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재회 (1)
2017.10.29.
반짝이는 별들은 마치 쏟아져 내릴 것처럼 하늘을 빼곡히 수놓고 있었으나, 짙게 깔린 어둠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했다.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밤거리를 진무량은 홀로 걸었다.
비천검문 밖으로 나온 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멸천대의 표식을 봤던 거리였다.
대로변에 길게 이어진 석벽. 그곳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멸천대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해도 확실한 멸천대의 표식이었다.
휘어진 원 안에 일정한 규칙으로 새겨진 네 개의 사선. 분명 기다리라는 의미를 가진 표식이 확실했다.
또한 근처에 다른 표식이 없는 걸로 봤을 때, 멸천대는 아직까지 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있으리라.
‘이제부터 어디 있는지 찾아내야겠군.’
표식만 보고서는 멸천대가 몸을 숨기고 있는 장소까지 찾아낼 수는 없다.
허나 이건 예상해두었던 일. 당연히 그에 따른 방책도 생각해 두었다.
살아온 거의 모든 세월을 함께한 멸천대와는 서로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굳이 의사소통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먼저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표식을 사용했다면, 적지 않은 숫자의 멸천대가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표식을 사용해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다수의 인원을 여러 방면으로 산개해 놓았을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파악해야 할 것은, 이곳을 찾은 멸천대의 목적.
그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비천검문을 노리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석정 인근에 특별히 노릴 만한 문파도 없거니와, 자신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비천검문을 노릴 이유는 충분한다.
그렇다면 멸천대에게 있어 이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다.
주변이 온통 정파로 둘러싸인 석정에서 멸천대의 신분이 드러난다면 화를 피할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
당연히 막무가내로 몸을 숨기고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이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거점을 선택했을 것이다.’
거점을 선택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결국 두 가지.
퇴각이냐. 공격이냐.
비천검문까지 바로 앞까지 찾아온 멸천대에게 사실상 퇴로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공격을 중심으로 거점을 잡았을 터.
진무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왼쪽에 난 소로를 쳐다보았다.
‘이쪽이군.’
많은 길 중에 진무량이 왼쪽에 난 소로를 선택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멸천대는 인원을 나눠 산개해 있는 상황이다. 이 경우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산개한 멸천대 중 어느 한쪽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에 따른 대비책을 생각해놓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가장 효율적인 대비책은 정체가 밝혀진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멸천대원들을 통해 곧바로 비천검문을 공격하는 것이다.
멸천대의 생각을 충분히 파악한 진무량은 곧 다시 몸을 움직였다.
정확한 멸천대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표식이 새겨진 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었다.
* * *
석정의 전체적인 지형지물을 살피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던 진무량의 발걸음이 마침내 한곳에서 멈췄다.
몸을 숨기기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불시에 공격을 감행했을 때 비천검문의 가장 빨리 다다를 수 있는 곳.
진무량의 눈앞에는 백소라는 이름의 객잔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진무량이 백소객잔을 꼽은 이유는, 만약 자신이 멸천대를 이끌고 비천검문을 친다면 거점으로 선택했을 만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진무량은 거침없이 백소객잔 내부를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투숙객들은 모두 잠에 빠져 백소객잔 입구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꾸벅꾸벅 졸던 백소객잔의 주인은, 갑작스레 찾아온 진무량의 인기척소리를 듣고 퍼뜩 잠에서 깼다.
그는 잠이 덜 깬 채로 느릿느릿 진무량을 향해 다가갔다.
“하암~ 숙박을 하러 찾아오신 겁니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백소객잔의 주인에게 진무량이 대답했다.
“찾을 사람이 있어서 온 것이니, 내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진무량은 쓸데없는 대화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객잔 주인의 말을 무시한 채 진무량이 객잔 내부로 걸어갔다.
“저, 손님!”
객잔 내부로 걸어가던 진무량은 고개를 돌려 귀찮게 구는 주인을 쳐다보았다.
