서찰에 적힌 글귀를 읽는 순간, 유월천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꾸깃.
무의식적으로 힘을 너무 세게 준 나머지, 쥐고 있는 종이의 끝부분이 찢어졌다.
초진양은 유월천의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이게 정말 구중련의 뜻이라면, 그들은 정말 위험한 자들일 걸세.”
유월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빨리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먼. 그럼 먼저 가보겠네.”
구중련의 암어로 적힌 서찰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교가 무너지는 순간, 숨어있는 구중련의 세력들은 모두 일어나라.
그때야말로 구중련이 하늘로 웅비할 때. 즉 썩은 강호가 무너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