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집결 (1)
2017.11.16.
운학문에서 특별히 선별된 정예 문도들은 우당현을 따라 해원산으로 집결했다.
운학문주 우당현은 옥진강을 따로 불러내서 해원산의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다.
해원산은 그리 험준한 산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곳곳에서 깎아지른 절벽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해원산의 지형을 둘러본 우당현은 곁에 있는 옥진강을 향해 물었다.
“자네 말대로 일단 이곳에 도착하긴 했네만, 이제부터는 어쩔 생각인가?”
“이곳으로 귀혈악인을 유인할 생각입니다.”
우당현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옥진강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교로 향하는 길을 따져보았을 때, 귀혈악인이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경로는 세 군데입니다.”
“자네가 말한 효율적인 경로 중 한 곳이 해원산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해원산은 세 갈래의 경로 중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멸천대를 붙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교로 향하는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크게 돌아가는 길을 빼면, 진무량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세 가지.
허나 그 경로들 중 어느 곳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마교로 도착하는 시간은 엇비슷했다. 하여 진무량이 그중 어디를 선택할지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세 갈래의 경로를 모두 막을 수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멸천대의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운학문의 힘을 한곳으로 집중해야만 했다.
옥진강은 멸천대를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문주님과 저는 마교로 향하는 경로 중, 해원산이 아닌 다른 경로를 집중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우당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으로 진무량을 유인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부러 경계를 허술하게 하여 해원산으로 유인할 생각입니다.”
옥진강의 설명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당현은 일단 침착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옥진강은 다시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가 멸천대보다 우위에 있을 하나 꼽자면, 바로 정보력입니다.”
“그렇겠지. 우리는 인근의 문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바로 그 점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멸천대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해원산으로 움직인다면, 그 사실 또한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당현은 그제야 옥진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부로 해원산의 경비를 게을리하여 멸천대를 유인하고, 우리는 다른 곳을 지키다가 해원산으로 모이자는 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옥진강은 멸천대의 움직임과 해원산과의 거리를 철저하게 계산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사전에 멸천대의 진로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들보다 운학문의 무인들이 먼저 해원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당현이 말했다.
“멸천대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활용한 방법이군.”
옥진강의 계획으로 얻을 수 가장 큰 이점은, 운학문의 힘을 온전히 한곳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양 옆에 포진하고 있는 우당현과 옥진강이 멸천대를 기습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포위하는 형세가 될 것이었다.
옥진강이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은 절벽이 많은 산지. 멸천대가 자랑하는 기마의 움직임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다현은 긍정을 나타내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운학문의 목적은 멸천대의 진로를 막아 시간을 버는 것. 분명 옥진강의 계획은 그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했다.
“자네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우리가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올 때까지 멸천대의 움직임을 막아내는 것이겠군.”
우당현은 근심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어쨌든 멸천대와 맞서게 되면 운학문 또한 큰 타격을 입을 터.
어떻게든 운학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 우당현의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멸천대가 온전히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티는 것뿐이라면 완전히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우당현이 말했다.
“어쨌든 당장 주시해야 할 것은 멸천대의 움직임이겠구먼.”
“그렇습니다. 이미 주변 문파들과 정보조직들을 통해 멸천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서둘러 움직이세.”
* * *
해가 아직 중천에 걸려 있는 오시 말(오후 한 시) 무렵. 멸천대는 각자 흩어져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당장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나, 진무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무 그늘에서 몸을 쉬고 있는 진무량을 향해 연시우가 말했다.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움직인다면…….”
“뭘 그리 걱정하는 것이냐.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순간 멈칫거렸던 연시우는 이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들을 진무량은 아무렇지 않게 해왔다. 언뜻 보면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 적도 수없이 많았다.
허나 언제나 무모해 보이는 행동들의 결과는 완전한 승리로 이어졌다.
진무량이 말했다.
“이 앞을 지나게 되면 마교로 향하는 우리의 진로를 정파 놈들이 눈치챌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기다려야 할 때다.”
연시우는 쥐고 있는 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 것이 문제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일각 안에 모조리 처리해 놓겠습니다.”
정보조직들과 정파의 문파들이 멀리서 멸천대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연시우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진무량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살려두었을 뿐,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진무량이 말했다.
“내버려 둬. 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신경을 쏟아주면, 오히려 그 행동이 우리에게 득이 될 것이다. 그보다 운학문의 움직임은 파악해 두었느냐?”
“그렇습니다. 운학문은 마교로 향하는 경로들을 확실하게 막고 있습니다. 다만 해원산 인근에는 아무런 경계를 취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재미있군. 나랑 심리전을 해보려는 건가.”
