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표식
2017.10.22.
호현은 즉각 연시우의 물음에 대답했다.
“명령하신 대로 모두 배치 완료했습니다.”
연시우는 비천검문에 도착하자마자 멸천대원들을 분산시켜 놓았다.
비천검문 인근에 있는 멸천대의 숫자만 해도 백 명에 가까웠다. 당연히 그 모든 인원이 함께 행동하는 것은 눈에 띄기 마련.
하여 연시우는 멸천대원들을 대여섯 명씩 따로 조를 나눈 뒤, 각자 다른 위치에 배치한 것이다.
호현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치다가 연시우를 향해 말을 이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으나, 대원들 모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입니다. 비천검문이 눈앞에 있는데도 당장 공격하지 않아 불만이 쌓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심기가 불편한 사람은 누구일 것 같으냐?”
살기가 짙게 밴 연시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호현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해야 할 일은 아니야. 다만 지금 누구보다 살의를 억제하고 있는 건 나다.”
호현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역시 검선의 행방이 묘연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연시우가 당장 비천검문을 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검선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의 도움을 받는다면 유월천의 위치를 찾을 수도 있겠으나, 이미 마교에서 추방당한 몸이기에 그 또한 불가능했다.
몇몇의 멸천대원들이 따로 유월천의 위치를 수소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알아낸 사실은 검선이 비천검문 내에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사실 이곳에 모인 멸천대의 인원만으로 비천검문을 상대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비천검문은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문파. 그런 비천검문을 완전히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마교에 남아 있는 멸천대가 모두 움직여야 한다.
허나 이곳에 있는 멸천대는 기껏해야 삼 할 정도. 대주인 진무량과 그 아래의 멸천사성이라 불리는 네 명의 부관이 모이지 않는다면, 멸천대는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허나 비천검문과의 힘의 차이 때문에 연시우가 공격을 망설이는 것은 아니다.
비천검문을 향해 출발하면서부터, 연시우와 함께한 멸천대는 이미 살아 돌아갈 생각 따윈 버렸다.
다만 가장 먼저 처단해야 할 원수 유월천, 그가 없는 비천검문을 공격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다.
대주를 직접 죽인 자를 꺾지 않는다면 복수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유월천이야말로 반드시 지옥으로 데려가야 할 존재.
살기를 거두며 연시우가 말했다.
“우선은 유월천의 행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표식을 남겨 대원들에게 대기하라는 뜻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표식은 멸천대가 명령을 전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특유의 방법이었다.
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할 때 많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눈에 띄는 곳에 표식을 남겨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미리 약속된 표식을 통해 명령을 전달함으로서, 멸천대는 더욱 신속한 명령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멸천대원들이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있을 때 표식은 특히 효력을 발휘했다.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장소에 표식을 남김으로서, 흩어져 있는 대원들에게 일일이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더 빠른 소통이 가능해지고, 적에게 존재가 발각될 확률도 비약적으로 줄어든다.
표식은 오로지 멸천대만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모양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표식을 본다면 벽에 자연스레 생긴 흠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연시우가 호현에게 말했다.
“유월천의 행방에 대해서 새로운 소식은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치 누군가에 눈을 피하려는 듯, 유월천은 철저하게 행적을 지웠습니다. 다만 새롭게 알아낸 사실은 있습니다.”
“무엇이냐?”
“유월천의 여식이 근처에 있다는 소문입니다.”
순간 연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신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한 것이냐?”
“막연히 떠도는 소문이기에, 아직 정확한 진위를 확실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일단 소문의 진위부터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유월천의 여식이 있는 위치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까지 모두 파악해서 보고해.”
“그렇게까지 조사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합니다만…….”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다.”
“생각하신 바가 있으십니까?”
“만약 유월천의 여식이 근처에 있다면…….”
말을 이어가면서 연시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유월천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그의 여식은 충분한 이용 가치가 있다. 만약 인질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유월천을 손쉽게 불러낼 수도 있다.
“사로잡을 계획을 세워야겠지.”
* * *
석양이 뉘엿뉘엿 서쪽으로 떨어지며 어렴풋한 붉은 빛을 비추는 술시(저녁 8시) 무렵. 유서하 일행은 비천검문이 있는 석정에 도착했다.