“왜?”
객잔 주인은 진무량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저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지극히 본능적인 감각이 눈앞에 사내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렸다.
객잔 주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찾는 사람이 없으면 바로 나갈 거니까, 신경 꺼.”
“알겠습니다!”
객잔 주인은 대답과 동시에 재빨리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나, 너무 놀란 탓인지 어느새 잠이 확 깨 버렸다.
극심한 졸음도 사라지자, 방금 본 손님의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일었다.
‘엄청 무서운 사람이었어.’
그다지 험악한 인상도 아니고, 특별히 위협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두렵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왔던 손님들과 느낌이 비슷하네.’
객잔 주인은 머리를 좌우로 털며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저런 무서운 사람들의 일에는 깊게 연루되지 않는 것이 무조건 이롭기 때문이다.
백소객잔 내부를 돌아다나던 진무량은 상대적으로 투숙객이 적은 이 층으로 향했다.
이 층으로 이루어진 백소객잔은, 진무량이 걷고 있는 복도를 지나면 더 이상 둘러볼 만한 장소가 없었다.
진무량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멸천대라면 이런 때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비천검문을 지척에 두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결코 허술하게 경계를 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멸천대가 평소처럼 경계를 펼친다면 접근해오는 자들을 모두 죽였을 것이다.
허나 이곳은 정파의 영역.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접근을 막는 정도의 경계는 취하고 있어야 했다.
‘잘못 짚은 것인가.’
진무량의 발걸음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어지는 그 순간.
휘익!
순식간에 두 명의 사내가 진무량의 양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무복을 걸친 그들은 각기 손에 쥔 긴 창을 진무량에게 겨눴다.
창끝을 겨눈 두 사내 중, 왼쪽에 있는 사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접근할 수 없다. 얌전히 돌아가라.”
창끝이 겨눠짐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무량의 얼굴에는 진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깊게 눌러 쓴 죽립 덕분에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삼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진무량은 눈앞에 사내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막을 찢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오고, 붉은 선혈이 흩날리던 전장을 함께 누볐던 멸천대를.
비웃음을 머금은 채 진무량이 말했다.
“고작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해서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이냐?”
“경고는 한 번뿐이다. 그러니까…….”
“그래, 멸천대의 경고는 한 번뿐이지.”
갑작스러운 진무량의 발언에 정곡을 찔린 멸천대원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때 진무량이 깊게 눌러 쓰고 있는 죽립을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멸천대의 두 번째 경고는 없어. 왜냐면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진무량의 얼굴을 확인한 멸천대원들의 두 눈이 당장에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듯, 이내 두 사람은 점점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니……. 이, 이게 대체 무슨……."
"설마……. 어, 어떻게?"
뒷걸음치던 두 명의 멸천대원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밤이 늦은 시각. 백소객잔의 투숙객들이 하나같이 단잠에 빠져 있었으나, 연시우의 방만은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미미한 촛불에 불빛이 비추고 있는 것은 연시우와 호현의 모습이었다.
연시우가 말했다.
“조사한 것은 어떻게 되었나?”
“검선의 여식은 실제로 비천검문 인근에 있었습니다. 다만 저희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그녀가 일행과 함께 비천검문으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흐음…….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특별한 행동을 취하면 곧바로 내게 보고하라.”
아쉬움을 나타내듯이 연시우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조금 더 빨리 유월천의 여식에 행방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사로잡을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허나 그녀가 이미 비천검문으로 돌아갔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아쉬운 기회를 놓쳤구나. 그렇다면…….”
연시우는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복도에서부터 의문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시우는 만약을 대비하여 호현에게 전음을 보냈다.
ㅡ혹시 뒤를 밟힌 것이냐.