진무량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마교로 보낸 서찰에 대한 답신은 아직 오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 서찰에는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 것입니까?”
“너도 많이 놀랄 만한 내용일 것이다. 또한 아주 오래 전에 깔아둔 포석이기도 하지. 그걸 지금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별로 상관은 없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느냐?”
“대주께서 따로 생각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진무량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곧 알게 될 테니 기다려라. 하나만 말해주자면, 이번 전투의 목적은 부전승(不戰勝)이다.”
보통 부전승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대진에서 운으로 상대와 겨루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실제로 부전승이 뜻하는 바는 일반적인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차이를 보여서, 싸우려는 의지 자체를 꺾어버리는 것.
즉,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통해서 싸우지 않고 얻는 승리. 그것이야말로 부전승이 가진 진짜 의미이다.
간단하게 몸을 풀면서 진무량이 말했다.
“지금은 멸천대에게 편히 쉬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려 놓거라.”
* * *
그날 밤. 유난히 아름다운 보름달이 그 자태를 뽐내듯 높이 떠있었다.
진무량은 유서하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유서하의 표정은 척 보기에도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어?”
잠시 머뭇거리던 유서하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장 고민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진무량은 유서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 어떤 고민이든 내가 전부 해결해 줄 테니까.”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진무량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지금의 유서하에게 큰 위로였다.
만약 그가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 순간을 견디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진무량이 말했다.
“내가 확신했던 일들 중에서 실패했던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신감이 조금 지나친 거 아닌가요. 어떻게 그렇게 확실할 수 있죠?”
“나보다 뛰어난 놈은 천하에 없으니까.”
유서하는 황당함으로 인해 잠시 진무량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량이 말했다.
“역시 넌 웃는 게 제일 잘 어울려.”
“네?”
유서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상치 못한 진무량의 말에 그녀는 순간 몸이 굳은 것처럼 느껴졌다.
진무량은 아무렇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만 쉬어. 멸천대는 알고 있을 테지만, 난 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럴 때 푹 쉬어 둬.”
* * *
경계를 맡은 몇몇의 멸천대 대원들을 빼고는 모두 잠에 빠져든 시각, 진무량은 홀로 천막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의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속에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 곧 도착하리란 확신이 배어 있었다.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연시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진무량은 가볍게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내일 아침부터는 다시 전속력으로 마교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거의 쉬지 않을 예정이니, 미리 준비해 두어라.”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연시우가 말했다.
“일단 서찰을 확인하셔야…….”
“거기 쓰인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굳이 확인할 필요 없어. 그에 대한 답신은 이것이다.”
진무량은 품속에서 미리 적어둔 서찰을 꺼내 연시우에게 건네며 말했다.
“서찰의 내용들을 모두 확인해두어라. 그럼 네가 해야 할 일을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진무량의 행동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연시우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마교로는 어떤 방면으로 이동하실 생각이십니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진무량이 말했다.
“중앙에 있는 해원산으로 움직일 것이다.”
* * *
갑작스런 멸천대의 움직임을 파악한 옥진강은 운학문의 문도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해원산으로 나아갔다.
전력을 다해 경공술을 펼치던 옥진강의 옆으로 운학문의 무인이 재빨리 다가왔다.
“문주님께서도 지금 해원산으로 오고 계신다 합니다.”
옥진강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문주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모두 뒤처지지 말거라!”
옥진강의 대처는 신속했다. 멸천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다만 옥진강에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었다.
‘멸천대의 행동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하지 않은가.’
멸천대의 수장인 귀혈악인은 그 행동이 신출귀몰하여 도저히 예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멸천대는 마교로 향하는 세 갈래의 길 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여 더욱 철저하게 멸천대의 움직임을 주시했으나, 특별히 달라진 점은 전혀 없었다.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단 말인가.’
옥진강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지웠다.
어쨌든 멸천대는 해원산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멸천대가 걸음을 멈춘 것이 우연의 일치라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설사 자신의 생각을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해원산으로 향한다면 충분히 그들을 막아낼 수 있다.
옥진강은 평소보다 격앙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눈치챘다.
‘침착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상황은 자신이 진무량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사대신마라 불리는 진무량을 잡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운학문을 얕보고 있었다면, 오늘 패배하는 쪽은 멸천대일 것이다.’
* * *
멸천대의 거친 말발굽소리가 어둠이 깊게 깔린 해원산 초입에서 울려 퍼졌다.
며칠 동안 멸천대는 최소한의 휴식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마교로 이동하는 것에 전념했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태운 채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자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있는 백여 명의 멸천대가 따르고 있었다.
유서하는 멸천대와 함께 움직이면서, 그들이 강호에 떨친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멸천대의 무력은 세간에 알려진 것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허나 멸천대의 진정한 강함을 엿볼 수 있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침착함.