선두에 선 유서하는 진무량, 견무겸과 함께 비천검문으로 향하는 대로를 지났다. 석정의 중심부에 위치한 비천검문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 그들이 지나는 대로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찬 석정의 번화가를 바라보던 견무겸이 유서하에게 말을 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맞아. 이번 임무는 유독 길었던 것 같아.”
긴 여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너무나 반가운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나 봐왔던 눈에 익숙한 거리. 약간씩 바뀐 곳들도 눈에 띄었으나, 고향 특유의 정취만은 여전했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지나면서 보이는 건물 한 채, 사람 한 명에게서까지 모두 정겨움이 느껴졌다.
견무겸이 말했다.
“평소 임무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이유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놈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무량은 이죽거리는 견무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쓸모없는 놈 뒤치다꺼리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특히 술에 취해 아침까지 해롱거리는 모습은 아주 가관이더군.”
“킁.”
약점을 찔린 견무겸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딴청을 피웠다. 진무량 또한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진무량은 평범하게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철저하게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어떤 곳을 가더라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도주로를 확보해두는 것은 그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전부였으나, 실상은 주변의 일대를 완전히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소한 부분까지 세밀히 파악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비천검문이 보일 것을 감안한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잠시 헤어지도록 하죠. 제가 먼저 비천검문으로 들어갈게요.”
유서하는 석정에 도착하기 전부터 진무량과 따로 움직이는 것을 생각해두었다.
오랜만에 비천검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보니, 당연히 주변에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그때 유서하의 옆에 진무량이 있다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그 모든 걸 감안한 유서하는 진무량과 따로 비천검문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준비가 되면 따로 전서를 보낼 테니, 그때 무겸과 함께…….”
유서하는 문득 진무량에게서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어느 순간 뒤를 따라 걷던 진무량의 걸음이 멈춘 것이다.
마치 눈앞에서 귀신이라도 본 양, 진무량의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그의 시선은 완전히 멈춰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서하는 갑작스런 진무량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뭐지?’
그 어떤 위기 상황 속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진무량이다. 그런 그가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인 건 단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서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유서하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진무량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을 마친 진무량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서하는 갑작스런 진무량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으나, 차마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순식간에 진무량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진무량을 감싸는 공기 자체가 험악하게 변했다.
* * *
걱정을 안고 진무량과 헤어진 유서하는 한발 먼저 비천검문에 도착했다.
유서하를 마주한 비천검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가족처럼 맞아주었다.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일일이 모두 성의껏 답한 뒤, 유서하는 가장 먼저 장백령(章柏齡)의 거처로 향했다.
태상장로 직을 맡고 있는 장백령은 비천검문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원로이자, 유월천이 없을 때 비천검문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중역이었다.
유월천은 구중련의 조사를 위해서 비천검문을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문주가 자리를 비우는 건 문파의 분란이 생겼을 때 즉각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다는 뜻.
헌데도 유월천이 비천검문을 떠나 안심하고 구중련을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태상장로를 맡고 있는 장백령 덕분이었다.
비천검문의 동지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거의 모든 세월을 함께한 장백령과 유월천은 강한 신뢰관계로 얽혀 있었다.
또한 장백령은 거대문파인 비천검문을 이끌 충분한 능력까지 겸비했다. 실제로 유월천이 없는 비천검문을 장백령은 큰 문제없이 잘 운영해 나갔다.
장백령의 거처를 찾은 유서하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그래. 소식은 전해 들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앉거라.”
거처 안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장백령이 따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백령은 시종일관 유서하를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유서하를 자신의 손녀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꼈다.
유서하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장백령이 입을 열었다.
“몸 성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영사문에 가야 한다며 거짓 신분을 알아봐달라고 했을 때는 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느냐.”
“정말 감사합니다. 장로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어요.”
“문주께서 어떤 임무를 내렸는지 모르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신변의 안전이다. 그 점을 항상 잊지 말고,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말하거라.”
걱정스러운 눈길로 유서하를 바라보며 장백령이 말을 이었다.
