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여유
2017.10.19.
견무겸이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유서하는 곧 비천검문을 향해 출발했다.
영사문의 영역을 벗어나 꾸준히 움직인 그들은 곧 비천검문 인근에 있는 주양에 도착했다.
비천검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주양은 전체 가구의 숫자가 오백 구 정도 되는 마을로서, 제법 규모가 크고 많은 활기찬 곳이었다.
겨울의 날선 찬바람이 불어옴에도 주양의 거리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거리를 거닐며 유서하는 방금 전 도착한 유월천의 서신을 읽는 확인했다.
서신을 읽고 있는 유서하를 향해 견무겸이 물었다.
“문주님께서 다른 명을 내리신 겁니까?”
“아니. 생각보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비천검문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야.”
유서하는 다 읽은 서찰을 접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출발하는 걸로 하자.”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여기서 묵으실 생각이십니까?”
“맡은 임무도 끝냈고,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견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양은 비천검문 주변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견무겸은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거리가 멀지 않다고는 하나, 이대로 비천검문을 향한다면 오늘은 노숙을 피할 수 없다. 허나 오늘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내일 저녁쯤에는 비천검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서하는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진무량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무런 내색이 없는 걸로 보아 진무량 또한 여기서 묵는 것에 불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서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객잔을 찾고는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객잔은 이 층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일 층은 식사를 하고, 이 층은 숙박을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된 객잔이었다.
유서하와 진무량, 견무겸은 일 층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기로 한 뒤 각자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짐을 푼 유서하는 가장 먼저 일 층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고, 이내 견무겸과 진무량이 내려왔다.
유서하는 의아한 눈길로 객잔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녀 역시 비천검문과 인접한 주양을 자주 왕래했기에 이곳이 익숙했는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객잔 내부에서 사람들은 모두 흥겨운 분위기였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도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마치 마을 자체가 평소보다 활발한 느낌이었다.
유서하가 견무겸을 향해 말했다.
“뭔가 마을 사람들이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저도 그 점이 의아해서 방을 안내해준 점소이에게 물었는데, 오늘 저녁에 마을에서 연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연회?”
견무겸은 점소이에게 들은 사실을 유서하에게 설명했다.
주양에서는 다음 해 풍년을 기리기 위해 매년 한날한시에 연회를 연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하여 방문객들과 마을 사람들이 같이 즐기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네. 그 연회 때문에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견무겸의 설명을 들은 유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점소이가 주문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세 사람은 각자 적당한 요깃거리를 시켰고, 주문을 받은 점소이는 총총 걸음으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음식을 기다리던 중 유서하가 견무겸을 향해 물었다.
“부상당한 곳은 이제 좀 괜찮아?”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무리하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저녁에 열리는 연회나 구경하러 갈까?”
“좋습니다. 사실 저 또한 연회에 대해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유서하는 가볍게 웃음을 지은 뒤 진무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가실래요?”
“나한테 묻는 건가?”
유서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볼거리가 많다고 하니까, 같이 구경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진무량은 잠시 망설였으나,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절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언제 시작하는데?”
* * *
연회는 술시 초(저녁 7시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래 어둠이 깔려 있어야 할 거리는 은은한 등불로 인해 아름답게 빛났다.
지붕 사이에 걸려 있는 형형색색의 등불들은 노점상에서 파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비췄다. 그 외에도 거리는 온통 신기한 볼거리 투성이였다.
아슬아슬한 재주를 넘는 곡예사들부터 시작해서 간드러지는 노래나 시를 읊는 사람도 있었고, 또 한쪽 구석에서는 십여 명의 사람이 어우러져 웅장한 검무를 추기도 했다.
유서하 일행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거리를 걸었다.
유서하는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흥겹고 밝은 주변의 분위기는 그녀의 긴장감도 풀어주었다. 자연스레 유서하의 입가에도 연신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향해 있던 유서하의 시선이 진무량을 향해 움직였다.
