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추격
2017.11.09.
진무량의 통솔하에 멸천대는 유서하를 데리고 마교를 향해 출발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던 연시우와 정반대로, 진무량은 대놓고 멸천대를 움직였다.
연시우는 비천검문을 치기 위해서 백 명에 다다르는 멸천대의 존재를 철저히 숨겨야 했다.
허나 이와 달리, 진무량은 한시라도 빨리 마교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은밀히 움직이기 위해 속도를 늦췄다가 정체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무림맹의 추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진무량은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정파의 영역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정파의 세력권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제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해도 힘을 쓸 수 없다.
하여 진무량은 정체가 들킬 것을 각오하고, 마교를 향해 최단 거리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멸천대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제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곧바로 정파의 공격을 받게 될 터.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진무량은 멸천대를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눴다. 정파의 움직임을 더 정확히 파악하여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진무량이 마교로 출발한 지 엿새가 지난 뒤, 비천검문에 남겨두었던 멸천대의 후발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교로 출발하기 전, 진무량의 명령대로 포박해두었던 견무겸을 풀어주었다.
멸천대의 손에서 풀려난 견무겸은 유서하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철썩.
견무겸이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며 스스로 기합을 넣었다.
견무겸은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굳세게 다잡았다.
당장 비천검문에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이대로 낭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견무겸은 비천검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 * *
쉬지 않고 경공술을 펼친 견무겸은 곧 비천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태상장로 장백령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문주인 유월천이 없는 상황에서 장백령은 비천검문을 책임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평소에는 차분하기 그지없던 장백령의 집무실은 지금, 수많은 비천검문의 무인들이 오고가면서 극히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집단 때문에, 그에 따른 대책을 부지런히 강구하는 중이었다.
이들과 관련된 문서들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던 장백령을 향해 견무겸이 말을 걸었다.
“태상장로님, 긴급히 전할 것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잠시 기다리거라. 지금은 우선…….”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견무겸은 심각한 목소리로 장백령의 말을 잘랐다.
너무나 심각한 견무겸의 태도에 장백령 또한 의문을 느꼈다. 이내 장백령은 집무실 내부에 있는 무인들을 향해 물러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견무겸은 우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나기까지 기다렸다.
이내 주변에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견무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께서 납치 당하셨습니다.”
“뭐라? 대체 누가 서하를 납치했다는 것이냐!”
“……귀혈악인 진무량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답답한 장백령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죽은 진무량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는 게냐?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보거라.”
유서하가 납치당한 경위를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진무량에 대한 것들까지 알려야 했다.
결코 진무량의 존재를 알리지 말라는 유월천의 명령이 있었으나, 유서하가 납치당한 이 상황에서까지 그 명령을 지킬 수는 없었다.
확고하게 결심을 굳힌 견무겸은 유월천이 유서하에게 내린 명령부터 시작해서, 진무량의 존재에 대한 모든 것들을 장백령에게 설명했다.
진무량이 유서하를 사실상 납치해서 마교로 향하고 있으며, 지금 비천검문에서 주시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바로 진무량이 이끄는 멸천대라는 사실까지.
견무겸의 설명을 전해들은 장백령은 도저히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지금 네가 한 말 모두 확실한 것이냐?”
견무겸은 고개를 숙이며 장백령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장백령은 오랫동안 함께한 유월천의 생각을 이번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위험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왜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은 것이오…….’
장백령은 곧 유월천에 대한 생각들을 접었다. 당장 당면한 문제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진무량에게 납치된 유서하였다.
마교로 향하게 된 이유에 있어 유서하의 의지가 섞여 있음을 견무겸에게 전해 들었지만,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유서하에게 있어서 마교는 너무나 위험한 곳이다.
오랜 시간 번복해 온 마교와 무림맹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원한 관계로 얽혀 있다.
그런 마교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가 유월천의 여식이라는 사실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끝이다.
게다가 마교는 정파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기에 사소한 도움조차 줄 수 없다.
심지어 유서하를 납치한 인물은 비천검문과 앙숙관계인 귀혈악인 진무량.
