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대응
2017.11.12.
진무량과 멸천대는 마교를 향해 전속력으로 남하하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그들의 행군은 늦은 저녁 무렵이 돼서야 겨우 멈췄다.
사방이 탁 트인 구릉지에 도착한 멸천대는 밤을 지낼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 경험을 증명하듯 멸천대는 능숙하게 야영 준비를 해 나갔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연시우가 진무량을 찾아갔다.
“후발대에게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한 손에 서찰을 들고 찾아온 연시우를 향해 진무량이 대답했다.
“말해.”
“비천검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주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주변 문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과연, 장백령은 여전히 반응이 빠르군.”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연시우가 말했다.
“견무겸인가 하는 그자, 역시 죽이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상관없어. 장백령의 행동들은 모두 예상했던 범위 안에 있다.”
지금 당장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멸천대의 뒤를 잡을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또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호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뒤에 숨어서 일을 꾸미는 건 애초에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니까.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직접 시인했으니, 비천검문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헛소문을 퍼뜨린 대가는 확실하게 치른 셈이지.”
연시우는 익히 알고 있는 진무량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허나 비천검문을 이끌고 있는 장백령의 존재를 마냥 얕볼 수는 없었다.
“선발대에게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는 문파는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연시우를 바라보던 진무량이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지독한 면모는 여전하군.”
분명 앞으로 가야 할 경로에 있는 정파의 문파들 중, 멸천대와 정면으로 겨룰 만한 힘을 가진 곳은 없었다.
연시우 또한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경계를 느슨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면밀히 살피고 지독하게 파고들어 일말의 변수까지 차단해야만 연시우는 직성이 풀렸다.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치밀함은, 가끔 동료인 멸천대 내에서조차 숨막혀할 정도였다.
“뭐든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인상을 찌푸리며 진무량이 연시우의 말을 잘랐다.
“또 뭐, 보고할 게 많이 남아 있나?”
천연덕스럽게 연시우가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만.”
진무량은 체념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대답했다.
“짧게 해.”
* * *
연시우의 수하 호현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호현은 인근의 지형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따르는 멸천대원들에게 능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쪽 방면에 경계 인원을 더 배치시켜라. 우거진 숲으로 인해 시야의 사각이 생긴다.”
인근에 딱히 위협을 가할 만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철저한 경계를 펼치는 이유는 멸천대의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었다.
“즉시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리던 호현은 즉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야에 홀로 있는 유서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멸천대가 처음 비천검문에 도착했을 때, 유서하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유서하의 빼어난 외모는 익히 알려져 있었기에, 그녀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현은 적의가 가득 담긴 눈으로 유서하를 바라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다른 장소에서 따로 지시를 내리겠다. 가자.”
호현은 선두에서 말을 달려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유서하는 쉬기 위해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멸천대의 적대적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진무량의 원수인 유월천의 여식에게 적대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멸천대가 유서하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취하는 이유는 오로지 진무량의 명령 때문이었다.
유서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혼잣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불편한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허나 그 원인이 적의를 드러내는 멸천대 때문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오히려 멸천대에게는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껏 먹을거리나 잠자리를 모두 준비해준 것이 멸천대였다. 허나 그들에게 자신이 보답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도움을 받으면 그에 따른 보답을 하는 것.
가장 기본으로 여기는 생각조차 실행하지 못하는 무력감. 불편한 감정은 그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억지로 돕겠다고 나서는 건 방해만 될 텐데.’
한참을 고민에 빠져있던 중, 순간적으로 유서하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내 유서하는 등에 메고 있는 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유서하는 천천히 칠현금의 현을 한 번 어루만졌다.
디리리링―!
이내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 * *
유서하가 만드는 아름다운 금의 선율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느린 박자로 시작된 연주는 점차 마음을 편안하게 곡조로 이어졌다.
야영 준비를 끝내고 각자 몸을 쉬고 있던 멸천대원들은 자연스레 금의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이미 유서하가 연주에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유서하의 연주는 길게 늘어지지 않고 간결하게 끝을 맺었다.
그녀의 연주가 끝난 뒤, 보고를 위해 진무량과 같이 있던 연시우가 입을 열었다.
“이런 연주는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연시우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무표정이었다.
허나 평소 무신경한 연시우에게 있어서 이 정도 반응은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었다.
살벌한 전장을 전전하다 보니 딱히 악기 소리를 접할 기회가 없었으나, 유서하의 연주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했다.
사실 마교에서 출발하여 비천검문까지 도착하는 것 자체가 험난한 여정이었다. 정파의 영역에서는 한순간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다.
그 상태에서 곧바로 다시 마교로 되돌아가야 하는 일정은 멸천대에게도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멸천대에게 이런 상황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보다 훨씬 더한 극한의 상황을 많이 겪은 것도 사실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아예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고단한 일정을 보내온 멸천대에게 유서하의 연주는 분명히 특별했다. 금의 선율이 흐르는 순간만은 쌓인 피로를 잊고 편안한 기분을 만끽한 것이었다.
유서하의 연주 속에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함께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헌데 갑자기 왜 이런 연주를……?”
혼잣말처럼 들리는 연시우의 물음에 진무량이 대답했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유서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결코 그녀의 행동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정파인들이라면 마교의 사람들 자체를 선입견을 통해 바라본다. 게다가 그 상대가 마교에서도 가장 지독하다고 알려진 멸천대라면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허나 유서하는 그런 멸천대를 멸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 앞에서 주눅 들지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서하는 늘 한결 같았다.