진무량은 특별한 표정의 변화는 없으나, 딱히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진작 돌아갔을 진무량이다. 헌데 묵묵히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도 마냥 싫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런 소박한 사실 또한 기뻤다.
아무런 억압이나 강요 없이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이.
거리를 걸으며 다양한 볼거리를 보던 중, 유서하 일행은 가면을 쓴 채 경극을 하는 간이 극장을 지났다.
경극이 펼쳐지는 장소 옆에는 다양한 모양의 가면을 팔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유서하가 말했다.
“잠깐 저쪽으로 가보죠.”
유서하는 가면을 팔고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잘 오셨습니다! 세상천지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가면들만을 모아 놓은 것이니 천천히 한번 둘러보십쇼.”
가면을 팔고 있는 노점상의 주인이 반갑게 유서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진무량은 주인이 하는 쓸데없는 소리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한쪽 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가면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검은 바탕 위에 흉악한 나찰이 그려진 가면.
멸천대를 상징하는 가면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눈길이 간 것이다.
“저걸로 주세요.”
유서하는 진무량이 눈여겨보고 있던 가면을 정확히 골랐다.
진무량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그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노점상의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찰을 본뜬 가면을 가져왔다.
“미인 분께서 참으로 좋은 가면을 고르셨습니다. 귀찮게 치근대는 사람을 쫓아버리기에는 이만한 가면이 또 없습죠.”
유서하는 가격을 지불한 뒤, 노점상 주인에게서 가면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그 가면을 진무량에게 건넸다.
의아한 눈길로 유서하를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관심 있게 보고 있던 것 같아서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진무량을 살피던 유서하는, 그가 가면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멸천대의 가면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분명 멸천대의 대한 추억이 떠올랐을 터. 멸천대를 생각하면서 씁쓸해하는 진무량의 감정을 유서하는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기껏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면을 사는 것뿐이었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진무량의 상심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진무량에게 가면을 건넨 유서하가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혹시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나요? 오늘만은 우리도 제대로 연회를 즐겨보죠.”
“딱히 더 볼 건 없는 것 같고…….”
머물렀던 객잔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술이나 한잔 하지.”
* * *
연회 구경을 마치고 객잔으로 돌아온 유서하 일행은, 일 층에 있는 식당으로 모였다.
곧바로 주문한 죽엽청과 동파육을 비롯한 안주들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자리를 떠나며 점소이가 말했다.
“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쇼.”
각자 떠드는 소리로 인해 주변이 시끄러웠기 때문에, 유서하는 평소보다 약간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술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구중련을 쫓는 임무를 맡기 전부터 항상 바쁜 일상을 보내왔다.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희를 즐기기보다는 언제나 수련을 선택했다.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도 끝없이 수련에 매진하여 음공을 가다듬었다.
고단한 시간을 계속 보내와서인지, 유서하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이 순간이 진정으로 달갑게 느껴졌다.
진무량이 자신의 잔을 채우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술 생각이 났던 건 사실이지만, 다 같이 마시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혼자 마시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렇게 다 같이 술자리를 하게 된 건 처음이네요.”
견무겸은 아무 말 없이 잔을 옆으로 치우며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저는 아가씨를 호위해야 하기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고생도 많았는데 오늘만은 푹 쉬어도 돼.”
“……알겠습니다.”
유서하를 호위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견무겸은 술을 마시면 금방 취하기 때문에 일부러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과하게 마시지 않으면 되겠지. 여차하면 내공으로 술기운을 쫓아도 되고.’
진무량과 유서하, 견무겸은 거의 동시에 잔에 담긴 술을 마셨다.
잔이 두어 번 왔다 갔다 할 때 쯤, 견무겸이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영사문에서는 고마웠다.”
와락 인상을 구기며 진무량이 반문했다.
“취했냐?”
“이 정도로 취할 듯싶으냐! 여전히 네놈이 싫지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 최소한의 예의를 표했을 뿐이다.”