단편적인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유서하를 마교로 보낼 수 없는 이유는 충분했다.
‘만사를 제치고서라도 어떻게든 서하를 되찾아와야만 한다.’
장백령이 견무겸을 향해 말했다.
“서하가 납치된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엿새가 지났습니다.”
그 말에 절망을 느낀 장백령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집단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이미 비천검문의 무인들 몇몇을 보내 놓은 상황이었다.
허나 그 집단이 다름아닌 멸천대라고 하니, 그 정도로는 마교로 향하는 멸천대의 발걸음을 늦추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멸천대의 손아귀에서 유서하를 되찾으려면 비천검문도 대대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유서하가 마교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린다면 사실상 추격이 불가능해지는 만큼, 어떻게든 정파 영역 내에서 저들을 붙잡아야 했다.
허나 문제는 상대가 바로 그 멸천대라는 것이었다.
장백령은 멸천대와 수차례 겨뤄 본 적이 있기에, 그들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멸천대의 속도는 여타의 문파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특히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멸천대의 속도는 더욱 부각된다.
가장 큰 이유는 멸천대의 기마술에 있다.
멸천대라면 험악한 산길이나, 설사 가파른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그들의 기마술은 깎아지른 절벽을 거꾸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똑같이 기마를 이용한다고 가정하면, 멸천대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문파는 현 강호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니 쉬어갈 필요도 없고, 언제 전투를 벌인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제아무리 멸천대라 하더라도 정파의 영역을 벗어나는 데 보름은 걸릴 것이다.’
멸천대가 전속력으로 말을 달린다고 가정했을 때, 비천검문에서 정파의 세력권을 벗어나기까지 최소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이 보름이었다.
허나 벌써 엿새가 지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정파의 세력권인 만큼 멸천대에 비해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멸천대와 달리, 추격대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을 터.
허나 그런 것까지 모두 감안하더라도 시간이 모자랐다.
장백령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너는 즉시 지금 상황을 문주께 전하거라.”
견무겸에게 명령을 내린 뒤, 장백령은 결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곧장 집무실 밖으로 나온 장백령은 비천검문의 주요 인사들을 한자리로 불러들였다.
장백령이 이토록 완강하게 소집령을 내린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비천검문 내에 있던 주요 인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회의장으로 모였다.
평소 모습을 보이지 않던 원로들이나 호법들까지 모두 모이자, 거대한 규모의 회의장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비천검문의 주요 인사들을 확인한 장백령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당장 멸천대를 쫓기에도 시간이 촉박했기에, 여유롭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 장백령의 모든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서는 사실만을 고하겠소.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들어주시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진중한 장백령의 모습은 좌중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장백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곧 진중한 장백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혈악인 진무량은 죽지 않았소. 심지어 그는 지금 멸천대와 함께 서하를 납치하고, 마교로 돌아가는 중이오.”
웅성웅성ㅡ.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장백령의 발언으로 인해 좌중이 들끓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아니, 갑자기 이 무슨…….”
쿵!
장백령은 앞에 놓인 탁자를 거칠게 후려쳤다.
“지금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 위해서 그대들을 모은 것이 아니오!”
불호령으로 인해 다시 조용해진 장내. 장백령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추격대를 편성함과 동시에……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근 문파에 공표하려고 하오.”
장백령의 이 발언은 비천검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인근 문파들에게 공표한다는 것은 곧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만천하가 알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삼 년 전 검선이 진무량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은 거짓말이 된다.
즉, 검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비천검문이 만천하에 인정함을 뜻하는 것이다.
체면과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정파에서 이는 분명 엄청난 타격으로 돌아올 터. 장백령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유서하를 되찾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무림공적인 진무량을 내세운다면, 마교로 향하는 길에 있는 문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멸천대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문파들이 움직이겠으나,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더해진다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파들이 일어설 것이다.
애초에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장백령은 진무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혀서, 더 많은 정파의 문파들을 움직이게 만들 요량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유서하를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었다.
“이 안건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드넓은 회의장을 가득 채운 비천검문의 인사들 중에서 장백령의 의견에 반발하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비천검문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유서하를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추격대를 편성하겠소.”