최악의 무림공적이라는 선입견 따위 그녀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꾸며낸 허상이 아닌, 스스로의 눈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비록 상대방이 냉대하더라도 언제나 먼저 선의로 다가간다.
이런 부분들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서하의 특별한 매력일 것이다.
처음에는 적으로 여겼던 유서하가 점점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일까.
“역시 시시한 여인이 아니야.”
* * *
연시우와 헤어진 진무량은 곧바로 유서하를 찾아갔다.
멸천대가 모여 있는 장소에서 조금 더 떨어지자, 곧 유서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모닥불 앞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칼바람으로 인해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앞으로 날씨가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한동안은 시린 바람을 맞으며 강행군을 이어가야 했다.
잠시 멈춰 선 채 유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무량은 곧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진무량은 수통을 유서하의 옆에 툭 던지고는, 그녀를 지나쳐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유서하는 진무량이 놓고 간 수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무심한 어조로 진무량이 말했다.
“따뜻한 물이야.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유서하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수통을 두 손으로 잡았다.
“…….”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무량의 세심한 배려는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언제나 멸천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쉴 곳을 만들어 주었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유서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서 딱히 여러 말을 나눈 것은 아니었으나, 드러나지 않는 진무량의 배려를 유서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유서하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럴 필요 없어. 널 납치한 이상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니까. 힘들어도 마교로 돌아갈 때까지만 참아.”
마지막의 시선을 살짝 피했기 때문일까. 유서하는 진무량의 말이 전혀 차갑게 들리지 않았다.
모닥불에 장작을 넣으며 진무량이 화제를 돌렸다.
“쓸모없는 네 호위무사는 오늘 풀어줬어. 그러니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무겸은 무사히 비천검문으로 돌아간 건가요?”
“그래. 그리고 장백령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무림에 공표했어. 전력으로 너를 되찾을 생각인 거겠지.”
유서하는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장백령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천검문의 추격은 분명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건 이게 전부야.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말해.”
“……이런 정보들을 제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죠?”
“너한테 아무것도 숨길 생각 없으니까.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넌 나와 함께 마교로 돌아가게 될 거야.”
진무량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다시 유서하의 옆을 지나쳤다.
“좀 전에 했던 그 연주.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씩 들려줘.”
한 발자국씩 유서하와 멀어지던 중, 진무량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다들 꽤 좋아하는 눈치였거든.”
* * *
서서히 햇살이 비춰오는 새벽.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멸천대는 이미 길을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본격적으로 마교를 향해 출발하기에 앞서, 진무량은 유서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마주치는 순간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곧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있는 멸천대원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진무량이 앞서 보내놓은 선발대 중 한 명으로, 전령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내였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전령은 곧 진무량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긴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는 진무량의 곁에 있는 유서하를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것이…….”
“그럴 필요 없다. 긴급한 보고가 무엇이냐?”
진무량의 명령에 전령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운학문이 몇몇 문파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교로 가는 경로에서 주된 요지에 이미 문도들을 배치한 상태입니다.”
“우리와 정면으로 겨뤄볼 생각인가 보군.”
운학문의 돌발적인 행동은 분명 예상에 없던 것이었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운학문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거대문파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곳은 멸천대와 정면으로 겨룰 엄두를 내지 못한다.
보통 운학문과 같은 군소 문파는 거대문파에 힘을 보태는 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그들이 정면으로 나섰다는 것은 분명 의외였다.
진무량이 말했다.
“우선 운학문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해 놓아라.”
“알겠습니다.”
전령은 대답을 마친 후에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진무량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빠르게 말을 달렸다.
진무량은 곁에 있는 유서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 들었겠군.”
“……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모조리 죽여야겠지. 난 내게 덤벼드는 놈들을 살려두지 않아.”
상대가 누구이건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의도 따윈 중요하지 않다.
방해가 된다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일 뿐.
유서하는 멸천대가 운학문을 피해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정파의 영역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지금 멸천대의 상황이다. 당연히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는 없을 터.
유서하가 말했다.
“제가 운학문의 사람들을 설득해 볼게요. 그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그때 강행돌파를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그건 안 돼. 놈들의 목적 중에는 너를 되찾는 것도 있어. 그런 놈들에게 너를 보내줄 순 없어.”
“저를 믿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 너를 제외한 정파 놈들을 믿지 않는 거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운학문의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면……. 저는 더 이상 당신과 동료로 지낼 수 없어요.”
진무량과 동료로서 곁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불필요한 살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유서하는 진심으로 진무량과 동료의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유서하가 말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
묵묵히 상념에 빠져 있던 진무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를 다른 놈들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네가 바라는 것은 내가 이뤄줄게. 어쨌든 운학문 놈들만 죽이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네. 하지만 어떻게……?”
“아직 일일이 설명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야.”
유서하는 쉽게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운학문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접전은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멸천대에 대항하기 위해서 운학문은 모든 힘을 쏟아부었을 터. 아무 희생 없이 지나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걱정할 것 없어. 한번 마음먹은 이상 난 절대 실패하지 않으니까.”
유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무량의 말에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없나요?”
“한 가지 있어.”
유서하와 눈을 마주한 채, 진무량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신호할 때, 나의 금제를 풀어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