“나한테 그런 예의 표할 필요 없어. 이유는 네 주인에게 들어. 이젠 설명하기도 귀찮군.”
“흥. 이유 따윈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제부터 네놈에게 도움을 받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견무겸은 말을 마치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술자리가 일다경(15분) 정도 더 이어졌다.
슬슬 바닥을 보이는 술병을 진무량이 들어 올렸을 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견무겸의 이마와 식탁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술을 마구 들이켰던 것이 화근이었다.
진무량은 한심한 표정으로 견무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취한 거 맞네.”
쓰러진 견무겸과 달리, 아직 멀쩡해 보이는 유서하를 향해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원래 이래?”
“저도 같이 술을 마신 건 처음이라……. 정신력이 강하니까 아마도 곧 깨어날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술을 따라 마시는 진무량을 보면서 유서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가면은, 예전에 멸천대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관심이 가신 건가요?”
“알고 있었군.”
“좋은 소문들은 아니었지만, 멸천대는 워낙 유명했으니까요. 헌데 왜 그런 무서운 가면을 쓰고 다녔던 건가요?”
진무량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갖다 대었다.
“비밀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 대답 없는 진무량을 보며 유서하는 실례가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진무량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냐.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서지.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걸 이용해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더 쉬우니까. 겁을 집어먹는다면 더 좋을 테고.”
“상대가 전혀 동요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어. 가면을 쓴다는 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니까. 반대로 조금이라도 상대의 평정심을 흔들리게 할 수 있다면 더없는 이익이지.”
유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진무량의 평소 행동이 떠올랐다.
“혹시 거친 말투도 그것 때문인가요? 상대를 흔들 수도 있고, 딱히 비용이나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반은 맞아. 나머지는 내 성격이고.”
진무량은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넣었고, 유서하 또한 곧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유서하가 말했다.
“참 좋네요.”
갑작스런 유서하의 말에 진무량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졌다.
“너도 취한 거야?”
“전 아직 멀쩡해요.”
진무량은 완전히 뻗어버린 견무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도 방금 전까지 똑같은 말을 하던데.”
“취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냥 좋아서요. 이렇게 여유로운 거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앞으로 언제 이런 시간이 또 올지 모르잖아요. 위험한 일도 많이 있을 테고 어쩌면…… 많이 다칠 수도 있잖아요.”
다치는 것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유서하는 생각을 말로 하지 않고, 속으로만 삼켰다.
진무량이 말했다.
“검을 잡고 사는 놈들은 다 마찬가지야. 그런 것이 두렵다면, 일찌감치 강호에서 발을 빼는 게 나아.”
“그렇겠죠. 저도 겁을 먹은 건 아니에요. 다만…….”
말끝을 흐리던 유서하는, 진무량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많이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튀어나왔다. 유서하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다행히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고 유서하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진무량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뭐?”
그때 갑자기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견무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거세게 몸을 일으킨 견무겸은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앗!”
이낸 견무겸은 고개를 ‘휙’ 돌려 진무량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술에 취한 어눌한 어투로 말했다.
“이노옴! 여기 있었구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무량을 향해 견무겸이 꼬인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다 너어 때문이다. 네놈이 비상식적으로 강하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견무겸을 유서하가 재빨리 부축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마셔야겠네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니까, 오늘은 이만 쉬세요.”
견무겸을 부축한 유서하는 재빨리 이 층으로 올라갔다.
혼자 남게 된 진무량은 별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언제나 거친 사투 속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오던 삶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과 같은 시간은 분명 여유롭다 말할 수 있었다.
‘여유라……. 뭐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 * *
비천검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백소객잔.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닿지 않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그곳에는 멸천사성으로 불리는 연시우가 묵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연시우는 방문 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고 대답했다.
“들어와라.”
달칵.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연시우의 수하인 호현이란 사내였다.
굳은 표정으로 연시우가 호현을 향해 말했다.
“대원들은 모두 들키지 않고 자리 잡았나?”