ㅡ절대 그럴 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투숙객 중 한 명이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비천검문의 근처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보니 멸천대는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정보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굳이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호현은 거점의 위치가 발각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연시우 또한 호현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복도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밖에는 경계를 펼치고 있는 멸천대원들도 있을 테니 가벼운 문제라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검선의 행방에 대해서는…….”
쿵! 콰당!
연시우는 의문의 소리로 인해 다시 한번 말을 멈췄다.
즉시 경계태세를 취한 호현은 곧 자신의 창을 챙겼다.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방문을 나선 호현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앞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경계를 맡은 멸천대원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창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쓰러진 멸천대원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특별히 주변에 겨룬 흔적은 없었다. 또한 넘어진 멸천대원들의 몸에서도 작은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자세히 상황을 살필수록 납득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애초에 쓰러진 채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멸천대원의 모습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세간에서는 멸천대가 적과 겨룰 때는 귀신이 된다고 평한다.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다.
상대가 강호를 주름잡고 있는 무림맹이건 또는 그 어떤 집단이라고 한들, 멸천대는 적이라고 판단한 순간 거침없이 몸을 날린다.
그리고 완전히 상대가 쓰러질 때 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몸의 어디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든, 설령 온몸이 부서진다 하더라도 멸천대는 절대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무림에서 언제나 멸천대를 최강으로 꼽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헌데 천하에 그 누가 멸천대를 이렇게 완벽히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호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쓰러진 두 명의 멸천대원 앞에 우뚝 서있는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
“이것들이 창을 떨어뜨려? 당장 정신 상태부터 다시 뜯어 고쳐줘야겠군.”
호현은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상대를 향해 경계태세를 취했다. 허나 평소와 달리 완벽히 적을 향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명 아주 익숙한 목소리인데…….’
호현은 안력을 집중해 눈앞에 상대를 살폈다.
방 안에 남은 연시우는 더 이상 밖에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호현은 어떤 문제이든 충분히 해결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보기 좋게 연시우의 예상이 빗나갔다.
콰당!
다시 한번 영문 모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벌컥.
이내 거칠게 연시우의 방문이 열렸다.
연시우의 방을 밝히던 촛불은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곧 꺼질 것처럼 일렁였다.
허나 간신히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 앞에 서있는 진무량의 모습을 비췄다.
연시우의 얼굴을 확인한 진무량은 특유의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였냐? 연시우.”
“…….”
연시우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독에 중독된 것일까? 진법에 빠져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일까?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다.
한때 눈앞에 아른거리던 환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현실적이다.
정말 현실인 것인가?
그래도 믿을 수가 없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현실은 무조건 부정하게 된다.
연시우는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어디가 하늘인지 땅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다.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감각들을 단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
그나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 서 있었다면 곧장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대주이십니까?”
떨리는 연시우의 입이 간신히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입술을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는 것조차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눈앞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에.
진무량은 당황하고 있는 연시우와 반대로 너무나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럼 내가 뭐로 보이는데.”
“정말…… 제가 아는 그 대주가 맞으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제야 연시우는 진무량의 모습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외모, 어조, 행동, 목소리 모든 것이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대주가 확실했다.
특유의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진무량이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는 거냐?”
쾅!
앞에 놓인 다탁을 부셔버리면서 연시우의 땅바닥에 닿을 듯 숙여졌다.
“멸천대 이 조장 연시우! 대주를 뵙습니다!”
모든 멸천대원들이 그러하듯, 자신 또한 언제나 제멋대로인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미련 따위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후회를 뺀다면.
그건 바로 대주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자책은 가슴속에 사무쳐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렇기에 복수를 선택한 것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그나마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수의 대한 생각뿐이었다.
목숨? 그따위 것은 당장에라도 버릴 수 있다.
어차피 제멋대로 살아온 인생. 그 속에 있는 단 하나의 오점이자 후회를 없앨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그동안 해왔던 수없이 많은 자책과 후회.
허나 이제는 그 또한 개의치 않는다.
눈앞에 대주가 살아 있었으니까.
진무량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연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