“내 너의 나이 때는 한참 철모르고 날뛰었거늘, 벌써부터 고생하는 널 보니 항상 마음이 편치 않구나. 아무 고생도 없이 자라게 하고 싶었거늘…….”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꼭 아버지의 명이 아니더라도, 제가 하고 싶어서 맡은 임무예요.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유서하의 생각이 대견하다는 듯 장백령이 고개를 위아래로 살짝 끄덕였다.
“그래. 참으로 기특하구나.”
유서하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허나 마음을 정한 듯 곧 장백령을 향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 외에, 청이 하나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 내 뭐든 들어주마.”
“무기고에 보관하고 있는 염옥창을 잠시 빌리려고 합니다.”
“귀혈악인의 염옥창을 말이냐?”
흔쾌히 대답했던 장백령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무림에서 가장 극악하다고 평해지는 진무량을 쓰러뜨린 증거가 바로 염옥창이다. 허나 장백령이 유서하의 제안에 당황한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염옥창은 누구나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그런 무기가 아니었다.
아니, 진무량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다루지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비천검문을 방문한 자들 중, 창으로 이름을 떨친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이름만 대도 강호에서 알아줄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비천검문을 방문할 때 하나같이 부탁했던 것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귀혈악인의 염옥창을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비천검문 내에서 사용해야하다는 조건과 함께 염옥창을 빌려준 적도 몇 차례 있었다.
허나 염옥창을 빌렸던 뛰어난 고수들 중, 그 누구도 염옥창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염옥창은 일반적인 창보다 훨씬 무겁고 거대했다. 그랬기에 웬만한 고수들은 원하는 대로 염옥창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치 염옥창이 주인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간혹 염옥창을 휘두를 수 있는 용력을 가진 고수들도 있었으나, 그들 또한 염옥창을 완벽하게 다룬다고 볼 수는 없었다.
진무량의 손에 쥐어졌을 때, 염옥창은 거칠게 솟아오르는 불꽃처럼 흑색 기운을 내뿜는다. 허나 그와 같은 형상을 이뤄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진무량이 아닌 다른 고수들이 사용할 때의 염옥창은, 그저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보통의 창일 뿐이었다.
그런 염옥창을 왜 유서하가 원하는지 장백령은 쉽게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문주께서 내린 명령인 것이냐?”
“아니에요.”
“허면 이유가 무엇이냐?”
유서하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장백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는 묻지 않아 주시면 안 될까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염옥창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흐음.”
장백령은 근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누군가가 염옥창을 내달라고 했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었다.
허나 부탁을 한 대상이 유서하였다.
유월천의 핏줄이기 때문에 유서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유서하의 모습을 바라본 장백령은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유서하는 늘 자신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이유 없이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할 리가 없었다.
또한 유서하의 총명함은 비천검문 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가끔 뜻 모를 행동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유서하의 행동은 항상 비천검문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평소 봐왔던 유서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장백령은 결단을 내렸다.
“알겠다. 염옥창을 네게 건네라는 명을 내리겠다.”
유서하는 즉시 고개를 깊이 숙이며 장백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염옥창은 제가 직접 가져가도록 할게요.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진무량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유서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한번 거듭 감사드려요.”
허락이 떨어진 이후에도 유서하는 계속해서 장백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너무나 기뻐하는 유서하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장백령 쪽이었다. 얼떨떨한 목소리로 장백령이 말했다.
“그리도 좋으냐?”
“네. 정말 감사합니다.”
“네가 헛되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다. 염옥창은 중요한 물건이니 잘 간수하도록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염옥창을 네게 전하라고 일러두마.”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 제가 직접 무기고에 들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밝은 유서하의 미소를 보니 장백령 또한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려무나.”
* * *
유서하와 헤어진 뒤, 진무량은 조용히 견무겸과 함께 비천검문 내부로 들어왔다. 견무겸의 도움으로 진무량은 손님이 기거하는 방을 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진무량은 창가 옆에 놓인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비천검문은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할 검선의 문파이다. 또한 혈마옥에 갇히기 전, 치열하게 겨룬 적이 있는 문파이기도 했다.
그것들 모두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진무량의 머릿속에는 그와 전혀 다른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생각의 시작은 비천검문으로 오는 도중에 확인한 멸천대의 표식이었다.
두 눈으로 확인한 멸천대의 표식은 분명 기다리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