진무량은 멸천대에게 해원산의 운학문이 매복하고 있음을 알렸다.
당장 어디서 운학문의 공격이 날아올지 모른다. 심지어 어둠이 짙게 깔려 시야조차 방해받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천대는 조금도 긴장하거나 움츠러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다.
그들은 마치 이런 상황을 반기는 것 같았다. 마치 위험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이토록 멸천대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경험.
지금과 비교조차 안 되는 혹독한 경험을 이겨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멸천대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겪어온 것일까.’
비천검문에서 검을 익힐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덕목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겁을 먹는다면 검에 망설임이 생긴다.
또한 격앙되어 있다면 검로가 흐트러지고, 상대를 얕잡아보면 움직임이 조잡해진다.
그 찰나의 순간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무인들은 부지기수이다.
허나 멸천대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아주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서하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멸천대의 강함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진무량을 선두로 남하하고 있는 멸천대의 앞에 말을 타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앞서 선발대로 파견해둔 멸천대의 대원들이었다.
“대주님을 뵙습니다.”
말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멸천대원을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그래, 운학문의 위치는?”
“그들은 이미 해원산에 도착했습니다. 대주님의 예상대로 양 옆에서 합공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좋아. 이대로 놈들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움직인다.”
* * *
옥진강은 좁은 협로의 몸을 숨긴 채 멸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깎아지른 절벽들로 둘러싸인 곳으로 협공을 펼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옥진강은 반대편 기슭에 몸을 숨기고 있는 우당현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통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을 교환했다.
운학문의 무인들은 모두 극도로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
곧 있으면 진무량과 멸천대 이곳에 당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점차 지면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히히이히힝!”
운학문의 매복이 펼쳐진 협곡에 들어서기 전,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진무량이 고삐를 잡았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멸천대 역시 고삐를 잡아 말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는 옥진강은 긴장된 눈초리로 멸천대의 모습을 살폈다.
‘저들이 바로 그 멸천대인가…….’
소문과 달리 멸천대는 흑색갑주와 나찰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마교를 벗어나면서 멸천대를 상징하는 것들을 모두 버렸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은연중에 풍기는 파괴적인 기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운학문의 무인들이 매복하고 있는 협로를 향해 진무량이 다가갔다.
“여기 숨어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모습을 드러내라.”
“…….”
“…….”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진무량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낼 용기도 없으면서 내 목을 노리겠다는 것이냐!”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고 있지 않았지만, 운학문의 무인들은 분명 술렁이고 있었다.
‘저 사내가 그 귀혈악인……!’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허나…….’
운학문의 무인들은 각자 마른침을 삼켰다.
강호에서 최고로 꼽히는 고수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되니, 저절로 몸이 굳어버린 것이었다.
옥진강은 곧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
‘좋지 못한 흐름이다.’
운학문의 무인들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진무량의 기백에 눌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본격적으로 검을 섞기도 전에 겁을 집어 먹는다면 이길 수 있는 싸움도 그르치기 마련.
‘어차피 위치를 들킨 이상 매복에 의미는 없다.’
결국 몸을 숨기고 있던 옥진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진무량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나는 운학문의 화영검(花影劍) 옥진강! 협을 칭하는 정파의 일인으로서 무림공적을 처단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찾아왔소!”
“기세는 제법이군. 네가 검을 겨눈 상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느냐?”
혹한의 서릿발처럼 차갑게 울리는 진무량의 목소리.
이에 질세라 운학문의 문주 우당현이 모습을 드러내며 진무량을 향해 외쳤다.
“허세는 그만 부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또한 곧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도착할 터! 얌전히 우리를 따른다면……. 으읏!”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떨려오는 바람에 우당현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친 말발굽 소리.
두두두두두두!
갑작스러운 사태에 우당현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침착함을 되찾지 못한 상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했다.
분명 눈앞에 있는 멸천대는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마치 대지가 찢어지는 듯한 거친 진동이 전해져 오는 곳은 자신들의 등 뒤였다.
‘어째서 뒤쪽에서 이런 진동이?’
자신들의 뒤쪽에서 나타날 정파의 문파는 없었다. 그 방면은 정파의 영역을 벗어나 마교로 이어지는 곳.
‘설마!’
당황한 우당현은 안력을 집중해 진동이 전해져 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해원산을 시커멓게 물들이듯이 다가오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각기 말을 탄 채, 흑색 갑옷을 입고 나찰의 가면을 쓴 행색이었다.
그들의 정체는 멸천대.
진무량의 명을 받고 마교에서 출발한 이들이 드디어 해원산에 도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