장백령은 고개를 돌려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천 장로, 그대는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을 모아 추격대를 편성해주시오.”
“즉시 움직이리다.”
“정 호법, 자네는 비천검문에서 가장 빠른 전서구를 준비하게. 급히 연락을 취할 곳이 있네.”
이어지는 장백령의 지시에 다부진 체격의 정 호법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백령의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곧바로 회의장 밖으로 향했다. 나머지 인사들 또한 회의를 통해 각자 할 일을 찾고, 바쁜 걸음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텅 빈 회의장을 바라보며 장백령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진무량……. 절대 네 뜻대로 되게 만들지 않겠다. 정파 전체를 움직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서하를 되찾을 것이다.’
* * *
태상장로 장백령의 뜻이 담긴 전서구는 운학문(雲鶴門)에 도착했다.
운학문은 마교의 세력권과 인접한 부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백령은 긴급히 전서구를 날려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운학문은 거대문파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부분이 있었으나, 지역 내에서만은 누구나 알아주는 명망 높은 문파였다.
운학문의 문주 우당현(遇當玄)은 장백령이 보낸 서찰을 읽고 난 뒤, 작게 신음을 흘렸다.
“흐음.”
우당현의 옆에는 운학문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옥진강(玉眞岡)이 자리하고 있었다.
운학문주 우당현의 근심을 곧바로 알아차린 옥진강이 물었다.
“비천검문에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전해온 것입니까?”
한껏 신중해진 어조로 우당현이 대답했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구나.”
옥진강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비천검문의 평판은 정파 내에서도 특히나 좋은 편이었다. 굳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곤란한 일이 생겼다면 서로 돕는 것은 인지상정.
무엇보다 운학문은 사소한 득실보다 협을 중시하는 문파였다.
평소였다면 우당현 역시 망설이지 않고 비천검문을 도왔을 것이다. 다만…….
“상대해야할 자들이 그 멸천대라고 하네. 게다가 귀혈악인도 함께 있다고 하는군.”
호기롭게 외치던 옥진강의 안색이 단번에 하얗게 변했다.
“그 괴물이 아직 살아 있었단 말입니까.”
옥진강은 조심스러운 우당현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멸천대와 맞섰던 대다수의 문파들이 멸문의 길을 걸었다. 그런 멸천대와 맞서야 한다면 누구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학문과 멸천대를 따져봤을 때, 힘의 차이 또한 확연했다.
아무리 지역 내에서 명망 높은 운학문이라고는 하나, 정파 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손꼽히는 멸천대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장고 끝에 우당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 즉시 문도들을 움직여주게. 멸천대와 겨룰 준비를 시작해야겠네.”
굳은 의지를 투영하듯 우당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악명 높은 멸천대라고는 하나, 이대로 불의를 보고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옥진강 또한 우당현의 생각과 일치했기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문주께서 당연히 그렇게 행동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우선 멸천대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네. 자네는 따로 문도들을 이끌고 멸천대의 정확한 위치를 조사해주게.”
싸울 뜻을 굳혔다면 이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
우당현은 머릿속으로 멸천대와 겨뤘을 때, 조금이라도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둘 강구해 나갔다.
당황스러운 어조로 옥진강이 말했다.
“멸천대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 비천검문이 어찌 이리도 무책임하게…….”
“비천검문에서 보낸 서찰에도 미안한 감정이 충분히 담겨 있었네. 분명 사정이 있었겠지.”
비천검문에서 보내온 서찰을 다시 한번 상기한 우당현이 말을 이었다.
“또한 멸천대는 지금 온전히 다 모여 있지 않다고 하네.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 봐야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분명 호재이긴 하겠습니다만…….”
옥진강은 차마 본심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멸천대와 겨루기 전부터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로 전해 듣지 않아도 우당현 또한 옥진강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멸천대의 진로를 막는 것이네.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비천검문의 추격대가 도착할 걸세.”
옥진강을 바라보며 우당현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활약이 절실하겠구먼. 지금 즉시 준비를 시작해 주게.”
굳게 포권을 한 채 옥진강이 대답했다.
“맡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